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이제 특별한 수입이 없는 상황인데, 여유롭다. 지난 봄엔 알바가 끝난 후 새 알바를 구하기까지 꽤나 조급했다. 그렇다고 열심히 구직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급했다. 이번엔 새 알바를 구하려는 노력을 않고 있다. 조급하지도 않다. 통장에 여유가 있냐고? 그럴리가. 그런데도 천하태평이다. 그냥 어떻게 되겠거니, 빈둥빈둥.
사실, 내년 봄에 같이 일하자고 제안 받은 곳이 있다. 종일 근무가 아니며 계약직이 조건이다. 유섹인 일과 퀴어락 일이 있어, 종일 근무직을 할 수 없다(바라지도 않는다). 이 일을 믿어서 새 알바자리를 구하지 않느냐고? 아니다. 비정규직으로 사는 삶에 미래는 없다. 나중에 같이 일하자는 말, 내게 일거리를 주겠다는 호언장담은 그 순간에만 진심이다. 그 진심이 미래를 담보하지 않는다. 회사에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잘리는 직종이 비정규직/계약직이고, 좋은 일이 있거나 보너스가 있어도 혜택을 못 받는 직종이 비정규직/계약직이다. 나중에 같이 일하자는 제안,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나중이 현재가 될 때, 일자리가 사라지는 일 부지기수다. 그러니 현재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고르는 게 최선이다.
오늘 갑작스레 새로운 알바 자리를 제안 받았다. 조건은 나쁘지 않다. 금액도 나쁘지 않다. (아직 확정이 아니라 조건과 금액은 변할 수 있다.) 문제는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다. 교수라는 직종에 있는 사람과 일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교수나 계약직교수는 다들 권위주의에 무관한 편이다. 내가 늘 자랑하는 지도교수가 그렇고, 같이 일하고 있는 ㅈ 선생님이 그렇다. 이들은 나 스스로 따르고 싶은 분이지 부정적인 의미의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다. 이런 (계약직)교수는 거의 없다. 많은 교수가 부당한 권력을 남용한다. 이런 권력이 불편해서 교수와 함께하는 자리를 최대한 피한다. 그럼에도 내일 면접 약속을 잡았다. 면접 후 서로의 조건이 맞으면 같이 일하는 거고, 조건이 안 맞으면 관두는 거다. 되어도 그만이고, 안 되어도 그만이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 같겠지만, 솔직한 심정이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살기로 결정한 후, 원하지 않거나 재미없는 일에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고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도 고를 수 있는 역할을 하기로 했다. 물론 이런 나의 지위는, 내가 가진 문화적 자원 덕분이다. 돈은 안 되지만, 내가 가진 문화적 자원/권력은 상당하다. 어떤 사람에겐 보잘 것 없는 그런 자원이지만, 또 다른 사람에겐 너무 많은 자원이다. 더구나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선택할 때, 사람들은 내가 그것을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고 이해한다(아, 아닌가..;; ). 이것이 내가 가진 자원/권력의 핵심이다. 김예슬 씨가 고대 자퇴를 선언했을 때, 언론이 학력과 학벌사회에 문제제기로 요란하게 포장한 것처럼.
아무려나 알바가 끝나고 이제 한 달 정도 지났다. 그 동안 나는 바빴고, 통장잔고는 줄고 있다. 뭐, 어떻게 되겠지. 아무래도 좋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