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와 학벌과 관련해서

트랜스젠더와 관련 있는 기사를 검색하다 문득 아쉬움을 느꼈다.

소위 인권활동을 한다는 트랜스젠더, 학제에서 공부한다는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젠더 바나 클럽에서 일하는 트랜스젠더를 재현하는 방식은 현저하게 다르다. 대표적으로 내가 그렇다. 기껏해야 한두 번이지만 내가 미디어에 등장하는 방식과 클럽이나 바에서 일하는 트랜스젠더들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방식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대표적으로 다음 두 기사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아레나, 트랜스젠더 바에 잠입하다”
“남녀화장실을 차별이라 따져야 하나”

이 두 기사 간에 발생하는 엄청난 차이는 단순히 해당 매체의 ‘의식 수준’에 따른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이 두 기사에서 등장하는 트랜스젠더 이미지의 차이가 학벌, 학력, 직종, 그리고 활동 공간때문이라고 읽는다. 아주 간단하게는 학력/학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젠더라고 해서 모든 트랜스젠더가 같을 수 없다. 미디어의 판단 기준에 따르면, 난 복에 겨운 거다. 불행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며, 이런 비교 자체가 ‘올바름’이 아니라 ‘타자화’란 건 알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런 평가를 무시할 수도 없다. 이런 평가 기준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야 하고.

나의 아쉬움은, 위에 링크한 두 기사에서 발생하는 학력/학벌 이슈를 내가 분석하기는 어렵단 점이다. 아마 한겨레에 등장한 인물이 내가 아니었다면, 난 두 기사에서 나타난 학력과 재현의 관계를 신나게 분석했을 텐데. 중립이 불가능한 허구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난, 내가 등장한 기사를 분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쪽으로 상당히 기울 가능성이 현저하다. 아마 필요 이상으로 나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공정성을 획득하려 애쓰겠지(바로 이런 이유로 글은 ‘공정성’을 상실하고 허접해지겠지).

트랜스젠더를 구분하는 기준 중엔, 규범을 실천하는 방법이 있다. 수술을 하고 트랜스젠더인 티가 나지 않는 상태로 살아가는 이들과 기존의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상태로 살아가는 이들로 나누는 것. 이 구분은 학력/학벌로 나누는 것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겹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를 연결해서 쓰면 무척 흥미로운 글이 될 텐데 …. 누가 쓸 사람? 아님 협업할 사람?
(끝내 이 주제로 내가 직접 쓰고 싶은 욕심을 못 버리고 있다. ;;)

+
아레나 기사는 다른 주제로 분석할 예정인데,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ㅡ_ㅡ;;

한 가지 주제로 글쓰기: 채식과 학벌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첫 번째 판본은 초고란 전제 하에서 발송했다가 5일 만에 취소했다. 글을 취소한 날인 지난 토요일은 청탁 마감 날이었으니 꽤나 당혹스러웠으리라. 여러 가지로 친구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하나의 판본을 쓰고 프린트를 했지만 역시나 폐기했다. 그렇게 (첫 번째 판본과는 완전히 다른)세 번째 판본을 썼고 친구에게 글을 보여주고 메일로도 보냈다. 첫 번째 글은 기획을 잘못 해석한데다 글 자체도 어정쩡했다. 두 번째 판본은 첫 번째 판본을 폐기하면서 새로 구상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겠다는 욕심이 보여 폐기했다. 오직 한 가지 얘기만 하겠다고 다짐하고 세 번째 판본을 새로 썼다. 일요일인 어제 쓰고 오늘 낮에 메일로 발송했다. 루인에게야 모든 글이 초고이니 계속 고쳐야 하지만(발송하고 나서 다시 읽으며 또 퇴고를 했다는;;;) 틀 자체는 안 바꿔도 될 듯 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어제 아침에야 비로소 기획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간 기획의도를 잘못 파악한 측면이 있었고(몇 가지 지점들은 파악했지만, 결정적인 측면을 놓치고 있었다) 어떤 강박들이 있었다. 더군다나, 루인의 많은 글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 편의 글에 다 쏟아 붓는 편이라면, 이번 글은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주는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 글엔 “루인의 글”이란 어떤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ㅋㄷ의 지적처럼 첫 번째 판본은 “루인의 글”이란 느낌이 없었다. (ㅋㄷ, 고마워요!)

이렇게 세 가지 판본을 쓰는 과정을 거치면서 배운 건, 한 편의 글엔 한 가지 얘기만 하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쓴 많은 글들이 한 편의 글에 여러 이야기를 동시에 풀었고(마치 이 글이 루인의 마지막 글이자 유일한 지면이라도 되는 냥) 그래서 다소 산만하거나 중구난방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면, 이번 글에선 어떻게든 한 가지 이야기에 집중하는 방식을 취했다. 물론 하고 싶은 얘기는 많았다.

선택한 주제는 채식과 학벌이었다. 아니, “채식으로 읽는 학벌, 학벌로 읽는 채식”이 더 정확하겠다.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 온 루인으로선 채식과 학벌이라는 관계가 꽤나 선명한 편이고, 채식과 관련한 최근 고민 역시 이 지점이기에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입장에서 재밌었다. 그런 동시에 이 주제가 이번 기획의도를 꽤나 잘 반영할 수 있겠단 느낌도 있었다. (내용을 압축한다면 “음식의 정치학“에 있는 내용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이번 글은 블로그에 공개할 수는 없는 성격이라서;;; 물론 공개하고 싶은 바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글을 쓰면서, 채식과 학벌의 관계를 좀 더 집중적으로 다뤘고 그래서 스스로 뭔가를 정리할 수 있었다. 다른 여러 교차지점들을 동시에 다뤄야 한다고, 이 부분은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고 다른 지점들과 같이 얘기해야 해, 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렸지만, 그걸 매끄럽게 풀어낼 능력이 현재의 루인에겐 없고, 글의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일부러 쓰지 않기도 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이유로 제한했는데, 그 이유는 친구가 알고 있으니까….) 이런 “쓰지 않음”을 통해 루인의 위치와 이 글의 한계를 분명히 할 수 있고, 괜히 이것저것 다 언급해서 비판을 피해갈 여지를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한 가지 측면이라도 분명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채식과 관련한 다른 많은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하지 않고, 채식과 학벌의 관계에 집중해서 글을 전개했다.

그러며 주제를 좁혀야 할 필요성을 조금은 느꼈달까. 주제를 좁혀서 글을 쓸 필요가 있다는 선생님들의 지적이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번 글쓰기 작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다른데 있다. 그것도 “루인의 글”같지 않은 그 글, 즉 폐기한 그 글 속에 있다. 루인에게 가장 중요한 지점. 하지만 이 지점은 친구에게 먼저 말하고 여기 써야지. 이렇게 하겠다고 딱히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그냥.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고 소중함의 표시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 나누고 싶은 얘기가 참 많은데….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있어야만 만나는 건 아니지만….

+
확실한 건, 이렇게 나온 세 번째 판본과 같은 글은 다른 어디에서도 쓸 수 없는 글이란 것. 특히나 “루인”이란 이름으로 외부지면에서 쓸 수 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고. 그래서 이런 기회를 준 친구에게 더욱더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