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BT/퀴어 운동의 방법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LGBT/퀴어는 지금 이 사회의 이성애-비트랜스젠더 중심주의로 차별과 억압을 겪고 있다는 방식의 언설로는 더 이상 운동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없다. 벌써 몇 년 전부터 그런 시대로 변했다. LGBT/퀴어가 겪는 차별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글쓰기, 강연, 캠페인과 같은 운동을 성공으로 이끌기 힘든 시대다. 슬프게도 이것은 이미 많은 활동가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이를 인정할 것인지, 아닌지는 별개고). 운동의 방식이, 발화의 형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너와 내가 겪는 차별이나 억압이 어떻게 공통의 경험일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공통의 경험, 모든 개인은 정체성이 단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복잡한 범주로 삶과 운동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언설은 무척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 정치학은 지금 이 새대의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체화되지 않았다. 삶에서 나온 이 성찰은 많은 경우 이론적 언어일 뿐 구체적 삶과 무관하다고 잘못 이해되기도 하다. 문제는 개인 범주의 복잡성이 지금 이 시대의 한국 사회에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맥락은 상당히 다르다. 과거엔 어땠는지 몰라도 오늘날, “LGBT/퀴어는 차별을 겪는다”란 언설엔 “이성애자인 나도 차별을 겪는다”라고 반응한다. 이런 식의 반응에 동조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지금은 대충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선 “이성애-비트랜스젠더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애-비트랜스젠더 중심의 사회에서 비이성애-트랜스젠더는 차별받고 있고 이성애-비트랜스젠더는 이를 고민해야 한다”란 언설은 큰 효과를 갖기 힘들다.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문제 삼는다고 이것은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적 지향점은 견고하게 유지하되,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은 바꿔야 한다. 비이성애-트랜스젠더가 겪는 억압이나 차별을 이성애-비트랜스젠더가 살면서 겪는 다양한 어려움, 억압 혹은 차별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경험을 유사한 서사로 재구성해서 상당한 접점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사회구조적 맥락(혹은 최소한 ‘너도 나도 다 차별 받으니 가만히 있으라’가 아닌 방향)에 초점을 전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불가능할 것 같지만 이것은 가능하다. 가능하다고 믿는 이유는 지난 4월에 했던 특강에서 이것의 초기 판본을 시도했고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건 차별을 겪는다. 그렇기에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하는 차별 경험을 유사한 사건으로 상상할 수 있는 설명 방식, 혹은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이렇게 믿는다.

LGBT 단체는 여성단체와 연대하는가?

폭력 단체와 관련한 글을 쓸 때 실제 염두에 둔 어떤 정황 판단이 있었다. 차마 쓸 수는 없지만.. 쓸 수 없는 건 자기 검열이라기보다 아직은 짐작이라 선뜻 얘기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서다. 그럼에도 어떤 질문을 공유하자면, 제목과 같다. LGBT 단체 혹은 한국의 동성애 단체는 여성운동/여성주의 단체와 연대하는가? LGBT 혹은 동성애 단체는 여성주의단체에 연대를 종용하기도 한다. 그럼 여성주의단체의 의제나 활동에 동성애 혹은 LGBT 단체는 연대를 종용하는 만큼 참여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떤 대답이 가능할까? 이게 고민이다. 각 단체의 활동은 페미니즘과 퀴어정치, 이 두 정치학을 주요 정치적 밑절미 삼아 활동하고 있는가? 물론 이 질문은 바로 나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두 정치학의 자장에서 나는 움직이고 있는가?

여성 범주 논쟁, 일부

기말페이퍼 “‘여성’ 범주의 구성: 여성 범주를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에 쓴 글의 일부입니다.

