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수업 쪽글로 제출한 글입니다. 뮤노즈의 비동일시 서문을 읽고 쓴 글이고요.
글에 추가로 부연설명을 붙일까 했지만 뭘 또 그렇게 하나 싶어 관두기로 했습니다.
(“뮤노즈와 비동일시”는 개념을 서명하는 부분이라 건너뛰고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서지사항은
루인. “비동일시Disidentification, 경험을 재구성하기” Run To 루인. 2012.10.04. 웹. 2012.10.04.
정도면 되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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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동일시Disidentification, 경험을 재구성하기
-루인
뮤노즈와 비동일시
호세 에스테반 뮤노즈(José Esteban Muñoz)는 비동일시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첫째, 생존전략인 비동일시는 소수자 주체 범주 혹은 비규범적 범주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동시에 지배 규범이 창조한 전형-재현실천과 다른 방식으로 비규범적 범주를 해석하며 동일시하는 것이다(3-4). 이것은 어떤 대상과 동일시하는 동시에 동일시하지 않는 수행성을 통해 자기 범주를 부정하지 않고 유지하는 전략이다. 이는 지배 규범의 안정성에 공모하는 듯한 환상을 지배 규범에 부여하지만 지배 규범 내에서 비규범을 실천하며 지배 규범의 불안정한 지위, 상태를 폭로하는 행위기도 하다. 지배 규범의 불안정한 상태를 폭로한다는 점에서 얼핏 지배 규범을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독해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둘째, 뮤노즈는 비동일시 전략이 지배 규범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쓰고 다시 만드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23). 즉 “비동일시는 지배 규범의 모순 요소를 쫓아버리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다 상실한 대상을 쥐고 있는 우울증적 주체처럼, 상실한 대상을 붙잡고 작업하며 새 삶에 그것을 투자한다”(12). 그리하여 모순은 비동일시 혹은 정체성 범주 형성에 기본 요소다. 정체성 형성이 애당초 단일하고 정제된 형태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모순, 불안정, 불안은 어떤 의미에서 범주 형성에 필수 요소기도 하다. 셋째, 비동일시는, 페쇠가 알튀세르의 주체 개념을 재해석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듯, 지배 규범에 동화를 선택하지 않으면서 단호하게 반대하지도 않는 전략이다(11). 그래서 비동일시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동시에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며[working on and against] 작동하는 전략”(11)이다. 이것은 내부에서 비동일시하고 외부에서 동일시하는 전략이기도 한데, 지배 규범의 호명에 반응하면서도 그것에 온전히 포착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호명 실천이 성공하지 못하고 빗나가는 곳에서 비동일시가 발생한다.
하리수 씨, 매혹과 외면
하리수 씨가 주인공으로 나온 방송 <인간극장>이었을까? 정확한 방송명은 기억나지 않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신기한 존재를 대하는 호기심과 관음증으로 텔레비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들은 “남자래…”와 “정말 예쁘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나는 외면했다. 그때 나는 단 한 번도 화면을 바라보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나의 관심을 직접 표현하지 않았다. 주변 누구도 내가 그 방송에 관심이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관심 없는 듯 행동했지만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나를 딱히 트랜스젠더로 설명하고 있진 않았다(그전까지 트랜스젠더란 범주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당시 내 고민의 팔 할은 다른 것이었고 젠더 범주는 덜 중요한 이슈였다. 그럼에도 마가 고메즈(Marga Gomez)가 “homosexual hearing”(Muñoz, 3)이라고 부른 것처럼, 나는 “트랜스젠더 듣기/부름”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하리수 씨가 등장한 방송을 매혹으로, 그러면서도 다소 불안한 몸으로 접하고 있었다.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온 신경은 방송에 쏠려 있었다.
나의 경험은 정체성 범주 형성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구성될 수 있다. “언제 처음 자신이 트랜스젠더란 것을 알았나요?”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누군가는 아주 어렸을 때를 소환할 것이다. 나라면 하리수 씨의 텔레비전 방송 청취(!)를 그 기원으로 소환할 것이다(“<XY 그녀> 보고 트랜스젠더 된 내 아들”…?!?!). 하리수 씨의 방송을 엿들을 뿐 곁눈질도 하지 않은 행동은 그때 이미 트랜스젠더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더 정확하게는 이 사회가 어떤 몸과 범주만을 규정하고 권장하는지를 포착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 시간 나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기민하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적극적 관심은 단순히 ‘진기한 것을 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동일시 욕망으로 비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그때 나의 행동은 비동일시의 생존전략과 매우 닮았다. 그런데 그 경험을 이렇게만 해석해도 괜찮을까?
