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 앤 피터스. 『루나』. 정소연 옮김. 출판예정.
거리를 오가다 보면 아주 가끔 ‘아, 저 사람 mtf구나’란 걸 눈치 챌 때가 있다. 그에게서 어떤 티가 유난히 나서는 아니다. 소위 말하는 “생티”가 나서도 아니다. 그냥 어떤 느낌이다. (즉, mtf가 아닐 수도 있다. -_-;) 그이가 mtf란 걸 깨달을 때마다 난 반가우면서도 슬프다. 서로 모르는 척 마주쳤지만, 앞으로 다시 마주칠 가능성 없이 지나쳤지만 그래도 조금은 반갑다. 그런데도 슬픈 건 어떻게든 눈치를 챘기 때문일까?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로 노출된다는 것의 의미를 질문하는 건 쉽지 않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통하길 원하는지 알 수 없거니와 드러나는 게 좋은지 드러나지 않은 게 좋은지도 판단하기 쉽지 않다. 어떤 mtf는 ‘비트랜스여성’으로 통하길 원할 테고, 어떤 mtf는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할 테고, 어떤 ftm은 ‘비트랜스남성’이 아니라 ftm으로 통하길 원할 테다. 개인마다 다 다르다. 상황마다도 다르다.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하는 mtf라고 해서, 매 순간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하는 건 아니다. 어떤 날은 대중 속으로 사라지길 원할 테고, 어떤 자리에선 트랜스젠더로 드러나길 원할 테다.
그러니 통과한다는 것, 패싱(passing)한다는 건 동화하여 사라진다는 의미도 아니고, 자신을 숨긴다는 의미도 아니다. 패싱은 특정 코드를 인용하며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한 공간에서도 몇몇 사람들에겐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비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할 수도 있다. 익숙한 사람들에겐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하지만, 낯선 사람들 중 몇몇에겐 트랜스젠더로, 몇몇 사람들에겐 헷갈리는 상태로, 몇몇 사람들에겐 비트랜스젠더로, 몇몇 사람들에겐 무관심한 존재로 통하길 원할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자리에서 통하길 원하는 방식이나 욕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난 언제나 트랜스젠더로 통하길 원하지만, 사람들이 날 트랜스젠더로 인식하길 원하지만, 트랜스젠더로 드러나는데 일말의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로 드러나는 동시에 드러나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일까? 아니,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반갑고 조금 기쁘면서도 슬픈 이유는.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그이가 어떤 폭력에 노출되지 않는 것 정도다. 그 이상, 내가 무얼 바랄 수 있으랴.
지난주에 『루나』란 소설을 읽었다. 출간된 책은 아니다. 미국 10대 mtf/트랜스여성을 다룬 소설인데, 옮긴이가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에 감수를 요청해서 초벌번역을 받아 읽었다. A4로 150여 쪽에 이르는 분량인데도, 단박에 읽었다.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 불안해서, 너무 궁금해서.
주인공 혹은 화자는 mtf/트랜스여성이 아니라 그의 여동생, 레이건이다. 소설 제목 『루나』는 mtf/트랜스여성의 이름. 법적 이름은 리암이지만, 한땐 리아 마리로 자신을 불렀고, 현재는 루나로 부르고 있다. 달빛이 비치는 어둠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루나(luna). 학교에선 천재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있어, “미국 A급 대학”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로비를 벌일 정도다. 알바로는 출시예정 게임의 난도 테스트를 하는데, 게임회사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해서라도 그를 고용하려고 한다. 뭐, 이런 인물이지만 주변에선 그를 ‘남자’이자 ‘아들’로 인식하고, 그 자신은 자기를 ‘여성’ 혹은 mtf/트랜스젠더로 인식하고 있어 갈등한다.
