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허브, 비건, 음식의 성분

아는 사람은 이미 아는 그 유명한 인터넷 쇼핑몰, 아이허브에서 오늘 처음 주문했다. 소지하고 있는 체크카드 중 해외카드 결제를 지원하는 것이 있어 시도할 수 있었다. 시중에서 구매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살 수 있어서 필요한 물품과 주전부리를 같이 주문했다. 하지만 이 글은 지름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아이허브에서 판매하는 주전부리를 보며 흥미로운 특징을 발견했다.
첫째, 비건용 물품 목록을 따로 모아서 보여주고 있다. 각 목록마다 비건물품을 따로 정리하고 있다.
둘째, 나는 이게 더 중요한데, 굳이 비건용 제품으로 재분류하지 않아도 많은 스낵이나 주전부리가 비건이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별도의 비건용 항목이 아닌 일반 항목에서 끌리는 과자를 선택한 후 성분을 확인하면 상당수가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감자칩을 확인하면 성분은 매우 간단하다. 감자, 올리브 오일, 소금. 혹은 감자, 해바라기 오일, 소금. 감자칩의 성분이 이러한 게 무슨 대수냐고? 한국에서 판매하는 감자칩의 성분을 한 번만 확인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서 판매하는 감자칩엔 거의 100% 우유가 들어가고 그 외에 새우를 비롯한 다른 육식성 성분이 들어간다. 시중에 판매하는 국산 감자칩 중에서 우유가 안 들어가는 제품은 단 하나다.
감자칩만이 아니다. 국내에서 생산한 주전부리의 대부분이, 우유가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우유가 들어간다. 어떤 과자의 경우 같은 제품명인데 수입품이면 내가 먹을 수 있고 국내산이면 내가 먹을 수 없다. 젤리빈이란 과자의 경우에도 수입품엔 젤라틴이나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제품이 상당히 있지만 국내에서 생산한 유사 제품엔 거의 반드시 젤라틴이 들어간다. 우유 혹은 다른 동물성 성분이 무어 그리 좋다고 소량이나마 반드시 추가하는 것일까? 들으면 당황하겠지만 믹스넛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견과류를 섞어서 파는 제품의 경우, 거의 100% 우유나 전지분유가 들어간다. 경우에 따라선 소나 돼지의 가죽에서 추출한 젤라틴도 들어 있다. 반면 아이허브에서 판매하고 있는 주전부리의 경우, 초코바나 견과류로 만든 바의 경우에도 우유나 계란, 동물성 젤라틴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 차이가 무엇일까? 외국 사람의 경우 알러지가 생기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판매를 위해 알러지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성분을 뺄 수록 좋긴할 테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알러지가 주요 이슈임에도 알러지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성분을 빼진 않는다. 그저 우유, 땅콩 등을 사용해서 만든 제품과 같은 시설에서 이 제품을 생산했다고 경고할 뿐이다. 이 감각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음식/채식과 퀴어 범주의 경합

