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규범성, 불/편함과 슬픔, 그리고 장례식

2012년 10월 18일에 제출 쪽글입니다. 공개를 할까 말까를 좀 고민했습니다. 고민하다 귀찮아서 미뤘더니 벌써 두 달도 더 지났네요. 크. ;;;
공개를 망설인 이유는 이 글이 기말페이퍼 초안에 가까운 내용이라 그냥 기말페이퍼를 완성하면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관련 주제로 기말페이퍼를 쓰다보니 욕심이 생겨(혹은 기말페이퍼를 제대로 못 썼다는 속상함에) 출판을 해야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고 내년 중에 어떻게든 출판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초안은 좀 더 묵혀두기로 하고, 쪽글을 공개합니다.
주제는 일전에도 몇 번 공개한 적 있는, ‘트랜스제더/퀴어, 감정’입니다. 감정과 퀴어이론을 연결해서 쓴 글 중에선 가장 처음 쓴 글이기도 하고요. 물론 엄밀하게 따지만 지난 봄에 쓴 “장례식과 퀴어의 위치성”이 최초지만요. 뭐, 어떤 글이 최초냐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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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규범성, 불/편함과 슬픔, 그리고 장례식
-루인
이성애가 일련의 규범과 이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몸과 세계를 형상하는 감정을 통해서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는지를 고려하는 것은 중요하다(Ahmed, 146).
“네가 번듯이 취직하고 결혼만 했어도, 그래서 외국여행이라도 보내드렸다면 네 아버지는 이런 사고를 겪지 않았고 돌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느냐.”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자리를 옮긴 새벽 세 시, 친척 어른이 내게 처음 한 말이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던 그 시간, 그래서 슬픈지 슬퍼해야 하는지 어떤지 종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모든 감정, 특히 슬픔과 애도는 이성애 욕망, 이성애규범성, 이성애가족규범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거의 모든 조문객이 내게 공통으로 한 말, “이제는 결혼하자” “네가 결혼만 했어도…” “네 아버지가 손자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슬픔과 애도는 유족을 걱정하는 방식이고 고인을 기억하는 형식이지만, 또한 이것은 이성애가족구조를 환기하고 고인과 유족을 이성애제도의 적법한 구성원으로 소환한다.
감정은 투명한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슬픔과 애도는 특히 지배 규범을 통해 재현된다. 사라 아메드(Sara Ahmed)가 데이비드 엥(David L. Eng)의 논의를 빌려, “9.11 이후 애도의 공적 각본은 이성애규범성의 기호로 가득했다”(157)고 말했듯, 슬픔과 이성애규범성은 얽혀있다. 슬픔은 이성애규범성을 통해 표현되고 이성애규범성은 슬픔과 애도를 매개하여 제 토대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 고인은 이성애 서사에서 획득한 것과 획득하지 못 한 것, 유족은 이성애 서사에서 제공한 것과 제공하지 못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손자를 획득하지 못 한 고인과 번듯한 직장, 결혼, 손자 어느 것도 제공하지 않은 나는 이 평가 체계에서 실패자(였)다. 나와 고인의 실패는 슬픔과 애도를 증폭했다. 울음이 넘실거리는 찰나, 조문객의 애통함은 고인의 부재 때문인지 나의 실패, 고인의 ‘실패’ 때문인지 모호했다.