소설 속 화자인 레이건은, 루나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루나를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괴롭고 힘들다. 레이건도 사실은 리암/루나가 성전환수술을 한다거나, ‘여성의 옷’을 입는 게 내키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싫은 내색 못 하고, 모든 걸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한다(혹은 행동해야 한다). 아울러 루나에게 온 신경을 다 쏟다 보니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원하는 걸 놓칠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럼 부모님들은 전혀 모를까? 아빠는 리암/루나에게 ‘씩씩하고 활동적인 아들’ 역할을 강요한다. 리암/루나가 ‘사내답길’ 바라고 항상 운동을 하길 바란다. 물론 아빠는 리암/루나 몰래 레이건에게, 리암이 혹시 게이냐고 묻긴 한다. 게이는 아니기에, 레이건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엄마는? 일단은 회사 일에 바빠 루나(뿐만 아니라 여타의 가족 모두)에게 무관심한 것으로 나온다. 더 쓰면 스포일러라 생략하지만, 이런 가족 구성원들 속에서 루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선택을 할까?
이 소설이 좋았던 건, 루나가 아니라 레이건의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어서다. 트랜스젠더 개인들이 읽어도 좋을 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 비트랜스젠더들에게 권하기에도 좋을 책이랄까. 트랜스젠더의 갈등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 비트랜스젠더들의 고민 혹은 어려움에 조금은 관심이 있어서일까, 난 이 책의 구성이 상당히 괜찮았다.
이런 전반적인 흐름과는 별도로 내가 유난히 끌린 부분은 두 곳.
하나는 아빠가 레이건에게 리암/루나가 게이냐고 묻는 장면. 게이는 아니니, 레이건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나중에 아빠는 레이건에게 화를 낸다. 난 이 장면에서 예전에 내가 겪은 일이 떠올랐다. 친척들과 있던 자리에서 내게, “혹시 남자에게 관심 있어?”라고 물었던. 질문을 한 사람은 게이냐는 의미였을까? 혹은 이성애-mtf/트랜스젠더냔 의미였을까? 확인하지 않았으니 예단할 수 없다. 문제는 그 어느 의도였건, 난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단 사실이다. 그리고 곤혹스러웠다. ‘아니’라는 대답의 복잡함을 그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여성스럽지만 이성애 남성’이란 의미로 이해했을까, ‘레즈비언 트랜스’로 이해했을까? 물론 후자의 이해를 기대하는 건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니 그럴 가능성을 부정할 수도 없다. ‘아니다’는 부정 혹은 부인의 대답은 간단하지 않지만, 종종 간단하게 이해되어 곤혹스럽다.
다른 하나는 호르몬 투여 등 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루나가 ‘여성의 옷’을 입고 레이건과 외출하는 장면. 읽는 내가 더 불안하고 흥분했다. [약간의 스포일러이니 읽을지 말지 잘 판단하세요.] 첫 외출에서, 레이건은 루나가 너무 평범해 보인다며 결코 들키지 않을 거라고 용기를 북돋운다. 하지만 루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눈치 챈다. 어떤 이들은 뒤에서 좇아와 놀리기도 하고,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조롱하기도 한다. 일부 트랜스젠더들은 ‘가장 평범한 여성’ 혹은 ‘가장 평범한 남성’으로 통하길 원한다는 점에서(한채윤 님의 예리한 분석에 고마움을!) “여자처럼 보여”보다는 “평범해 보여”란 평가를 선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노출되고 ‘평범함’으로 통하는데 실패한다.
이런저런 감상을 다 떠나서 성장소설로도 좋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형성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도 괜찮다(소설은 레이건의 ‘표면적 이성애 관계’를 기술하는데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얼른 나오기만 바랄 뿐이다.
[태그:] 트랜스젠더
아그네스, 어느 트랜스젠더의 생애를 재해석하기.
#국내 포털 기준, 성인인증을 거쳐야 하는 단어들이 나옵니다. ㅡ_ㅡ;; 읽는 이의 입장에 따라 조금은 불편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단 소리죠.
Garfinkel, Harold. “Passing and the Managed Achivement of Sex Status in an “Intersexed” Person Part 1.” Studies in Ethnomethodology. By Garfinkel. Englewood Cliffs, N.J. : Prentice-Hall, 1967. 116-185.