원가족,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기
원가족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논문이나 책은 『성폭력을 다시 쓴다』나 『재생산에 대하여』와 같은 것이 아니다. Transgender History 혹은 Normal Life처럼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한 것이다. 원가족과 함께 지내야 할 때면 트랜스젠더 이슈나 퀴어 이슈와 관련한 글을 꼭 챙긴다. 원가족이 내가 트랜스젠더란 점을 알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관심사에 적극 호응하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원가족 중 영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나 뿐이기 때문이다. 영어 논문이나 영문도서를 집 어딘가에 대충 두어도 나는 안전하다. 그 책은 내가 학생임을 증명하는 증거일 뿐이다. 혹은 영어 공부를 한다는 증거로 쓰일 수도 있다. 그것이 트랜스젠더 이슈, 퀴어 이슈와 관련한 공부라는 상상력은 원가족에게 없다.
원가족은 이태원이 아니라 부산 변두리에서 살았고 (부)모님은 고졸 학력에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하면 충분하고 먹고 사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고민하는 계급이다. 광고에 나오는 영어를 간신히 읽거나 아예 읽으려 들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거의 언제나 영어 논문을 읽는다. 내가 트랜스젠더란 점을 밝힌다면 아마 상당한 충격을 받겠지만 나는 원가족과 있을 때면 무척 편하게 트랜스젠더 논문을 읽는다. 이성애-비트랜스젠더 규범을 자연질서로 체화하는 원가족과 있는 자리에서 영어 논문을 읽는 행위는 숨통이 트이도록 한다. 나는 공공연히 내가 트랜스젠더 이슈에 관심 있음을 밝히지만 원가족 중 누구도 그 사실을 포착할 수 없다. 아니다. 나는 공공연히 밝힌다고 쓰지만 나는 공공연히 밝히지 않는다. 원가족 중 누구도 영어를 읽지 않는다는/못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나는 이성애-비트랜스 규범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으면서 그것과 동일시도 하지 않을 뿐이다. 원가족은 나를 그냥 학생으로 포착하고 나는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나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하여 원가족과 있는 자리에서 나는 트랜스젠더인 동시에 트랜스젠더가 아니다. 슬픈 일이다. 트랜스젠더인 동시에 트랜스젠더가 아니라서 슬픈 것이 아니다. 원가족의 계급과 학력, 출신지역이 나의 안전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성애-비트랜스젠더 규범에의 ‘공공연한 저항’ 혹은 그것과의 비동일시는 어떤 의미에서 다른 범주 경험을 ‘무시’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비동일시를 비동일시하기
위에서 기술한 방식으로 서사를 구축할 때 나의 역사, 나의 삶은 이제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뮤노즈는 “픽션을 통해 존재가 되는 ‘진짜 자기’는 픽션을 생산하는 자기가 아니라 픽션으로 생산되는 자기”(20)라고 말했다. 비동일시 전략/논의로 내 삶의 특정 경험을 재구성할 때, 혹은 비동일시 논의에 부합하는 어떤 경험을 발굴할 때 내가 그 경험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로 바꾼 사건이 나를 (재)생산한다. 나는 비동일시 주체로 호명되고 그것이 나를 주체(지배규범에선 ‘나쁜 주체’지만 비동일시 맥락에선 ‘좋은 주체’)로 만든다. 즉 내가 구술한 서사는 특정 형식에 맞춰 (재)구성된/(재)생산된 것이고 그것은 특정 인식체계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 포착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이렇게 바뀐 ‘나의 경험’은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그간 설명하기 힘들었던 특정 경험을 비동일시 서사로 바꿔내면서 그제야 나는 그 경험을 이해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와 그 경험은 또 다른 틈새, 균열을 만든다. 그리고 서사로 바뀐 경험은 나와 동일시할 수도 대항동일시할 수도 없는 상태, 즉 비동일시 상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