음식은 정체성을 어떻게 재구성할까? 혹은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음을 선택하는 행위가 정체성을 어떻게 바꿜 수 있을까?
이를테면 이곳에도 적었듯, 내가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서사는 매우 간단하다. 어릴 땐 집이 가난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다행이었고 다른 군것질 같은 건 불가능했다. 이런 배경에서 10대 시절 난 채식을 선택했고 채식이 몸에 안 좋다는 당시의 인식에서 나는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채식을 하는 건 내게 중요한 투쟁의 순간이고 채식이 얼마나 정치적 행위인지 그때부터 확인했다. 20대 시절에도 나는 여전히 채식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했고 많은 것을 채식 경험을 경유해서 이해했다. 그리하여 20대 중반 즈음 트랜스젠더로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설명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에겐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내겐 매우 ‘자연’스러운 정체화 과정. 그리하여 음식은 채식주의자라는 정체성 말고 다른 정체성/범주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요즘은 가죽퀴어(leather queer)가 비건채식을 한다면 그의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가죽퀴어는 미국에서 한때 급진적이고 저항적 정치학의 주요 실천 양식 중 하나였다. 가죽퀴어의 역사 자체는 상당하지만, 이것이 1990년대 초반엔 급진적 퀴어 운동의 실천 방식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달까. 단지 급진적 운동의 방식으로서 가죽퀴어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주이자 정체성을 가죽퀴어로 삼는 사람도 많은데.. 만약 가죽퀴어를 자신의 주요 범주로 삼은 사람이 비건채식을 시작한다면 이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 (부연하면, 비건채식은 소위 식물성이라고 불리는 것만 먹을 뿐만 아니라 가죽 제품이나 동물을 이용해서 만든 제품을 입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다고 얘기한다.) 가죽퀴어 범주와 비건채식 범주는 충돌하는 범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비건채식을 선택할 때 가죽퀴어란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 혹은 어떻게 협상할까? 아직은 관련 논문을 찾아 읽은 건 아니고(일부러 안 찾았다) 그냥 머리 속에서 굴리며 상상/고민하고 있다. 아마도 음식이 정체성/범주를 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만은 확실하겠지라고 가정하지만 이 가정이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겐 옳지만 다른 사람에겐 아닐 수도 있으니까.

채식주의/비건이라는 실천 혹은 망상

01
거의 일주일 전부터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를 속으로 외치고 있는 요즘이다. 사실 이럴 때 먹고 싶은 음식은, 바로 그 음식을 지칭하기보다는 그 음식이 주는 어떤 느낌 혹은 그런 맛의 음식(즉, 짜고 매운 찌개)을 먹고 싶다는 바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어디 가서 사 먹을 곳이 없다. 김치찌개에 들어가는 고기 때문이 아니라,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를 사용하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채식식당”을 표방하는 곳이 아니면 젓갈을 사용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김치를 먹지 않은지 몇 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너무 먹고 싶다는 바람이 몸에 차오를 때, 특히나 비라도 내고 어떤 얼큰함이 그리우면 더 간절하게 느낀다. “김치찌개~~~” 흐흐. 그럼, 또, 속으로 중얼거린다, “오늘만 채식을 그만두고 사 먹을까?”라고. 크크크. “내일부터 채식하지, 뭐”, 라고 말할 수도 있고, ‘육식하는 채식주의(비건)란 상상력’으로 채식을 해석하려하기에, 김치찌개를 못 먹을 이유는 또 뭔가 싶기도 하다.