1950년대 말이었나. 미국의 한 ‘여성’이 한 명의 정신과 의사(혹은 정신분석학자)와 한 명의 사회학자를 찾아갔다. 그는 두 명의 ‘전문가’에게 자신을 간성으로 소개하며, 남자아이로 자랐지만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면 트랜스젠더, 간성 관련 연구를 막 시작하던 무렵이다. 정신과 의사와 사회학자는 트랜스젠더와 간성 관련 해서 어느 정도 지명도를 획득하고 있었다. 그 ‘여성’은 다른 의사의 추천으로 이 둘을 찾아갔다.
아그네스(Agnes)란 이름으로 불린 그 ‘여성’은 당시 의학에서 상당히 새로운 존재였다. 고환과 음경이 소위 규범적 형태로 불리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동시에 가슴이 상당히 발달한 상태였다. 머리는 금발로 길었고 손이나 발이 조금 크긴 했지만 체형 역시 여성형이었다. 전문가라 불리는 두 명의 표현을 빌리면, 아그네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냥 여성’이란 점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전문가라 불리는 두 인물의 이름은 로버트 스톨러(Robert Stoller)와 해럴드 가펑클(Harold Garfinkel).
아그네스는 스톨러와 가펑클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생애사를 얘기했다. 가족들과 주변 이웃들 모두 자신을 소년으로, 남자아이로 키웠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한 번도 남자로 생각한 적은 없었으며, 항상 여성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이런 괴리감을 느끼며 자라다 어느 순간 이차성징으로 소위 남성형 성적 특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0대 중반이 될 무렵, 여성형 성적 특질도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의료적 조치도 취한 적이 없는데 에스트로겐이 고환에서 분비되기 시작했다. 물론 아그네스는 기뻤다고 한다. 여성으로 통하는 외모로 변하면서 여성의 성역할을 새롭게 배웠고 남들에게 여성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그네스의 고민은 외부성기형태였다. 남성형 외부성기는 그에게 상당히 불편했다. 이성애자인 아그네스는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고 때때로 성관계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외부성기형태를 말하길 원치 않았다. 외부성기형태 뿐만 아니라 소년으로 자라야 했던 역사도 말하길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아그네스의 욕망은 실현하기 힘들었다. 외부성기형태 재구성수술은 그에게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그네스는 자신이 여성처럼 보이길, 여성으로 통하길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normally, naturally”) 보이길 원했다. 남자로 자랐다는 역사, 간성이라는 몸의 조건, 십대 후반에야 여성다움을 배워야 하는 상황을 다른 이들이 알지 않길 바랐다. 아그네스는 이런 저런 고민을 스톨러와 가펑클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스톨러와 가펑클은 각각 아그네스와의 인터뷰에 뿌리를 둔 연구결과물을 출판했다.
첫 연구결과물이 출판되었거나 출판되기 직전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 스톨러와 가펑클은 아그네스가 간성이라고 믿었다. 의료 조사 역시 아그네스가 간성이라고 판정했다. 아그네스는 에스트로겐이 자연스럽게 분비되었다고 증언했고, 이에 의사들은 분비기관이 고환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첫 만남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아그네스는 스톨러에게 자신은 10대 중반 즈음부터 에스트로겐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에스트로겐의 출처는 어머니였다. 아그네스의 어머니는 에스트로겐 약을 복용해야 하는 처방전이 있었다. 아그네스는 약국에 가서, 어머니의 처방전으로 약을 대신 사는 것처럼 말하며 약을 샀고, 그 약을 먹었다.
비록 4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이 일화는 상당히 많은 고민거리를 남긴다.
아그네스의 경험은, 이차 성징이 발생하기 직전부터, 혹은 그 즈음부터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신체 외형에 좀 더 근접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는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10대에 호르몬 투여를 원하는 경험적/’생물학적’ 근거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의료적 조치에 반대하는 적잖은 논리 중엔 “10대는 성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시기이니 성인이 되면 그때 시작하도록 하자.”란 주장이 있다. 문제는, 20대에 호르몬을 시작하면 10대에 시작하는 것보다 효과가 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mtf/트랜스여성이면 남성형 성적 특질이 두드러질 가능성이 상당하고, ftm/트랜스남성이면 여성형 성적 특질이 두드러질 가능성이 상당하다. 의료적 조치를 시작하는 시기가 늦을 수록 사회에서 ‘이질적이고 어색한 존재’로 노출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10대엔 호르몬을 비롯한 의료적 조치를 해선 안 된다는 주장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없이,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란 티가 나야 한다, 그래서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이차 성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후 의료적 조치를 시작할 경우, 더 많은 수술을 해야할 가능성이 크단 점에서 ‘성’을 바꾸려면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할 각오를 하라는 의미기도 하다. 그럼 언제 의료적 조치를 시작하는 게 좋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10대는 성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시기”란 식의 언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점이다. 10대에만 혼란스러운 게 아니다. 혼란은 평생 경험한다.
