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나오긴 나오려나

작년 말부터, 아니 작년 가을부터 책 나온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말이 쏘옥 들어갔다. 책을 기획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바쁘고 그러다보니 책을 위한 글쓰기를 비롯해서 여러 작업의 진행 속도가 더뎠다. 그러다 최근 다시 모임을 가졌고, 책에 들어갈 글 몇 편의 초고들이 편집장에게 넘겨졌다. 기획팀은 서울여성영화제 때 책을 출판하고 싶어 하지만 편집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했다. 그러며 대신 그 시기에 홍보 팜플렛을 뿌리자는 제안을 해왔다.

그 책엔 두 편의 글을 실기로 했다. “번호이동 혹은 성전환”과 “정체성 명명과 경계지대”

“번호이동 혹은 성전환”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에서 주민등록제도의 의미를 질문하는 글이다. 주민등록제도 당시에 왜 하고 많은 방식 중에서 성별이분법을 핵심적인 기준의 하나로 설정했는지와 같은 질문의 대답은 후속작업으로 돌렸지만-_-;; 트랜스젠더에게 신분증이라는 것이 신분을 증명하는 제도가 아니라, 신분을 배신하거나 부인하는 제도라는 것을 말하고,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변경이 단순하게 기존의 국가체제에 편입하는 것으로 말할 수 없음을 얘기를 하고 있다. 당연히 아직도 글은 미숙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면 괜찮다고 하지만, 이 말의 의미는 그 정도면 무난하지 않겠느냐, 기획 의도는 살리고 있지 않으냐란 의미이지 잘 썼다는 의미는 아님을 알고 있다.

“정체성 명명과 경계지대”는 게이, 크로스드레서 그리고 mtf 트랜스젠더 사이의 긴장 관계를 다루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글이다. (책에는 부치와 ftm/트랜스남성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글도 있을 예정이다.) 하지만 인터뷰와 루인의 경험을 재해석하면서 긴장관계가 있다 없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정체성을 명명한다는 것이 사실은 어떤 규범적인 틀을 만들고 그리하여 게이는 이러이러하고 크로스드레서는 이러이러하고… 라는 식의 획일적인 모습을 만드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 동시에 게이나 크로스드레서였던 mtf 트랜스젠더의 경험이나, 게이 트랜스젠더 혹은 레즈비언 트랜스젠더는 존재할 수 없는 부재로 만들어 버림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논의는 조금도 새롭지 않지만(Jacob Hale을 비롯해서 몇몇 관련 논의들이 쉽게 떠오를 수도 있다) 새롭거나 재밌게 여기는 맥락이 루인의 주변엔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루인의 이런 설명이 자칫 “이성애” 트랜스젠더보다는 퀴어 트랜스젠더를 더욱더 선호하는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다. 1998년도에 나온 루빈(Henry Rubin)이나 2000년에 나온 나마스테(Vivian Namaste)와 같은 몇몇 트랜스섹슈얼/트랜스젠더들은 트랜스젠더 이론이 퀴어 이론이 수용할 수 있거나 선호하는 방식으로 발달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한국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은데, 기묘하게도, 트랜스젠더 이론을 다루는 책 한 권 발간되지 않았고 관련 논의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임에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퀴어라는 어떤 범주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트랜스젠더를 설명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트랜스젠더를 끊임없이 젠더 이분법에 문제제기하는 존재로 여기고 싶어 하고. [따로 쓸 내용이지만, 트랜스젠더는 젠더를 초월한다는 말이나 젠더를 강화한다는 말이나 사실은 같은 내용이다.] 사실, 루인 역시 퀴어와 트랜스젠더가 겹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이런 식의 설명은 퀴어와 트랜스젠더는 어쨌든 따로 구분해서 존재한다는 걸 전제한다는 점에서 모순어법이지만, 이는 루인은 언제나, 기존의 언어체계에서 모순어법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모든 트랜스젠더는 “이성애자”라는 식의 인식이 팽배하기에, 이 글의 내용을 끊임없이 주장할 필요가 있지만, 동시에 이런 분위기들 때문에 마냥 편하지는 않다.

