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 채식, 그리고 생명에서 음식으로

작년 추석이었나… 부산에 간 김에 친척과 함께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메뉴는 친척집 근처 낚지볶음이었나 낚지가 들어간 탕이었나…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낚지가 들어가는 음식이었다. 우선 양념장과 채소가 들어간 냄비가 나왔고 불을 올려 가열했다. 양념이 끓을 즈음 점원은 다른 통에 담은 낚지를 가져왔다.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낚지를 끓는 냄비에 담았다. 낚지는 뜨거워서 버둥거렸고 점원은 익숙한 듯 집게로 꾹 누르며 낚지가 죽길 기다렸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끔찍하단 듯, 차마 볼 수 없는 현장이라는 듯 눈을 가렸다. 낚지가 죽고 냄비 뚜껑을 덮자 사람들은 얘기를 계속했다. 낚지가 다 익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낚지를 먹기 좋게 가위로 잘랐고 맛있게 식사를 했다. 음식이 맛있다는 얘기와 함께.
낚지는 눈 앞에서 실시간으로 생명에서 음식으로 변해갔다. 그 과정은 ‘차마 볼 수 없는 장면’에서 ‘맛있는 먹거리’로 변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낚지의 죽음을 끔찍하게 여기던 사람들은 잘 익은 낚지를 맛있게 먹었다. 이 장면을 지금 다시 떠올리다가 뒤늦게 깨달았는데.. 내가 게를 못 먹게 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땐 채식을 할 때가 아니었다. 채식을 고민할 때도 아니었다.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은 그 언젠가, 집에 꽤 많은 꽃게가 생겼다. 엄마는 이 꽃게를 삶기 위해 커다란 솥에 물을 올렸고 적당히 간을 했고 끓는 물에 꽃게를 넣었다. 아닌가? 적당히 간을 한 물과 꽃게를 함께 냄비에 넣고 불을 올렸던 것도 같다. 그리고 냄비에서 수증기가 올라올 때 익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뚜껑을 열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장 위에 있던 꽃게 몇이 탈출을 시도했다. 살아 있는 꽃게가 가득한 모습도 충격이었지만 탈출하려는 꽃게의 모습도 충격이었다. 그렇다고 살아있는 생명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날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어릴 땐, 낚시에 따라가선 갓잡은 생선을 바로 회 뜨는 모습을 봤고, 그 회를 맛있게 먹기도 했다. 그럼에도 꽃게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삶은 꽃게의 살을 발라 먹는 걸 좋아한 나는, 그날 이후 먹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글이 아니다.
마트나 재래시장 등에 장보러 갈 때면 종종 각종 채소나 과일이 한가득 쌓인 모습을 본다. 조금은 시든 채소의 모습을 볼 때마다 냄비에서 죽어가던 낚지, 큰 솥에 담긴 꽃게를 떠올린다. 마트에 진열된 채소는 이미 죽은 걸까,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걸까?
낚지가 뜨거운 물에서 살기 위해 혹은 고통스러워하며 꿈틀거리는 순간과 채소가 조금씩 시들어가는 순간. 이 두 순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내겐 차이가 없다. 둘 다 죽어가는 생명의 모습이다. 생명에 위계가 없다면 채식이 유난히 윤리적일 이유가 없다. 채식을 한다고 우월할 이유도 없다. 채식의 윤리성을 입증하기 위해 생명의 위계를 만드는 건 웃긴 짓이다. 그래서 채식을 논하는 많은 논리가 공허하다 싶을 때가 많다. 공감이 안 될 때는 더 많고.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그저 윤리나 위계로 무언가를 설명하지만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끔찍함의 전시가 아니라 어떤 친밀감, 덜 끔찍함으로 채식을 설명할 수는 없는 걸까 싶기도 하다.
#나중에 출판할 글의 일부입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 나와 나의 고양이 바람