그 많은 언설에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은 침묵이었다. 대답을 다그치는 이들에겐 마지 못 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들의 언설에 ‘대항’할 수 없었다. 이성애규범이 자연질서인 장례식장에서 비이성애 실천, 비이성애 상상력은 존재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이성애가족규범의 윤리를 통해서만 슬퍼할 수 있고 또 슬퍼해야 했다. 비이성애적 감정은 고인을 애도하지 않음, 고인의 마지막 소원마저 거부하는 불효막심함, 그리하여 장례식 행사와 공간을 망치는 망나니짓에 불과했다. 그 전까지 이성애 가족 서사에 부합하지 않는 나의 행동과 삶의 양식은 그저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에 불과했다. 장례식장에서 나의 삶은 이성애규범성을 위협할 수 있기에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는, 강하게 규제해야 할 행동이었다. 이성애 가족 구성원의 일부면서 퀴어고 트랜스젠더인 나는 애도에 참여할 수도 없고 애도에서 추방될 수도 없는 위치를 점했다.
사흘 간 장례식장에 머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애도 뿐이었다. 애도할 수 있는 적법한 위치에 있지 않음에도, 규범성의 실패자로 규정되었음에도 그랬다. 할 수 있는 것이 애도 밖에 없다는 말은 다른 역할에선 배제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규범적 가족 서사에서 요구하는 ‘아들’처럼 산 적 없는 내게 모든 조문객은 이제 ‘아들’(그리하여 ‘남성’)로 살 것을 요구했다. 사흘 내내 나는 그 얘기만 들었다. 하지만 모든 장례 절차에선 주변인이었다. 내게 ‘남성’이 될 것을 요구한 모든 사람, 특히 친척 어른 누구도 ‘남성’ 역할이라 부르는 어떤 의사결정에서 내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애도의 이권 다툼에서 혹은 슬픔의 공적 전시에서 결정권자는 ‘상주’인 내가 아니었다. 장례식장에 머물지만, 애도를 주도해야 하지만 그곳에 푹 파묻혀(“sinking”) 있을 수 없었고 모두가 내게 적절히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만 원하지는 않는 듯했다.
그리하여 장례식장은 내가 애도할 수도 없고 애도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장례식장과 나는 서로 부대꼈다. 부대낌은 내가 머무는 공간이 어떤 규범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생생하게 포착하도록 했다. 편하게 슬픔과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상주와 유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슬픔과 애도라면 그것은 나의 역할이 아니었다. 슬픔과 애도를 규정받았지만 슬픔의 규칙과 애도의 규범성은 나를 배제했다. 내가 머무는 공간에서 나는 겉돌았다. 그리하여 나는 슬퍼할 수 없었다. 이 불편한 감정은 슬픔을 상쇄하거나 내가 느끼는 슬픔이 어떤 제도적/정치적 감정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도록 했다. 내가 슬퍼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라는 자리의 상실 때문인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조우한 사람의 상실 때문인가, 슬퍼하고 울어야만 제대로된 애도라고 믿는 윤리 때문인가. 아메드는 공적 공간의 이성애규범적 애도와 퀴어의 애도를 따로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별개의 사건인 것은 아니다(아메드 역시 이를 별개라고 논하는 것은 아니다). 트랜스젠더인 내게 고인을 애도하는 일은 이성애규범적 애도와 퀴어의 애도가 충돌하고 경합하는 경험이다. 이 갈등에서 그리고 불편을 느껴야 하는 구조에서 또 다른 슬픔이 밀려왔다.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를 실천하는 이에게 이성애규범적 장례식장은 이중의 슬픔을 생산한다.
아메드는 “퀴어 정치학을 위한 도전은 슬픔의 다른 방식을 찾고 다른 이의 슬픔에 반응하는 것”(159)이라고 했다. 맞다. 현재 사회에서 슬픔은 단 한 가지 방식 뿐이다. 다른 방식의 슬픔과 애도 실천은 ‘망나니짓’에 불과하다. 그러니 슬픔과 애도에 관한 ‘다른’ 정치학이 필요하다. 이때 다른 정치학은 퀴어의 이중 슬픔을 읽는 방식을 포함할 것이다. 규범성과 얽혀 있고 섞여 있지만 완전히 용해되지는 않은 그런 슬픔이 퀴어의 슬픔이고 이 슬픔의 정치학이 규범을 상대화하고 재구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얘기: 슬픔, 낙태 논쟁, 양희은