다른 한편 이 책에 실릴 글의 저자들을 따졌을 때, 이른바 “당사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7명 중 두 명이다. 이런 구분이 상당히 코미디처럼 작동하고 있다. “정체성 명명과 경계지대”라는 글의 초고를 처음 가져가서 들었던 논평 중엔 “루인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란 내용도 있었다. 이 말은 의도하건 하지 않건 루인이 트랜스임을 상기한다. 물론 루인의 글을 읽다보면 루인이 트랜스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긴 하다. 경험해석에서 출발하는 걸 좋아하는 루인은, “○○○”라는 글에서 어떤 경험을 해석했다면, 얼마 뒤에 쓴 “☆☆☆”라는 글에선 같은 경험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이렇게 경험이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 너무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일테면, 루인이 낯선 사람과의 자리에서 조용한 것은 어쨌거나 “남성”으로 자랐기에 “과묵”한 것일까, “여성”이기에 “차분”하고 “다소곳”한(웩!) 것일까?] 젠더를 둘러싼 해석 역시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당사자”라는 건, 종종 비판을 불가능하게 하는 아주 불편한 것이기도 하다. (“당사자”라는 식의 표현 자체가 코미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지점이 문제이다. 기획팀이 이런 문제에 과도하게 반응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이런 지점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 없다. 다른 한 편으론 루인 역시 이런 지점을 이용하는 측면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튼, 어쨌거나 책이 나오기는 나오려나 보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이는 바라지 않고 나오기 직전까지 충분히 퇴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출판 직후에 쓰는 새 글은, 책에 실은 글을 비판하는 그런 글이면 좋겠다.

부모님께 커밍아웃 하기 어려움..

관련 글: 노란 손 + 세월 속에 변하는 부모’님’

부산에 가서 부모님과 (혹은 친척들과) 얘기를 나누며 종종 답답함을 느꼈다. 부모님이나 이성애혈연(부계건 모계건 상관없이)을 매개하는 친척들은 루인이 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아이로 알고 있었다. 그 사실에서부터 답답함이 발생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앎은 사실이기도 했다. 부모님들이 원하는 모습 혹은 알고 있는 모습 속에서 루인은 하루 종일 학교에만 있는 “범생이 원단”일 뿐이었다. 그러니 세상 물정은 잘 모르고(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_-;;) 아직은 철없는 학생.

그리고 부모님이 모르는 모습과 생활 속에서 루인은 실태조사기획단에서 일하기도 했고(“했고”라는 과거시제를 쓰고, 아직 활동이 끝난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흑흑)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라는 트랜스젠더/성전환자 단체를 발족하고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루인이 스스로를 활동가로 부를 수 있느냐는 언제나 의심스럽고 부족함에 부끄럽지만. 어쨌거나 여성학/페미니즘 분야에선 나름 유명한 [여/성이론]이란 잡지의 2006년 겨울호에 글을 싣기도 했고(물론 그 글은 너무도 부끄러워서 이렇게 말하기가 민망하지만 ㅠ_ㅠ) 모 주간지나 어떤 매체들에 미약하나마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얘기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저 공부만 하는 아이”라는 한 친척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속상하고 답답했다. 루인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속상하기도 했다. 그 내용이나 수준과는 상관없이 “유명한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고 적당히 허풍 섞인 말을 한다면 부모님은 한껏 좋아할 거란 걸 너무도 잘 알지만, 할 수가 없었다. 보여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라 믿지만, 행여나 보여 달라고 했을 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루인이 쓰는 거의 모든 글은 루인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루인의 글을 읽는 순간이 곧 커밍아웃 하는 순간이다. 루인이라는 이름 자체를 밝히기가 꺼려지기도 했고.

그동안 워낙 제멋대로에 속만 썩인 아해라서,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가장 큰 “불효”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그 완고함이 의외의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한편으론 그걸 믿기에 루인이 트랜스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듣는 당장은 화를 내거나 울거나 충격에 쓰러지거나 하시겠지만(엄마님의 현재 건강 상태를 봤을 때, 한 번 쓰러진다는 건 다시는 못 일어 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럼에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루인이 트랜스인 걸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도 있고, 루인 스스로 트랜스’임’을 부정하고 그냥 살겠다고 말하길 바라는 몸으로 루인이 트랜스’임’을 받아들이며 관계를 맺어 갈 수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망설이고 그냥, 부모님만은 루인의 정체성들을 영원히 모르길 바라는 몸.
(석사학위 논문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두 가지 판본으로 찍을 계획도 세우고 있다. 실제 제출하고 취득할 제목과 목차의 판본과, 가족들에게 보여줄 제목과 목차를 지닌 판본으로. 그렇다면 아마 서론도 조금은 바뀌겠지. 왜냐면 원래 판본에선 서론에서부터 루인의 정체성들을 얘기하는 것으로 시작할 테니까.)

