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물을 수집하고 발굴하는 작업을 하다보면 검색할 수 있는 기록물과 발굴할 수 있는 기록물은 다르다는 점을 마치 몰랐던 사실처럼 체감한다. 아무리 검색기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발굴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기록물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 같은 곳은 소장 자료를 모두 검색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하지만 국회도서관 등에서 검색할 수 있는 기록물은 국회도서관 등이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국회도서관이 모든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 틈새를 찾아야 하는 작업이 기록물 검색이 아니라 발굴이지 않을까? 물론 검색 자체도 발굴의 일부다. 그리고 때론 검색할 수 있는 기록물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검색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록물에 모든 사람이 접근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과거 신문기사는 누구나 검색할 수 있지만 누구나 검색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때때로 누구나 검색할 수 있는 기록물을 얘기하는데도 그것이 신기한 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이 부분은 내가 오랫동안 헷갈렸던 부분이다. 간단하게 검색해서 찾은 자료라면 누구나 알텐데 강의나 글에서 굳이 얘기해야할까, 뭔가 다른 걸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란 고민을 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 검색할 수 있는 기록물만 잘 엮고 특정 관점으로 잘 버무려도 충분히 훌륭한 경우가 있다. 아니, 검색해서 찾은 자료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고 훌륭할 때도 많다. 다만 좀 더 풍성한 기록물을 찾기 위해선 검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검색에 걸려들지 않는 기록물에 귀중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발굴 작업이 중요하다. 이것을 발굴하는 상상력(혹은 아카이브적 상상력)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어떤 의미에선 기록물이 도처에 널려 있기에 더 접근하기 힘들기도 하다. 무엇을 읽어야 하고 어떤 기록물을 선별해야 하는지가 더 힘든 시간이 되고 있다(그래서 큐레이션이 뜨고 있는 거겠지). 아울러 도처에 널린 기록물에 접근하고 수집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기술이 전기와 같고 공기와 같고 물과 같은 시대에도 인터넷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발굴작업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공간은 헌책방이다. 누군가에겐 의미 없는, 나에겐 너무도 소중한 기록물이 유통되는 몇 안 되는 공간인 헌책방.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통하는 시대가 될 수록 헌책방은 더 소중한 공간으로 변해가리라. 어떤 의미에서 인터넷시대를 상징하는 최첨단 공간은 전자상품매장이 아니라 헌책방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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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트랜스젠더의, 퀴어의 역사가 있다.
며칠 전 우연히 인터넷헌책방 한 곳을 들렀다.우연이었다. 그저 어떤 책이 있나 싶어 특정 카테고리에서 책을 훑었다. 어어… 내가 원할 법한 책이 가득했다. 목차를 확인할 수 없으니 내가 원할 책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해 촉이 가는 책이 많았다. 확인할 수 있는 건 제목 뿐이었지만 제목만으로도 촉이 왔다. 몇 권은 실패할 수도 있음을 각오하고, 그럼에도 촉을 믿고 여러 권을 주문했다. 며칠 전 받았고 개봉했다.
위의 사진처럼, 너무도 지저분해서 소독이라도 하면 좋겠다 싶은 책. 비닐장갑을 껴야만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책. 1,000원에서 2,000원 사이, 비싸면 2,500원이지만 찾는 사람은 거의 없을 법한 책. 이런 책 속에 트랜스젠더의 역사가 있고 LGBT의 흔적이 있고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LGBT의 삶은 그 시절 출간된 학술지나 문예계간지, 여성학 서적에 실려 있지 않다. 사진처럼, 버려지기 쉬운 책 속에 남아 있다. 유물을 발굴하듯 오직 촉을 믿어야 하고 그 믿음을 통해 의외의 기록을 찾는다. 이를테면 1980년대 중반에 나온 어느 책에선, 국내에서도 가끔 레즈비언 부부가 탄생한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해도 이런 기록은 지금은 잊힌 책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태원 트랜스젠더의 흔적 역시 이렇게 낡은 책에서 찾았다.
1980년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기록도 이런 책에 주로 나온다. 물론 매우 짜증나는 관점이라, 당대 이런 책을 접했다면 무시했을 기록이다. 지금은 매우 귀한 내용이다. 당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단행본 분량으로 다룬 기록이 이런 종류의 책이라 아쉬울 따름이다. 그 시절에도 쟁쟁한 여성학 도서와 잡지가 있었지만 섹슈얼리티는 관심이 아니었거나 단속의 대상이었다. 1985년 초 1호를 발간한 <또 하나의 문화>는 아동양육, 자녀양육을 특집으로 다뤘다. 이후에도 비슷한 이슈를 중심으로 다뤘다. 1985년 말에는 <여성>이란 제호의 잡지가 나왔다. 다루는 주제는 여성노동운동이었다. 여성노동운동은 1980년대 전반에 걸친 관심이었고 그 시기 나온 여성학 도서 상당수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다뤘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로자 룩셈브루크와 같은 인물의 전기가 출판된 건 우연이 아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각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그저 여성의 다양한 성적 실천 이슈가 누락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소위 “가부장제 남성의 관점”이라고 불리는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닌,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이들의 관점에서 쓴 여성의 섹슈얼리티 관련 글을 읽고 싶은 욕심이 있어, 드는 아쉬움이다. 훈계 형식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기록물을 안 읽어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아쉬움이 가득해도, 여성을 훈계하는 태도가 엄청난 짜증을 유발한다고 해도, 이 낡은 책은 모두 내게 귀하다. 이런 책마저 없다면 나의 혹은 우리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바람이 있다면, 언젠가 트랜스젠더가, 레즈비언이나 바이가, 혹은 호스트바에서 놀았던 ‘여성’이 직접 쓴 글을 찾을 수 있기를. 아니, 관련 글은 분명 있을 테니 이를 어떻게 찾고 발굴하나 싶다.