당고 댓글을 읽고 반성하며… 사실 항상 뭔가를 써야 하는데 하는 부담은 있었지만 살짝 방치했다는… 뭐, ‘목하 열애'(응? 크크크) 중이니까. 으하하;;

01
며칠 전, 눈이 내리던 날 알바를 끝내고 玄牝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심성락을 들었다. 수은등은 창백하고 또 흐렸으며, 바깥은 어둡고 또 김이 끼어 흐릿했다. 심성락의 아코디언은 바람의 소리를 내며 애잔했다. 나는… 장의차에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움직이는 관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어떤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엄청난 죄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다. 나는 그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고 믿었지만, 이런 선택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고 있었다.

02
다른 한편, 누군가와 얘기를 하다가, 나는 뜬금없이 프로라이프(pro-life)가 되었다. 그 분은 생명이 소중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 소중하다고 답했다. 그리고 나는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_-;;

물론 이 상황에서 나는 논쟁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과는 논쟁이 어렵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꽤나 피곤한 상태였고, 논쟁이 불가능한 사람과 논쟁하는 건 시간낭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예, 예”라는 말만 반복했다.

갑갑한 건, 생명 vs 반생명(선택)이란 이분법 구도였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에서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명이 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책은 없다. 그런 페미니스트도 없다. 생명과 선택이란 이분법이 아니라, 낙태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지 이해해야 하고, ‘여성’만을 비난하고 가해자로 내몰면서 ‘남성’은 부재중으로 만드는 구조를 비판하고, 태아를 초월적인 절대적 주체로 여기고 여성을 ‘인큐베이터’로만 대하는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고, 모든 여성은 이성애자고 결혼해서 어머니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에 문제제기한다. 등등. 간단하게 말하면 복잡한 현실을 복잡하게 고민하자는 건데, 소위 프로라이프라고 자처하는 집단은 모든 상황을 매우 단순하게 만들어 버리며 책임지지도 못할 말들만 화살처럼 쏘아댄다.

근데 좀 웃긴 건, 방송에서 프로라이프를 자처하는 분들의 발언을 듣고 있노라면, 그 논의에서 어떻게 낙태반대란 결론이 나올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논의 과정만 들으면 선택권을 지지할 거 같은데… ;;

03
아침마다 양희은 씨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그리고 매번 놀란다. 양희은 씨의 발언이 멋져서. 물론 그동안 내가 양희은 씨를 비롯하여 공중파 방송 진행자에 대한 편견이 있긴 했다. 그들은 젠더 권력 관계의 문제에서 “참고 살라”며 ‘여성의 인고’를 강조할 것이라는 어떤 편견. 성교육강사라면서 여성에게 조심할 것을 요구하는 말도 빈번했으니까.

근데 양희은 씨는 달랐다. 3.8 여성의 날을 지지하고 낙태 논쟁에서 여성의 선택권과 남성의 부재를 지적하는 발언을 방송 서두에 말하는 건 기본. 며칠 전엔 여성도 아내가 있다면 직장 생활을 비롯하여 일을 매우 잘 할 수 있다고, 남편/남성은 회사 일에만 집중할 수 있지만 아내/여성은 사회적 조건이 다르고 회사 생활과 가사 노동 등의 여러 일을 동시에 책임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하더라. 언젠가는 왜 여동생이 오빠의 밥을 챙겨주느냐며 오빠가 여동생의 밥을 챙겨주는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성은 누나여도 여동생이어도 남자 남매의 밥을 챙겨줘야 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했던 말. 공동진행자가 뭔가 좀 이상한 말이라도 할라치면 능숙한 언변으로 바로 문제를 지적하기도 하는데.

라디오를 들으며, 감탄 또 감탄. 한계가 없진 않(겠)지만, 공중파 방송이라는 맥락을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04
결국 이 모든 글도 트위터로 메모한 걸 정리했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