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에서 아동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실천과 관련한 논의를 다루었다. 아동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논의는, 다른 많은 의제처럼 매우 다양한 세부 의제를 형성하기 때문에 간단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자리에서는 아동 청소년의 성적 실천을 해도 괜찮으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논쟁을 할 수도 있다. 룸카페를 이용하는 청소년의 ‘실태’라는 최근 보도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텐데, 한국 사회는 여전히 아동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그 자체로 사실상 범죄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에 아동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실천을 다루는 논의는 어떤 자리에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내용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수업의 맥락에서, 아동 청소년이 성적 실천을 해도 괜찮냐 아니냐라는 식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이는 상당히 소모적인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 찬반이라는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되어서는 곤란하며, 찬반으로 흐를 여지가 존재한다면 쟁점을 다른 지형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다룬 논의의 기초는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아동과 성인 사이의 관계 혹은 세대 간의 사랑을 둘러싼 퀴어 운동의 대응(Gamson의 “Messages of Exclusion: Gender, Movements, and Symbolic Boundaries”). 둘째, 아동이나 청소년의 정체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동성애 규범성의 강화 혹은 트랜스젠더퀴어 삭제의 정당화(Bryant의 “In Defense of Gay Children Progay Homophobia and the Production of Homonormativity”). 마지막으로 아동의 순수함을 바라는 성인의 아동 오리엔탈리즘(kid orientalism) 문제(Stockton의 “The Queer Child Now and Its Paradoxical Global Effects”). [칼럼이라 정확한 인용 생략]
두 번째 논의는 브라이언트가 논하는 주제인데, 1980년 DSM-III판에 트랜스젠더퀴어가 정신병 진단 범주로 등록되고 아동의 GID(젠더 정체성 장애, 이하 GIDC)를 진단할 수 있으면서 발생했다. 게이나 퀴어 비평가들은 GIDC 진단이 여성스러운 남성 아동을 교정하여 성인 동성애자가 되지 못 하도록 막는다고, 요즘 표현으로 전환 치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비평가들은 GIDC 진단이 1973년 DSM에서 동성애가 삭제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의료계가 동성애를 여전히 정신병으로 진단하기 위한 의도로 추가한 진단명, 즉 동성애 혐오에 근거한 진단명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GIDC 항목을 만드는데 참여한 일군의 의료진은 이 범주가 동성애 아동을 진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린 시절 여성스러운 남자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게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통계가 있다고 해서 GIDC가 반드시 성인이 되었을 때 게이가 될 잠재적 동성애자를 치료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이들 의료진이 주장하는 논의의 핵심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퀴어는 다르며, GIDC 진단과 치료는 성적 지향 혹은 섹슈얼리티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를 치료하는 것으로 동성애가 문제가 아니라 트랜스젠더퀴어가 문제라는 점이다. 이 논쟁에 대해 브라이언트는 GIDC를 둘러싼 퀴어 비평가와 의료전문가 사이의 논쟁이 특정한 종류의 동성애자를 생산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퀴어를 주변화, 병리화하는데 동조한다고 비판한다.
브라이언트의 논쟁은 다각도로 고민할 지점을 제안하는데, 당장 오늘날 스포츠에서 12살 이전부터 의료적 조치를 해야만 여성으로 인정해준다는 식의 규정을 둘러싼 문제에 기입될 수 있다. GIDC를 둘러싼 논쟁은 아동의 잠재적 동성애자 되기의 가능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사유하지만, 트랜스젠더퀴어 아동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젠더는 치료의 대상이라는 논쟁, 트랜스젠더퀴어 아동 청소년이 경험하는 진단 과정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이슈로 취급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 병리화 시도를 문제 삼지도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12살 이전에 의료적 조치를 하도록 요구하는 스포츠계의 요구가 마치 중립적 요구 조건처럼 들리는 찰나에도 어떻게 사회적 무관심과 병리화, 혐오가 내재하고 있는 불가능한 기획인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브라이언트의 논쟁은 단순히 동성애와 트랜스젠더퀴어 사이의 규범성 논쟁에 그치지 않고, 지금 현재 나타나는 트랜스젠더퀴어 혐오의 역사성이자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혐오의 층위와 위계를 다루는 논의로 재독해할 수 있다. 물론 브라이언트는 아동 청소년의 동성애 실천을 전-동성애(pre-homosexual)라고 표현하고, 잠재적으로 동성애자가 될 재원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아동 청소년의 성적 실천이나 섹슈얼리티 고민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며 이는 심각한 문제점이다. 더 정확하게, 브라이언트가 아동 청소년의 동성애를 잠재적 상태로 이해하는지, GIDC를 둘러싼 논쟁에 참여한 이들의 태도가 그러한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데, 그 태도가 아동 청소년의 성적 실천이나 섹슈얼리티 모색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 태도로 읽힌다. 그럼에도 아동 청소년의 성적 실천이나 젠더 표현을 둘러싼 퀴어 커뮤니티에 내재하는 혐오의 층위를 탐색하는 이 작업은 혐오와 위계의 역사를 살피는 중요한 작업이다.