1994년 가을 이래로 채식을 계속해서 할 수 있었던 건 “의지가 굳건해서”가 아니다. 언제부터 채식을 했는지 얘기할 일이 있을 때면, 거의 항상 “의지가 정말 굳건하다”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해다. 어느 시기까지는 의지로 버텼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에 와선 “의지”가 아니라 지금까지 해온 습관 때문이다. 채식을 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지금까지 해왔으니 내일도 할 가능성이 높을 뿐. 그러니 “나 이제부터 채식 안 해!”라고 자신에게 선언한다고 해서, 식습관이 바뀔 가능성은 별로 없다. 무엇보다도 몸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가끔 루인도 모르게, 그동안 먹지 않던 “음식”을 먹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면 어김없이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니, “오늘 김치찌개 먹고, 내일부터 다시 채식하지, 뭐, 흐흐”라고 중얼거린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02
며칠 째, 01번에 쓴 내용의 고민을 했다. 오늘도 비가 내리고, 점심 겸 저녁으로 무얼 먹을까를 고민하다가 김치찌개를 떠올렸다. 무얼 먹을지 결정하지 않은 상태로 연구실을 나섰을 때, 때마침 비가 그친 길을 걷다가, “‘채식을 한다’는 선언은 가능해도 실제 가능한 행동인가”란 의문이 들었다. 특히나 비건(“비건”을 비롯해 채식주의와 관련한 코미디 같은 분류가 궁금하면 여기로)이라는 실천이 정말 가능한 행동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젓갈을 사용하지 않는 김치라고 해서, 유산균이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닐 텐데, 그럼 젓갈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유산균은 있는 김치를 먹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유산균은 비록 “고기”라고 분류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채소”라고 분류하는 존재도 아닌데 비건에게 가능할까? 어쨌거나 “동물”에게서 얻은 건 아니란 점에서 무방할까? 유전자음식을 반대한다는 코미디가 있긴 하지만, 아무려나 “품종개량” 혹은 “병충해방지”란 명목으로 토마토에 어느 생선의 유전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토마토피쉬라고 부르던가? 어떤 명칭이 있었는데 기억이… -_-;;). 그렇다면 생선유전자와 함께 살아가는 이 토마토는 채소일까, 생선일까? 이처럼 실험실을 통한 유전자 이식이 아니어도, 자연 상태에서도 유전자 이식은 무수하게 발생하고 있는데, 표면적으로 채소나 과일 혹은 동물이나 생선으로 여겨진다고 해서 그렇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여기서 트랜스라고 얘기하는 루인의 경험들이 겹쳐지기도.) 이것은 분명하게 동물, 이것은 분명하게 식물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며, 이런 종(species)들 간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자 하는 맥락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서, 종들은 섞이지 않으며, 분명하게 구분할 있다는 믿음이 유지될까?

이런 의문들 속에서, 어쩌면 채식주의자 혹은 비건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야 말로, 종들 간의 “순결한 분리주의자”들이 아닐는지. 종들은 결코 섞일 수 없다고, 동물엔 식물의 유전자나 흔적이 결코 없고, 식물엔 동물의 유전자나 흔적이 결코 없으며, 어떤 경우에도 섞여선 안 되고, 종들을 섞는 행위는 인간에게 위험해서 불매운동이라도 해야 할 일이라는 엄청난 환상이, 채식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아닐는지. 이런 의심들이 들었다. “자연”이라고 불리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괜찮거나 그럴 수 있지만, “실험실”이라고 불리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절대 안 될 일이라고 믿음의 토대는 어떻게 구성되는 걸까? 죽은 동물의 시체를 먹고 자란 사과를 동물과 분리해서 얘기할 수 없음에도, 비건을 “동물로부터 얻은 모든 것을 배척하는 완전 채식주의“라고 정의(definition)한다면, 이는 동물/식물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한 실천 혹은 정의일 수밖에 없지 않나.

채식을 실천하는 개개인들이 이런 단순한 구분과 정의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채식” 혹은 “육식을 하지 않음”이란 상상력의 토대엔 종들 간의 분명한 구분, 그리고 개별 종들은 결코 섞이지 않는 존재란 상상력에 근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여전히 트랜스로 설명할 때의 루인을 떠올리고 있다.)

03
물론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여전히 지금까지 먹어온 방식의 식사가 가능한 식당에 가고,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주문한다. 그러면서도 채식과 관련한 의심을 계속한다. 종들 간의 “분리주의”, “식물은 마치 생명이 아닌가요?”란 질문에 분개하는 일부 채식주의자들의 반응들, 등등. 재밌게도, 이런 의심이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을 더 강화하고 있다는 의심이 드는 건 왜일까? 흐흐흐. -_-;;

[#M_ 근데.. | 흐흐.. |
왠지 이 글이, 내일 “김치찌개” 먹으러 가기 위한 변명으로 쓴 글이라는 느낌은 루인 만의 착각? 낄낄낄.
그렇다고 정말 가지는 않겠지만.←이 말이 더 의심스럽다? 케케 _M#]

[#M_ ++.. | –.. |
그러고 보니 쓰겠다고 하고 안 쓰고 있는 글이 한 편 있네. -_-;;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