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애니웨이: mtf/트랜스여성 영화

지난 화요일 오전에 아트레온에서 mtf/트랜스여성이 주인공인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를 봤다. 요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후반부엔 몸이 힘들었지만 괜찮게 봤다. 극장에서 다시 볼 엄두는 안 나고 나중에 DVD가 나오면 구매 예정!
일단 인상적인 장면.
영화 시작은 안개에서 누군가(라고 쓰고 로렌스라고 읽는다)가 나와서 사람들이 놀라는 장면을 보여준 다음 다시 누군가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것은 로렌스가 정확하게 어떤 존재인지 포착하기 힘든 지점을 암시한다. 범주의 모호함을 상징할 수도 있지만 범주보다는 성격이 더 정확할 듯도 하고…;;;
영화 초반, 손가락 끝에 클립을 끼우는 장면이 있다. 그 모습이, 소위 여성의 긴손톱을 형상한 느낌이라 정말 좋았다. 남성으로 통하지만 자신을 남성이 아닌 젠더, 혹은 여성으로 인식하는 로렌스가 자신의 억누른 삶을 표현하는 찰나라서 좋기도 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슬프기도 했고.
로렌스가 가장 예쁘게 나온 순간은 처음으로 ‘여장’하고 수업에 들어간 모습. 이때 로렌스는 투피스 정장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고 반삭의 머리였다. 이 모습이 가장 좋았고 영화 전반을 통틀어 이 순간이 가장 예뻤다. 영화 흐름에서 중간 시기의 헤어스타일은 정말 안 어울렸고 후반부 곱슬머리는 그냥 평범했다. 반삭에 치마 투피스 정장에 화장이라니!
(대충 이런 모습인데.. http://i.ytimg.com/vi/Lj3JvLYZyDs/hqdefault.jpg )
처음으로 여자화장실에서 치마로 갈아입으려다가 포기하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포기한 이유가, 화장실에 있는 다른 몇 명의 여학생이 강사/교수를 평하는 얘기를 나누는데 로렌스는 매력적이라고 얘기한다. 이 얘기를 들은 로렌스는 학생을 실망시킬 수 없다며 치마 입기를 포기하고 나온다. 나는 이 갈등, 이 순간의 감정이 정말 좋았다. 자신의 원하지 않는 외모지만 그 외모에 매력을 느낀다는 누군가의 말에 잠시나마 기뻐하는 찰나의 감정을 그려서 정말 좋았다.
별로인 순간은 샤를로테와 지내는 시기. 로렌스는 프레드와 헤어지고 샤를로테와 몇 년을 함께 하는데 그 동안 로렌스는 샤를로테에게 어떤 애정도 주지 않는다. 샤를로테가 로렌스를 위해 장을 보고 음식을 하는 등 온갖 일을 하지만 로렌스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다. 대신 프레드에게 연락이 왔을 때 샤를로테를 붙잡는 대신 프레디를 찾으러 간다. 정말정말 화가 난 순간이다.
전반적으로 재밌었고 영상은 특히 아름다웠다. 이를테면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에도 색감을 정말 예쁘게 잡았고 그래서 화면에 빠져들었다. 아울러 감독이 168분에 가까운 편집을 할 수밖에 없겠다 싶기도 했지만 120분으로 편집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솔직히 지루한 감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 나는 좋다.

잡담..: 사리, 양성애/바이 논문, 그래비티

알바를 하다가 문득 메모장에 쓰기를, 몸에 사리 생기겠다…
정말 몸에 사리가 서넛은 있지 않을까 싶다…
자료를 좀 찾다가 2013년 여름에 나온 석사학위 논문의 초록을 확인했는데…
한국에서는 퀴어 관련 연구들조차 종종 성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지금까지 성적 정체성의 차원이나 성적 지향의 차원에서 양성애자들을 다룬 연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논문은 20대 양성애/바이 남성을 연구했고, 위 인용은 초록에 실린 문제의식의 일부다. 이 구절을 읽고 이 논문의 패기에 반했다. 2010년에 양성애 논문이 한 편 나왔음에도 한국 양성애 남성에 관한 논문이 아니라 한국 양성애에 관한 논문이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 패기. 2010년 논문은 양성애 논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어떤 뜻일까?
이 논문의 가장 큰 아쉬움은 한국 소재 대학교에서 나왔지만 영어로 썼다는 것…
영화 <그래비티>를 3D로 봤다. 3D는 처음 봤는데, 영화를 볼 때는 괜찮았는데 극장에서 나오니 어지럽네..;;
암튼 이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면, 우주(정확하게는 태양계 수준이지만)가 경기를 일으킬 정도의 변태가 등장하는 영화다.
농담 아니고 정말이다.
그나저나 스톤 박사 역을 맡은 배우는 연기를 정말 잘 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듯…

