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2007.07.25. 20:10, 아트레온 1관 지하3층 B-7
※스포일러 없음.
영화를 읽는 내내 울었다. 이 울음의 의미, 울 수 있음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질문하기도 전에, 울고 있었다. 그러며 이 영화와 관련한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이 영화를 읽었다는 정도의 구절로 끝날 것만 같았다. 영화관을 나서서, 玄牝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랬다. 하지만 그 길, 어디였더라, 영화의 마지막 구절, “기억해주세요”를 중얼거리다가, 이 영화와 관련해서 쓸 말이 너무 많음을 깨달았다.
기억한다는 건,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그 시절의 일을 “있는 그대로” ‘기억’한다는 건 불가능하며,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그 시절의 일을 기억(해석/재현)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누구의 입장에서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점에서, 기억한다는 건, 정치적인 행위이며, 그 자체로 정치적인(“이데올로기적”) 해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하고 재현할 것인가(즉, 기억할 것인가).
이 영화의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재현만 했다고 말했다. 영화를 개봉한 시점이다 보니 흥행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감독의 저 말은 언론플레이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인터뷰 전문을 훑다가, 언론플레이가 아니라 감독은 정말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고 믿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 말이야 말로, 5.18을 해석하고 재현하는데 있어 감독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느꼈다.
이 영화는 기존의 성역할부터, 자주 들어온 해석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일테면 영화는 총을 들고 지키겠다는 “남성”역할의 사람들과 간호하고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여성”역할의 사람들이라는 성별구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동시에 광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중, “여성”역할의 사람은 단 한 명만 등장할 뿐이다(일테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같은 역할인 셈이다). 동시에 이 영화는 지키는 자와 이런 이들에게 “보호” 받는 자 혹은 참여하지 않는 자란 영웅서사를 반복한다.
꽤나 짜증났던 장면 중 하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영화는 광주시민들(을 매개해서 극장에 온 관객들)에게 “우리를 기억해주세요”란 말, 우리가 이렇게 싸우고 있음을 기억해달라는 의미의 말들을 반복한다. 5.18과 관련한 유명한 다큐를 차용한 그 장면은, 시민군과 계엄군이란 대립구도를 만들고, 시민군으로 총을 들고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잠든 사람들 혹은 방관자로 만들거나, 방관자까지는 아니어도 5.18에서 소외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즉, 도청에 모이지 않은 사람들, 계엄군이 진입해 오던 그 시간에 자고 있던 혹은 집에 있던 사람은, 극장에서 이 영화를 읽는 관객과 같다는 효과.)
감독은 지식인의 해석, 지식인의 등장이 필요 없다고 말하며, 사람들의 증언을 듣기만 해도 충분했다고 한다. 이 말은, 이 영화를 찍는 감독 자신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영화 전체를 좌우하는 지식인일 수도 있단 걸 의미한다. 감독은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을 않”했다고 하지만, 결국 이 말은, 기존의 주류해석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재현(해석/기억)했다는 의미이며, 감독은 이렇게 해석하는 이들의 입장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었다는 의미는 아닐는지.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그저 재현만 했다”란 식의 홍보가 가능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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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를 읽고 있노라면, 감독이 5.18이란 사건에 압도되어 있다는 느낌이 상당히 강하다. 그건, 감독의 출신지역과 관련 있는 걸까?
이 영화를 읽고, 이 영화와 관련한 글을 쓸 수 없다고 느낀 건, 어쩌면 부담스럽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에 대한 비판이 5.18자체를 비판하는 건 아님에도 행여나 그렇게 비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혹은 부담과, 부산에서 19년을 살아온 역사적인 경험 때문에 생긴 부담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활동가 중의 한 명인, 광주 출신의 C는 중고등학생 시절 물에 젖은 손수건 없인 등하교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집이 전남대 앞이었기에, 데모와 최루탄이 일상이었다고 했다. 다른 한 활동가는, 역시 광주 출신인데, 초등학생시절 어느 대학에 갔다가, 대학생들에게서 화염병 던지는 방식을 배웠다고 했다. 훈련이 아니라 그냥 장난삼아 가르친(초등학생에게 화염병 던지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그 대학생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느낀다).
반면 루인은 5.18을 강준만의 책을 통해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매일같이 그 분위기에서 살지만, 어떤 사람들은 책 혹은 텍스트를 통해 읽는다. 이런 경험의 차이. 더군다나 지역감정이 심한 상황에서, 부산에서 산다는 건, 광주에서 산다는 것과 너무도 다른 상황들을 경험한다는 걸 의미한다. 아마 전두환이 재판정에 섰을 때의 상황을 얘기하면 분명해지려나. 그 시절, 루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전두환을 욕했지만, 루인의 느낌에 5.18때문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돈을 챙겼다는 이유로, 부정부패 때문에 욕하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욕하면서도 다들 하는 말이, “그럼에도 전두환이 인물이지”였다. 노태우처럼 혼자서 돈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심복들에게도 돈을 나눠줬다는 점에서 전두환은 똑똑한 인물이고, 의리가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경남 합천에서 전두환의 아호를 딴 “일해공원”이 등장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분위기/맥락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고.
루인이 대학 들어가면 반드시 데모를 할 거라고, 학생운동을 할 거라고 말하며, 절대 데모는 하지 말라고 말하던 부모님들은, 이런 이유로 한겨레신문을 못 보게 했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못 읽게 했다. 그렇다고 루인 “과격”하거나 “진보”적이었느냐면, 지금도 그렇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정도의 루인도 “과격”하다고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근데 좀 웃긴 건, 이런 아빠님, 루인의 초등학생시절, 여운형을 긍정적으로 그린 책을 읽으라고 줬다는 거. ;;;)
이런 역사적인 경험 속에서, 이 영화를 읽고 난 후 글을 쓴다는 건 적잖아 부담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텍스트로 대상화해서 감상문을 쓰는 건 아닌가 하는 부담. 그렇다고 “당사자주의”를 말하려는 건 아니고. 다시 “어떻게”라는 질문에 직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