전문은 언제나 그렇듯 writing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에도 얘기했듯 블로깅할 것 없으면 포스팅 때우기 용으로 다른 부분을 이렇게 쓸 수도 있습니다. 크. ;;;
아래는 하리수 씨가 한국 사회에 등장할 수 있는 맥락을 탐색한 부분입니다. 추정이 일정 부분 섞여 있다는 점,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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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황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트랜스젠더 연예인을 상기시킨다. 다름 아니라 하리수 씨다. 2001년 화장품 광고를 통해 처음 등장한 하리수 씨는, 이름처럼, 한국 사회의 핫이슈였다. 하리수 씨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방송되었고 <인간극장>과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하리수 씨의 등장은 한국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엔 ‘대중’에게 트랜스젠더란 존재를 널리 알린 점이다. ‘트랜스젠더=하리수 씨’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젠더란 용어를 낯설어 하는 이들에게 하리수 씨 이름을 꺼내면 바로 이해하듯, 하리수 씨는 트랜스젠더 이슈를 대중과 얘기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2001년에도 지금도 많은 이들이 하리수 씨를 통해 비로소 트랜스젠더란 존재를 인식하고 인지하기 시작했지만 하리수 씨가 한국 최초의 트랜스젠더가 아님은 당연한 사실이다. 비록 하리수 씨의 등장에 연예계 매니지먼트의 전략이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2001년 뜬금없이 트랜스젠더가 한국 사회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매니지먼트사의 전략은 특정 역사적 맥락에 위치한다.
한국 신문 기사에서 처음으로 성전환수술이 등장한 것은 1921년이지만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즈음부터다(루인, 250-257). 기지촌 이태원 지역을 중심으로 트랜스젠더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엔 트랜스젠더 집단이 언론에 수 차례 보도되었다. 1976년엔 공식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트랜스젠더 업소가 만들어졌다. 이태원을 중심으로 트랜스젠더는 꾸준히 모였다. 이를 기반으로 지금까지도 이태원은 트랜스젠더 공동체/집단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런 집단 형성은 1990년대 동성애인권운동이 등장했을 때 함께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1990년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데 하나는 동성애인권운동을 매개로 트랜스젠더가 적극 부상한 점이며 다른 하나는 성전환수술과 관련한 의료 문헌이 출판되기 시작한 점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성애자는 호모로, 트랜스젠더는 게이로 불렸다. 아울러 트랜스젠더는 여장하는 남성으로 언론에 보도되곤 했다. 동성애인권운동의 등장으로, 게이는 동성애자를 지칭하고 트랜스젠더는 지정 받은 젠더가 아닌 다른 젠더로 살아가며 때때로 의료적 조치를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구분하기 시작했다. 용어의 구분은 동성애인권운동의 주요 작업 중 하나였고 이것은 트랜스젠더를 가시화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1996년엔 트랜스젠더와 크로스드레서가 따로 모이는 모임, 아니마가 결성되었다. 1998년 발간을 시작한 섹슈얼리티 전문 잡지 《버디》는 꾸준히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를 싣고, 트랜스젠더와 동성애를 구분하는 글을 게재하였다. 이 작업은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별개의 범주로 구분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 시기의 맥락에선 트랜스젠더를 가시화하는 작업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성애-비트랜스젠더를 제외한 모든 젠더 실천과 성적 실천을 일괄 변태(혹은 호모)로만 이해하던 당시 상황에서 존재의 경험을 세심하게 구분하고 설명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운동이다. 아울러 동성애인권운동에 적잖은 트랜스젠더가 함께 했다는 점에서 1990년대 동성애인권운동은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Transsexual)인권운동이라고 평가함이 더 정확하다. 다른 한편 김석권, 최병무와 같이 성전환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 집단은 성전환수술 관련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까지도 성전환수술이 제도적 절차를 갖추고 있진 않지만 이들의 학술지 논문 게재는 성전환수술을 학제에 공식화하는 역할을 했다.
1990년대 후반, 트랜스젠더는 ‘대중’에겐 낯설 수도 있지만 하위 문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곳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저변을 형성하였다. 하리수 씨는 바로 이런 시대적 정황에서 등장했다. 일부 논자들은 홍성천 씨가 커밍아웃에 따른 피해만 겪었고, 하리수 씨는 그에 따라 발생한 사회적 인식 변화가 가져다 준 혜택만 누렸다고 말하곤 한다. 이것은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평가다. 물론 홍석천 씨의 커밍아웃/아웃팅이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홍석천 씨 한 사람의 커밍아웃이 트랜스젠더가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고 상상한다면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평가거나 과장된 평가다. 