셋째, 스톡튼의 논의는 아동을 섹슈얼리티 혹은 성적 실천을 향한 성인들의 공포를 문제 삼고, 아동을 순수한 존재로 다루고자 하는 작업이 사실은 아동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지적한다(스톡튼은 아동child만 다룬다). 무엇보다 이러한 식의 순수한 아동 형상이 미국 내에서 구해지기 어려워지자, 순수한 아동이라는 표상을 아웃소싱해서 비서구사회의 아동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통해 구현하고 재현한다고 지적한다(여기서 다루지 않는 다른 중요한 키워드를 몇 개 더 제안한다). 이 맥락에서 스특튼이 제안하는 개념어 아동 오리엔탈리즘은 아동은 순수해야 한다는 식의 판타지를 통해 계속해서 성인들은 아동의 고통을 욕망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처한 아동을 원하는 동시에 그 아동의 표정이나 삶에서 순수함, 천진난만함을 길어내고자 하는 그 과정을 지칭한다. 즉 성인이 주도하는 아동 논의에서 아동의 언어는 삭제되고 성인의 바람, 성인이 욕망만이 남고 있으며 이것이 서구 사회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워지면서 비서구-저개발 국가의 아동을 통해 구현된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이자 동시에 아동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를 수 있다.
스톡튼의 논의는 아동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논의에서 아동 청소년 당사자의 목소리가 삭제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또 다른 작업이기도 하다. 스톡튼의 논의가 주는 중요한 질문거리 중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쉽게 만나는 당사자주의와 관련이 있다. 나는 한국 사회, 한국의 퀴어 커뮤니티만을 주요 문화권으로 경험했는데 이들 공동체만큼 당사자주의가 강한 곳을 만나지 못했다. 경험해서 안다, 당사자가 가장 잘 안다, 비당사자가 뭔데 말하냐는 식의 태도가 갖는 위험성에 모두가 동의할 때에도, 많은 이들이 뒤돌아서서 비당사자의 언어를 비난하고 당사자의 언어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아동 청소년은 당사자가 될 수 있는가? 아동 청소년은 성인이 원하는 언어의 증인이 될 때, 성인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의 미숙한 판본을 재현하는 존재일 때만 그 목소리가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관련해서 서경님 글 참조). 그러니 아동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성원권은 아동 청소년 자신일 때에도 그 성원권 자체가 상정되지 않는다. 대신 언제나 가장 힘들고 피해를 많이 본 존재로만 재현되거나 가장 악랄한 가해자의 모습으로만 재현되고, 그 피해나 가해 속에서 성인들은 그 나이대의 ‘싱그러운 해맑음’만을 바란다는 점에서 영원히 사회적 성원권을 박탈당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것을 스톡튼은 아동 오리엔탈리즘으로 명명하고 이 개념어는 상당히 유용하다(이 논문을 추천해준 정래님 감사!).