+
근데 이번에 집중해서 찾고 있는 주제의 기록이 없다는 건 함정.. ㅠㅠㅠ
트랜스젠더 기록: 이태원 사진기록, 신문 기사
지난 금요일 외출을 겸해서 이태원에 있는 트랜스젠더 클럽/바 입구와 간판 사진을 찍으로 돌아다녔다. 내가 파악하고 있는 트랜스젠더바는 14개다. 이태원 소방소 근처에 대부분이 모여있고 몇 개는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이태원 지역 트랜스젠더 바/클럽의 사진을 찍는 작업은 작년부터 벼르던 일이다. 더 정확하게는 이곳에 이사 오면서부터 벼르던 일이었다. 그걸 이제야 시작했다. 일단은 처음이니 스케치하듯 찍었다. 소소한 기록용으로 쓰기엔 무난하지만 제대로 사용하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내가 전문 사진작가도 아니니 기록을 꾸준히 남기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사진 찍는 일을 무척 귀찮아하는 인간이라 얼마나 꾸준히 할지가 관건이로구나.. 으하하. ;;;
02
목요일에 트랜스젠더 부부의 사고 소식이 났다. 관련기사: http://goo.gl/VLhHq
‘mtf/트랜스여성’과 ‘ftm/트랜스남성’이 결혼했고, 이혼을 앞두고 남편 트랜스남성이 아내 트랜스여성을 살해했다고…
관련 기사를 검토하다가 재밌지만 익숙한 사실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기사가 mtf/트랜스여성은 트랜스젠더라고 표시하지고 있다. mtf/트랜스여성이 여성이며 아내란 점을 부인하거나 의심하는 기사는 거의 없다. 반면 ftm/트랜스남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선 난감해한다. 어떤 기사는 가슴을 절제한 여성이라고 표현하고, 여장남자, 혹은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여성이라고 쓴 기사도 있다. 하리수 씨가 등장한지 10년도 더 지난 지금 한국사회에서 mtf/트랜스여성은 낯설기만한 존재는 아닌 듯하다. 하지만 ftm/트랜스남성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며 당혹스러운 존재다. 적어도 주류 언론이 재현하는 모습에선 그렇다. 그래서 어떤 기사에선 “트랜스젠더 살해”란 제목을 뽑기도 했다. 가해자는 트랜스젠더가 아니며 피해자만이 트랜스젠더라는 듯. 기사를 검토하며 한국 사회에서 mtf/트랜스여성과 ftm/랜스남성을 대하고 이해하는 인식의 차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관련 기사를 어렷 확인하면서 이 둘의 관계를 트랜스젠더로 규정해도 괜찮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ftm/트랜스남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함을 드러내는 기사는 이 부부관계를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로 설명하기도 했다. 트랜스여성은 여성, 트랜스남성은 레즈비언 부치로 설명하는 식이다. 내가 처음 접한 기사에선 트랜스여성과 트랜스남성 부부로 설명했기에 나는 이 범주로 사건에 접근했다. 하지만 다른 기사를 여럿 비교 검토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이성애-트랜스젠더 부부로 설명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이성애 관계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레즈비언 관계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기사를 비교하는 방식으로는 둘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기껏해야 추정할 뿐이다. 살아 있는 남편에게 직접 묻지 않는 한 이 둘의 범주는 몇 가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도 남편이 해석하는 가능성일 뿐, 고인이 된 아내가 해석하는 범주는 확인할 길이 없다.
범주 해석과 별도로, 관련 기사를 검토하며 mtf/트랜스여성과 ftm/트랜스남성의 위상 차이를 새삼 깨달아 기분이 묘하다. 2006년부터 활동판 언저리에서 밍기적거리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물론 이건 나만의 깨달음은 아니다. 소위 “대중”(나 역시 대중의 일부다)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선 트랜스여성이 트랜스젠더의 전부다. 소위 활동판이나 학제라고 불리는 영역에선 트랜스남성이 트랜스젠더의 전부다. 물론 이런 단순한 감상은 과장이다. 하지만 과장만은 아니다. 2011년 지금도 신문사에서 트랜스젠더 특집을 다룬다고 하면 트랜스여성만 다룬다. 트랜스남성을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 여성학을 중심으로 이런 저런 학술적 논의 자리, 내가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는 활동판에서 다루는 트랜스젠더는 트랜스남성이 대부분이다. 물론 트랜스여성만 다루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그 논의 대부분이 트랜스젠더의 (이상)심리를 다루는 식이다. 그런 논문은 의미있는 논의가 아니라 무시할 뿐이다. 흥미로운 글 중 mtf/트랜스여성에 초점을 맞춘 경우는 거의 없다. 이 간극은 언제나 재밌는데 미디어에서 재현하고 ‘대중’이 널리 인식하는 트랜스젠더는 mtf/트랜스여성이 전부인데 의미 있는 학제 논의는 ftm/트랜스남성이 전부라니..(아, 이건 내가 속한 분과의 문제인가.. 흐흐.;; )
아무려나…
고인에게는 애도를… 부디 다음 생은 원하는 삶이길…
가해자에겐 위법행위에 대한 처벌만 있길.. 다른 혐오는 없길…(이것이 가장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