설이라는 행사를 빌미로 만난 가족 중 조카 한 명은, (어떤 명확한 정체성 범주 구분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나중에 게이로 커밍아웃할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편으론 기쁘지만 한 편으론 걱정이었다. 스스로에게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겪을 일들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여담인데, 왠지 루인의 사촌들 중엔, 나중에 LGBTQ 모임이라도 있다면 그런 모임에서 만날 거라는 느낌이 드는 사촌도 있다. 서로가 당황하려나? 흐흐. 엄청 재밌어하고 좋아하겠지. 후후.)

이런 감정들-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기 어려움, 친척 중엔 커밍아웃을 ‘해야만 하는’ 정체성인 사람이 없길 바라는 몸이 루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픈 걸 의미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루인의 다양한 정체성들이 특별히 자랑스러운 것도 아닌 만큼이나 특별히 부정하고픈 것도 아니다. “게이 자부심[gay pride]”과 같은 말이 혐오와 공포가 만연한 사회적인 맥락에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말은 자칫 동성애자를 특별한 존재로,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와는 완전히 유리된 존재로 만들 위험성 때문에 별로 안 좋아하는 표현이다(“트랜스젠더는 신을 매개하는 존재”, “트랜스젠더는 젠더와 무관한 존재”, “젠더를 횡단하는 존재”란 식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특별히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없는 만큼 부끄럽거나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루인의 친척관계 속에서 커밍아웃을 해야만 하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몸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이런 앞선 걱정은, 상대를 루인의 수준으로 환원해서 판단하는 것이기에 위험하단 건 ‘안다.’ 커밍아웃하지 않으며, 자신의 원하는 방식으로 여겨지는 트랜스(이럴 때 그 사람을 “트랜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가 다른 트랜스, 트랜스젠더를 향해 더 심한 혐오 발화를 하는 이유엔 이런 ‘앞선 걱정’이 있기 때문임도 ‘안다.’ 이런 고민들 속에서 어떤 답답함을 느꼈다. 이런 답답함은 속상함일 수도 있고, 한편으론 아직도 커밍아웃을 하기에 앞서 걱정과 두려움이 다른 한편으론 커밍아웃을 하고 싶은 바람이 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언젠가 커밍아웃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꼭 커밍아웃을 해야 할까?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 루인의 정체성들을 부정하거나 숨기지도 않으면서 루인의 활동을 말하는 방법은 없을까? 남의 일이지만 관심이 있어서 하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고민을 하며, 예전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나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인터뷰에 대답한 사람이, 자신의 딸은 자신처럼 살지 않았으면 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했다. 조금은 기대를 했기에 어떻게 논문을 썼을지 궁금하고 읽고 싶(었)다. 기회가 생길지는 알 수 없지만….

玄牝에서..: 지난 일정, 논문

무수한 상념들이 몸을 타고 놀았다. 그러며, “그래, 이건 [Run To 루인]에 쓰면 좋겠어”라고 중얼거렸지만, 그곳엔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없었다. 인터넷과는 너무도 거리가 있는 일주일. 그렇게 많은 언어들이, 하고 싶은 말들이 몸속에 가라앉았다.

5통의 전화가 왔다. 한 통은 행정조교 업무와 관련한 내용이고, 한 통은 같은 과 사람의 (루인이 조교라는 위치와 관련한) 전화였다. 한 통은 집주인이 인터파크에서 표가 왔다며 언제 오느냐는 내용이었고 한 통은 택배회사에서 집에 있느냐는 전화였다(그 사람은 새로 바뀐 사람인 듯 했다). 그리고 한 통은 소중한 친구의 전화였다.

10통의 문자가 왔다. 활동과 관련한 문자가 있었고 새해 인사를 담은 문자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뮤즈티켓이 도착할 거라고, 루인보다 더 걱정해주신 ㄷㄴㅈㅅ님 문자엔 다시 한 번 고마움을!

gmail엔 활동 관련 메일이 한 통 있고, 파란메일엔 HRnet으로 온 메일과 필요해서 받고 있는 정보메일이 쌓여있다. 그러니 당장 답장을 해야만 하는 메일은 없다.

일주일 동안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메일은 언제나와 마찬가지였고, 전화도 문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메일을 통해 아주 급한 내용이 있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없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아니지만 핸드폰이 없을 때에도 인터넷이 없을 때에도 잘 살았는걸. 그땐 그때 상황에 맞게 살았고, 지금은 핸드폰과 인터넷이 있는 상황에 적응한 몸으로 살고 있을 뿐이고, 지난 일주일은 단지 인터넷이 없는 상황에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루인의 몸은 언제나 [Run To 루인]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저런 글을 쓰고 싶다고, 메모지에 적기도 했고, 다이어리엔 좀 더 많은 일기를 썼다.