인간도 동물이니 인간과 비인간으로 구분해서 얘기하면, 난 인간과 비인간 간에 위계가 없다고 믿지 않는다. 없을리가 있나. 생명의 동등함은 지향하는 가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인간과 비인간의 생명이 동등하다면 지금 이런 글 자체를 쓰지 않겠지.
바람과 나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날 집사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내가 서열 상 아래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서열 상 더 위에 있다는 뜻이다. 바람의 생활방식에 내가 깊이 개입하고 있으며 나의 노동이 없다면 바람의 삶이 위험할 수 있다. 어느 날 내가 미쳐서 혹은 다른 어떤 독한 이유로 바람의 목숨을 끝내야겠다고 작정하면 그렇게 못 할까? 비단 나 뿐만 아니라 집사로 사는, 고양이를 숭배하는 사람들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바람의 혹은 집에 사는 고양이의 안위는 온전히 집사를 자처하는 사람의 ‘선한 마음’에 달려있다. 정말 위험하고 또 불안한 상황이다. ‘선한 마음’ 혹은 애정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고양이의 삶에 위기가 닥칠 수 있다. 실제 적잖은 고양이가, 집사의 선한 마음이 끝남과 동시에 버려지고 거리 생활을 시작한다. 집에 사는 고양이의 생사여탈권이 집사에게 있다는 건, 집사의 선한 마음 혹은 책임감에 있다는 건, 둘의 관계가 결코 동등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고양이를 마냥 숭배할 수도 없고 좋게만 그릴 수도 없다. (그래서 “개와 토끼의 주인”이란 웹툰은 소중하다.)
그렇다면 ‘선한 마음’ 혹은 ‘책임감’을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인간과 비인간은 동등하다고, 정말 사랑하니까 동등하다고 말하지 않고 이 위계를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어떻게 다시 고민할 수 있을까? 인간이 권력을 내놓아야 한다, 인간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독점되어 있다고 말해봐야 별 의미는 없다. 이런 식의 언설이 통할 거라면 이 지구는 이미 부처님 뱃살이었겠지. 설득하지도 않고, 동정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관계를 다시 사유할 수 있도록 흔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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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떤 일과 관련한 고민 메모입니다. 혹은 답장은 아니지만 답장과 비슷한 성격의 글이기도 합니다.

이것저것: 선생님, 시간성과 위계

01

아… 갑자기 선생님이 보고 싶다.
안부를 물을 겸 겸사겸사 메일을 쓰는데, 내가 정말 석사과정을 공부한 학교와는 다른 학교에 진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못 만나는 관계도 아니고, 먼 거리도 아닌데 이 복잡한 감정은 뭔지…
02
십대 이반에게 한때의 감정이라고 말하는 일군의 반응에 통상의 대응은 ‘그렇지 않다’, ‘그럼 이성애는 한때의 감정 아니냐’로 요약할 수 있으려나. 비이성애는 한때의 감정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이성애를 규범으로 삼는 인식 자체를 문제삼거나.
근데 문득, 십대의 동성애가 한때의 감정이라고 쳐도 그것이 무의미한 감정인가란 의문이 들었다. 더 정확하게는 어떤 감정이 일시적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여러 논쟁과 별도로, 일시적 감정은 무의미하니 연구할 가치가 없거나 고민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란 고민이다. 일시적이어서 연구할 가치가 없다면 우리가 연구할 주제는 무엇이지? 경제학 개념으로 ‘장기’는 우리가 죽고 난 다음의 시간이다. 그럼 일시적이지 않은 것, 즉 영구불변의 것만 연구하자는 것일까? 그런데 그런 게 있기는 할까? 그리하여 무엇을 ‘일시적’이란 수식어로 폄하하는지, 시간성은 어떤 식으로 위계를 가지는지, 규범적 가치와 시간성은 어떻게 위계적 가치를 재생산하는지…
아.. 공부할 거리만 늘어가는구나..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