아그네스와 인터뷰한 가펑클의 글을 읽으면 음경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아그네스는 자신의 음경에서 어떤 성적인 감각을 느끼지 않으며 결코 발기하지 않는다고 가펑클에게 말한다. mtf/트랜스여성과 음경/페니스의 관계는 대체로 이와 같다. 적잖은 자서전, 공적 인터뷰와 같은 글에서 음경은 부인해야 할 대상으로 등장한다. 너무너무너무 끔찍할 뿐이라 쳐다도 보기 싫다는 식이다. 자신의 외부성기를 쳐다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반응은 트랜스젠더의 자기 몸 인식에 있어 널리 알려진 방식이기도 하다. “아이러니”는,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할 때 음경 혹은 페니스를 뒤집는 기술을 선택하면서 발생한다. 소위 여성형 외부성기형태를 갖추기 위해 음경 혹은 페니스가 반드시 필요하다. 너무도 끔찍하다고 말하지만 너무도 필요한, 없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또한 항상 존재하는 “아이러니.”
“아이러니”란 단어는 가펑클이 아그네스를 평가하며 사용했다. 이것은 가펑클의 한계이자, 가펑클과 아그네스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서다. 공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개개인들의 관계에서 나누는 얘기에 상당한 간극이 있는 건 당연하다. 음경 혹은 페니스 역시 마찬가지다. 공적으론 끔찍하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성적인 쾌락을 포기하길 꺼리는 이들 역시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음경 혹은 페니스에 부여하는 통상적인 의미(남자의 상징)가 아니라 단순한 신체기관, 살덩어리, 성적 기관으로만 이해하기도 한다.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해들이 모든 자리에서 통용되는 건 아니다. 트랜스젠더, 성전환의 진정성 혹은 완성을 측정하는 핵심적인 기준이 외부성기형태재구성수술의 여부인 문화에서 외부성기는 끔찍해서 없애야만 한다. 여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성적 감각에서 중요하다는 식의 언설은 ‘진정성’을 의심하게 한다. “너 진짜 트랜스젠더 맞아? 너 가짜지?”란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한국에선 “군대 가기 싫어서 트랜스젠더인 척 하는 거지?”라는 반응을 유발한다. 이런 문화적인 상황에서 공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내용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아그네스가 스톨러와 가펑클에게 자신의 음경이 끔찍하다고 말하는 걸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가펑클에겐 “아이러니”겠지만 아그네스에겐 전략적 발화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아그네스가 가펑클과 스톨러에게 자신을 간성으로 소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전략적 발화라고 해서, 음경을 싫어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고민은 ‘여자’와 ‘규범’이다. 가펑클은 아그네스에게 여자로 보이고 통하길 원하는 거냐고 질문한다. 아그네스는 가펑클에게 자신은 여자로 보이거나 여자로 통하길 원하는 게 아니라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 보이길 원한다고 말한다. 가펑클은 아그네스의 이 말이 혼란스러운 듯 하다. 나는 아그네스의 이 말이 상당히 멋지다고 느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펑클이 정의하는 여자와 아그네스가 정의하는 여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펑클에겐 여자라는 어떤 원본, 진짜 여자라는 상이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가펑클이 ‘여자처럼 보인다’라는 말은 ‘진짜 여자,’ ‘생물학적 여자’를 모방하고 따라하길 원한다는 말과 같다. 가펑클의 말은 아그네스가 ‘여자’도 ‘여성’도 아니지만 어쨌든 ‘여자처럼’ 보일 수는 있다는 걸 암시한다. 아그네스는 여자처럼 보이길 원하는 게 아니라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길 원한다고 답하는데 이때 여자는 이미 결정된 요소가 아니다. 누구나 여자처럼 보일 수 있고, 트랜스여성이라고 해서 여자처럼 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얼마나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 보이느냐이다. 이럴 때 핵심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한 사회의 젠더 규범을 얼마나 잘 인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소위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여성’이라고 해서 ‘여자처럼’ 보이는 데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실패했을 때 받는 타격의 정도는 각자가 다를 것이다. 아마도 아그네스, 혹은 트랜스젠더라면 그 타격은 훨씬 크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규범적이고 자연스럽게” 통하는 게 중요한다. 아그네스의 이 말은 젠더 이론에서 30년 정도 지나서야 비로소 논의를 시작하는 말들을 암시한다.