편지도 많이 썼다. 보내지도 않을 보낼 수도 없는 편지들. 몸에 쓰고 몸에서 지우고 만 편지들. 그렇게 지워버린 언어들은 결국 언젠가 몸에 합체해선 우울증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랜만에 문자로 나타나지 않는 편지들을 썼다. 이대로 어느 날 죽는다면, 누구도 그 존재를 알 수 없을 편지들. 편지를 쓴 사람조차 다음 날이면 잊어버릴 편지들.

Eels의 [Electro-Shock Blues]를 많이도 들었다. 자주 듣는 앨범은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 있는 경우이다. 앨범 자체가 좋아도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 없다면 자주 안 듣게 되는데, 부산에서 “Climbing To The Moon”이란 곡에 반했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자주 안 듣는 이 앨범이 자주 듣는 앨범 목록에 올랐다. 아울러 “Dead Of Winter”도 반한 곡. 이승환의 [Hwantastic]도 자주 들었다. 특히 좋아한 곡은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와 “울다”. 하지만 어떤 앨범에서 타이틀곡을 유난히 좋아하는 경우가 잘 없다는 점에서, 이번 앨범에 좋은 평가를 하기 힘들다. (이것이 루인이 앨범을 판단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논문은 9편을 읽었다. 월요일부터 월요일까지 8일 중, 내려가는 날, 어제, 오늘 빼면 5일이니, 적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정작 부산에서 꼭 읽겠다고 한 글은 읽지 않았다. 그래도 설마 이 정도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며 챙겨간 논문들인데, 아주 놀지는 않은 모양이다. 부산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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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경, “어떻게 우리는 여자, 혹은 남자인가?”, [한국여성학] 제18권 2호(2000)
Patricia Elliot and Katrina Roen, “Transgenderism and the Question of Embodiment”, GLQ 4:2 (1998)
Henry S. Rubin, “Phenomenology as Method in Trans Studies”, GLQ 4:2 (1998)
Joshua Gamson, “Must Identity Movement Self-destruct? A Queer Dilemma”, Social Problems vol.42 no.3 (Aug. 1995)
Daniel Nourry & Nikki Sullivan, “BODILY (Trans)Formations”, Scan vol 1 number 3 november 2004
Nikki Sullivan, “‘It’s as plain as the nose on his face’: Michael Jackson, modificatory practices, and the question of ethics”, Scan vol 1 number 3 november 2004
Nikki Sullivan, “Integrity, Mayhem, and the Question of Self-demand Amputation”, Continuum: Journal of Media & Cultural Studies Sep2005, Vol. 19 Issue 3 (2005)
Nikki Sullivan, “Somatechnics, or, The Social Inscription of Bodies and Selves”, Australian Feminist Studies Nov 2005, Vol. 20 Issue 48 (2005)
Nicole Anderson and Nikki Sullivan, “Technological Interventions”, Scan vol 3 number 3 decembe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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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고 간 부산이지만, 그래서 더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읽고, 최근의 관심사를 정리하다가 당혹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위에 적은 글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트랜스 혹은 트랜스젠더 뿐 아니라 최근의 관심사를 잘 엮어서 논문을 쓴다면, 참고문헌의 최소한 절반은 1997년 이후에 나온 것으로 채워질 거란 것이었다. 이 정도는 다행이고 아무리 못해도 1/3 이상은 2000년 이후에 나온 글들이다. (이건 일종의 ‘컴플렉스’이다.)

물론 “트랜스젠더”가 2006년 한국의 최고 인기검색어 중 하나이자 히트상품이긴 하지만,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논의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논문을 쓴다면, 꽤나 위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탁월하게 잘 쓰지 않는 이상, 잘 써봐야 “새롭다”는 얘길 들을 테고, 조금만 엉성해도 “최신 유행 따라 하느냐”는 비판에 직면하기 쉽다는 걸. 이런 짐작을 한 건, 솔직하게, 루인이 아주 빈약한 토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자격지심에서 발생한 짐작이기도 하다. 철학사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서, 그렇다고 수학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글을 쓴다면, 다른 누군가 지적하기도 전에 엉성함의 무게에 스스로 짓눌릴 게 뻔하다. 다행히 루인의 지도교수 역시 이런 점에서 정확하기에 루인의 취약함 혹은 엉성함을 언제나 정확하게 지적해주고 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엉성한 글을 쓰려고 안달이지만, 걱정이다.

요즘의 걱정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엉성하지 않게, 탄탄한 토대에서 글쓰기. 고민 중에 있는 글쓰기. 겉멋 들지 않은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