첫째, 갬슨의 논문은 우리와 그들 사이의 정체성 구성, 정체성 경계의 구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탐색한다. 통상 우리와 그들의 구조는 주인공과 적대자라는 양자 구조로 상정되지만 갬슨은 여기에 청중을 도입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사건은 퀴어 운동사에서 중요한 장면이다. 1990년대 초 ILGA가 유엔의 중요한 지위를 획득하려고 했을 때, ILGA의 소속 단체였던 NAMBLA로 인해 동성애는 아동 성범죄자로 비난을 받으며 지위를 획득하기 어려워졌다. NAMBLA는 1970년대부터 활동한 퀴어 단체로 성인과 아동 청소년 사이의 연애 관계 혹은 세대 간의 사랑을 지지하는 단체다. 이 단체가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미국 대중과 정치권 등은 ILGA와 동성애는 아동 성범죄자, 소아성애집단과 같은 식으로 맹비난했다. 이에 ILGA는 미국 대중의 목소리에 동조하며 NAMBLA를 비난하며 퇴출시키는 결정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기술하며 갬슨은 정체성 구성에서 우리와 그들이라는 단순한 적대 구조를 상정하지 않고 우리와 그들, 그리고 우리와 그들 사이의 논쟁을 청취하는 청중의 존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 퀴어와 그 혐오자는 미국 사회에서 계속해서 적대 전선을 형성했지만 NAMBLA의 존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신 미국 대중과 유엔의 지위라는 새로운 청중이 등장하면서 적절한 우리의 성원권은 새롭게 재편되었고 우리의 오랜 구성원 중 일부는 그들로 추방되었다.
그런데 갬슨의 논의를 통해 내가 다루고 싶었던 주제는 약간 달랐다. 아동 청소년은 성적 실천, 섹슈얼리티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럼 아동 청소년이 만나는 사람이 성인이거나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난다면 그 관계에도 동의할 것인가? 내가 가끔씩 보는 몇몇 퀴어 유튜버는 연애 상담을 자주 해주는데, 매번 10대와 만나는 20대 이상의 성인을 맹비난하는 입장을 취한다. 종종 나이 차이가 4살 이상만 나도 비난하거나 이상하다는 식의 반응도 한다. 이것은 내가 속해있는 오프라인 공간에서도 쉽게 접하는 반응인데 30대가 20대 초반에게 고백했다고 맹비난하며 징그럽다는 말한 것을 들은 적도 있다. 이것은 나이 차이가 그 자체로 상호 관계 구성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구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 고민을 확장해서 아동 청소년이 자율적으로 성적 실천을 하고 섹슈얼리티를 고민할 수 있다면 성인과 만나는 것은 왜 문제로, 범죄로, 잘못으로 상정되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 이것은 청소년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고민은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그 한계와 경계가 구축되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또한 청소년 섹슈얼리티 실천에서 그 결정의 가능성은 언제나 충분히 열려 있는 것 같은 환상이 있는 특정 커뮤니티에서도 빈번하게 강고한 한계와 보호주의가 작동함을 말해준다. ILGA와 NAMBLA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특정 단체를 추방하면서까지 섹슈얼리티 정성상과 규범성, 그리고 유엔의 지위를 획득하고자 했는가의 문제를 넘어, 퀴어 규범성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계속해서 아동 청소년의 목소리가 삭제되거나 성인이 설정한 한계 내에서만 다루어지도록 했는가를 질문하도록 한다.
이제 앞의 논의들을 다 연결해보자. 이들 논의를 연결해서는, 아동과 성인의 연애 관계는 정당하다거나 심각한 범죄라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단순한 결론은 사유의 포기일 뿐만 아니라 규범과 폭력에 공모하는 행위가 된다. 대신 이들 논의를 연결해서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퀴어 정치학은 성인을 위한 정치학인가? 퀴어 섹슈얼리티는 성인의 섹슈얼리티만을 정당한 실천으로 삼는가? 퀴어 정치학에서도 아동 청소년은 여전히 금지와 금기와 규제와 보호주의 속에 배치되어야 하는 존재인가? 퀴어와 아동 청소년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ILGA의 판단에 동의하든, NAMBLA의 입장에 동의하든 중요한 핵심은 찬반에 있지 않다. 핵심은 퀴어 정치학이 아동과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미숙하고 퀴어 되기의 잠재적 가능성, 재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50H50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