삶의 유통기한, 쓸모의 유통기한: [할머니와 란제리],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지난 수업 쪽글입니다. 영화 <할머니와 란제리>,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보고 쓴 글이고요.
글과 관련해서, 제가 “결국 청춘이 기준”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청춘과 관련한 상상력은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고민하니, 한국에선 나이와 관련한 풍성한 상상력이 없더라고요. 그저 규범적 생애주기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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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4.화. 15:00-  영화 후기 쪽글
삶의 유통기한, 쓸모의 유통기한
-루인
나이 60에 학부에서부터 수학을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얘길 하곤 한다. 학부 시절 수학 공부를 허술하게 한 것이 아쉬워 나중에 꼭 제대로 다시 배우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이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이들 중엔 “나이 예순에 새로운 공부라니…”라는 반응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공부도 아니고 수학이라니’란 뜻일까, ‘다른 일도 아니고 공부라니’란 뜻일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이 예순이면 아직도(조금씩 변하곤 있다지만) 뭔가를 새로 시작할 나이는 아닌 듯하다. 은퇴(가 가능한 일을 내가 한다면)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걱정할 나이다.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소일거리 중심이고 학업이라고 해도 외국어를 배우는 정도다. 노년에 할 일은 주로 이런 이미지로 유통된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양호하다. 내 고민은 적어도 노년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의 영역, 사회적/젠더화된 금기가 존재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베티나 오베를리의 영화 <할머니와 란제리>는 노년의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사이의 갈등을 얘기한다. 나이 들면 뒷방 늙은이가 되거나 양로원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노년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소일거리 삼아 새로운 걸 배울 순 있어도 ‘노인이 할 법한 일’에서 벗어나는 건 금기 위반이다. 영화 초반에 나온 장면처럼 노년의 삶은,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이 헐값[discount]에 팔리듯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년의 여성이 여성 란제리를 판매하는 일을 한다면? 남성의 속옷이 아닌 여성의 속옷을 공공연히 전시하고 판매한다는 것과 그 일을 노년의 여성이 한다는 건, 마을 당의장의 주장에 따르면 “마을의 전통”을 위반하는 일이다. 속옷은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물건이지만 여성의 란제리 판매는 마을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노년의 여성 마르타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당의장이 몸소 보여준 것처럼 노인은 멸시의 대상이며 양로원에서 얌전히 지내면 그만인 존재라는 게 마을/사회의 “전통”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순히 영화 속의 풍경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상상력 뿐만 아니라 나이듦과 관련한 상상력 자체가 매우 부족하다. 가능한 몇 안 되는 사회적 상상력은, 다양한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현재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보험으로 시작해서 보험으로 끝나고 현재를 저당잡거나 ‘경제활동인구’를 저당잡을 뿐이다.
결국 노년을 둘러싼 상상력은 은퇴 후의 휴식이거나 기껏해야 제 2의 청춘이다. 결국 청춘이 기준이다. 나이가 들면 인생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쓸모가 없어진다는 상상력은 서구 근대적/지배 규범적 생애주기의 근간을 이룬다. 노년은 무언가를 하는 나이가 아니라 지금까지 해둔 걸 ‘까먹는’ 나이다. 사회에서 생산하는 나이, 쓸모가 있는 나이는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청춘에서 노년 이전까지다. 아녜스 바르다의 다큐멘터리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한다. 상품으로 판매할 수 없어 버려지는 것, 하지만 사용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줍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은 이 다큐멘터리는 쓸모의 유통기한을 질문한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쓸모는 실제 사용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판매할 수 있는지로  결정된다.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지만 시장에서 거래될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쓸모 없는 ‘쓰레기’와 같다. 그래서 신선한 야채도 판매할 수 없다면 쓰레기로 버려진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상품으로써 쓸모가 없어진 물건, 하지만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줍는다. 그리고 그 물건에 또 다른 쓸모를 부여한다. 쓸모는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인식, 태도에 따른 것이다. 쓸모의 재해석은 사물의, 그리고 삶의 유통기한을 재정의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것은 정확하게 <할머니와 란제리>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많은 사건과 갈등에도 결국 마을 사람을 설득하고 란제리 가게를 운영하는 마르타는 영화 말미에, 속옷엔 유통기한이 없다는 농담을 한다. 농담이지만 이 말은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속옷에 유통기한이 없다는 농담은 또한 꿈을 이루는데 유통기한이 없다는 뜻이다. 노년은 유통기한이 지났기에 양로원에서 조용히, 조신하게 지내거나 자식세대가 요구하는대로 무시[discount]당할 시기가 아니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이삭’줍는 사람들이 보여준 것처럼 쓸모와 노년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자연질서가 아니라 사회적 해석이다. 그리하여 유통기한 자체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며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