동성애 이슈는 홍석천 씨를 통해 ‘대중’에게 더 널리 알려졌다고 해도 1990년대부터 인권운동을 전개한 활동가들의 헌신이 커밍아웃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를 조성했다. 홍석천 씨의 커밍아웃/아웃팅은 이런 배경에서 가능한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리수 씨가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며 방송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몇 십 년에 걸쳐 형성된 트랜스젠더 하위 문화와 1990년대 본격 시작한 LGBT 운동의 성과라고 평가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비록 하리수 씨의 등장이 트랜스젠더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단순히 이것만이 하리수 씨의 효과는 아니다. 그 논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와는 별개로 하리수 씨는 여성 범주를 다시 질문하도록 했다. 태어났을 때 지정받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번째 숫자가 1번이었던 사람이 자신을 여성으로 설명한다면, 그리고 완벽하게 여성으로 보이고 ‘여자보다 더 여자같은’이란 수식어를 듣는다면 누가 진짜 여성인가? 타인을 마주했을 때 (의료적 조치를 한) mtf(male-to-female)/트랜스여성과 비트랜스여성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구분할 수 없다면, 사실상 본질적 범주로 여기는 여성(과 남성) 범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리수 씨의 존재가 제기한 여성 범주 논쟁을 모두가 진지하게 여기진 않았다. 일부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일군의 사람들은 하리수 씨가 여성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여성이라면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리수 씨는 그럴 수 없기에 여성이 아니란 이유를 들었다. 이런 주장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며 변하지 않은 것인 섹스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며 변할 수 있는 것인 젠더라는 섹스-젠더 구분 공식을 주장하고, 여성을 생물학적 본질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성이라고 주장하며 여성 억압을 비판했던 페미니즘의 역사와 충돌한다. 임신과 출산 경험은 많은 여성의 경험일 순 있어도 모든 여성의 경험일 수 없고 여성 경험의 본질적 토대일 수 없다. 일부 장애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지 않으며 때때로 이 경험을 부정당한다(황지성). 그럼에도 임신과 출산 능력 여부로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언설은 여성을 해부학적 기능, 생물학적 본질로 환원한다. 그리하여 기존의 여성 범주에 속하던 이들(임신할 수 없는 비장애여성과 장애여성 등) 중 상당수를 추방한다. 여성 범주는 하리수 씨가 아니라 하리수 씨를 배제하려는 언설을 통해 더 골치 아프고 또 곤란한 상태에 처한다.
이런 일군의 트랜스젠더 혐오 발화 혹은 여성 범주 논란에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 범주는 충분한 논쟁으로 등장하지 않고 있다. 하리수 씨는 어느 순간 그냥 여성으로 인정되고 만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이란 판단에서인지, 인권 차원에서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단순하게 인정하고 넘어갈 이슈가 아니라 논쟁을 통해 더 많은 논의가 등장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곤란을 격는 건 트랜스젠더다. 하리수 씨를 간편하게 여성으로 대하는 이슈는 트랜스젠더 논의에서 제기하는 젠더 이슈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 단순히 인정하고 넘어가는 순간, 비트랜스젠더의 젠더 범주, 혹은 비트랜스여성의 여성 범주는 본질적 범주로 다시 한 번 고착된다. 젠더 자체를 되묻고 질문해야 함에도 이를 차단한다. 아울러 이러한 인정은 하리수 씨처럼 여성으로 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는 트랜스여성만 ‘여성’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나 자신처럼,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지만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아 남성으로 더 많이 통용되는 많은 트랜스젠더는 여전히 ‘남성’으로 남겨진다. 트랜스여성 중에서 자신을 공공연하게 트랜스젠더라고 혹은 mtf라고 밝힌 사람만 여성으로 ‘인정’될 뿐이다. 이것은 몇 가지 중요한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흔히 트랜스여성은 여성성을 강화하며 젠더 이분법에 고착된 사람이란 비판이 있다. 그런데 하리수 씨와 같은 외모를 지닌 사람만 ‘여성’으로 ‘인정’하는 집단은 누구인가? 트랜스여성이 지배 규범적 여성성을 재강화하는 것이라기보다 젠더를 질문하지 않으면서 몇몇 트랜스여성만 여성으로 ‘인정’하는 이들이 지배 규범적 여성성을 재강화하고 재생산하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둘째, 이런 인식은 여성과 남성을 본질적 범주로 고착시킨다. 젠더는 겉모습을 통해 단박에 파악해야 할 본질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확인해야 할 속성이다. 젠더는 피상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소수 트랜스여성만 여성으로 ‘인정’하는 태도는 젠더를 단박에 포착하고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이런 태도는 젠더, 혹은 여성-남성 범주 자체를 사유할 필요가 없도록 한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2 물결 페미니즘이 문제제기하려고 했던 바로 그 ‘억압’을 반복한다. ‘단순한 인정’은 다양한 문제를 은폐하며 젠더를 본질화/자연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