이런 글을 읽을 때 속상한 건 하나다. 아그네스의 본명도, 그가 남긴 글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여러 의미에서, 프로이트의 분석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닮았다.
발표. 논문: 평이함을 질문하기.
01
어젠 좋은 기회로 논문의 내용을 발표하는 자리를 가졌다. 올해 들어 특강이건, 강좌건, 이것저것 다 모으면 세 번 정도 강의 혹은 발표 할 기회가 있었다. 이전에도 논문 내용의 일부를 언급하긴 했지만, 온전히 논문 내용을 중심으로, 발표를 한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그러니 공식적으로 첫 논문발표 자리였나? 실력이 부족한데도 끊임없이 이런 기회를 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발표를 준비하면서 며칠 동안 논문을 처음부터 정독해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언젠간 해야 할 일.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학하는 몸으로, 자해하는 몸으로 논문을 읽는다. 흥미롭게도 이번엔 예전과 느낌이 많이 달랐다. 예전엔 그저 싫기만 했다. 오탈자와 문제점이 너무 커서 그저 싫었다. 근데 이번엔 싫은 와중에도 좀 달랐다. 이 논문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달까. ‘아, 그래, 난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란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논문구조의 문제점이 조금은 더 분명하게 다가왔다. 좀 다른 구조를 취했어야 했는데, 라는 아쉬움도 느끼고.
확실히 논문을 쓰고 다시 검토하는 과정은 글을 쓰는 방법을 (다시/새롭게)배우는 과정이다. 큰 틀을 조직하고 논리적인 흐름을 몸에 익히는 과정이기도 하고.
논문의 내용 중 일부는 좀 더 발전시켜서 새로운 글로 만들고 싶은데, 게을러서 정말로 쓸지는 미지수다. 암튼 어제 발표는 여러 모로 유익했다. 무려 두 가지 새로운 주제를 얻기도 했고. 발표자리, 특강자리는 언제나 내가 가장 많이 배우는 자리라는 말은 불변일까나.
02
조금만 언급하자면, 문제의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위 문장은 논문의 일부. 어쩌면 이 한 문장에 모든 고민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이슈는 트랜스젠더와 같이 비규범적인 존재들의 특수성이 아니라, 특정 개인들을 특수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 그리고 자신들은 평이하다고 믿는 그 평이함이다. 그것이 정말 평범한지 의심스러웠고, 그래서 계속해서 평이함 혹은 규범을 질문하며 논의를 전개했다. 그래서 동어반복,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경향이 심하다. ㅡ_ㅡ;;
트랜스젠더 이슈를 얘기한다는 건, ‘트랜스젠더란 누구인가’란 방식으로 ‘그들’을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관련 얘기를 하면 적잖은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그들’의 문제로 여기고 ‘우리’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반응한다. 하지만 특정 이슈를 얘기한다는 건, 언제나 그 이슈와 관계에 있는 모든 이들을 끌어 들여 이야기 하는 것이다. 트랜스젠더 이슈를 말한다는 건,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관계를 얘기하는 것이며, 젠더란 이슈를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규범들, ‘평이함’들을 질문하고, ‘평이함’이란 허구를 폭로하는 과정이다.
관련해서 좋아하는 또 다른 구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