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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의학변천사
“의사 선생님, 귀가 아픈데요.”
기원전 2000년: 자,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
기원전 1000년: 그 뿌리를 먹으면 부정을 타니 이 주문을 외우시오.
1850년: 주문은 미신이오. 이 물약을 드시오.
1930년: 그 물약은 돌팔이 약이오. 이 알약을 드시오.
1970년: 그 알약은 효과가 없소. 이 항생제를 드시오.
2000년: 그 항생제는 인공합성물이오. 자,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
-애넌(Anon)의 ‘의학의 역사’ (1997-1998년 인터넷에 떠돌던 글)
–[의학의 역사] 시작글에서
『젠더』: 상대방의 젠더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Kessler, Suzanne J. and Wendy McKenna.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118.
(번역은 대충 날림입니다. 이럴 때 사용하라고 만든 격언이 아니겠지만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세요.” *뻔뻔*)
한동안 분주했고, 별도의 읽을거리가 있어 『젠더』를 못 읽었다. 원래는 『젠더』를 6월까지 다 읽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특별히 아쉬운 건 아니다. 어쨌든 어제부터 약간의 시간이 생겨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구절은 예전에 다른 곳에서 들은 적이 있다. 2006년 여름이었나. 여이연에서 트랜스젠더 강좌를 열었는데 담당 강사가 위의 일화를 소개했다. 무척 인상 깊어 어디선가 몇 번 언급했지만,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인용하길 관뒀다. 근데 『젠더』에 나오는 일화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제 늦은 밤 지하철에서 이 구절을 읽고 꽤나 흥분했다. 흐흐.
이 책이 처음 나온 시기가 1978년이란 점, 그러니 1970년대 중후반에 이 책을 썼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엔 트랜스젠더를 진단할 공적 진료규범이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미국정신의학회에서 성전환증(transsexualism)을 성동일성장애(GID: gender identity disorder)란 항목으로 의료진단범주에 포함한 건 1980년이니 그전까진 설만 분분했다. 이런 시기에 몇 명의 의사들이 위와 같은 얘길 했다: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찾아왔을 때, 진짜 트랜스여성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에게 성적인 흥분을 일으키는지, 자신이 “환자”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지로 판단한다고.
의사들이 다소 노골적으로 표현했을 뿐 유별난 기준은 아니다.
작년 ftm 관련 다큐를 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후 감독 및 출연자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을 때, 몇 명의 관객들은 출연자를 보며 “쟤는 좀 남자 같네.”라고 속삭였다. 난 이 속삭임과 『젠더』에서 전하는 의사들의 발언에서 어떤 차이도 찾을 수 없다. 하리수를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이란 수식어로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어떤 개인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구분하는 일상의 실천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여성”으로, “남성”으로 판단하는 방식은 위에 인용한 의사들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매혹을 기준으로 삼았고,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 길이를 기준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걷는 방식이나 목소리 톤을 기준으로 삼는다. 전화를 걸었을 때 목소리만 듣고선 상대를 “여자”로 판단한다면, ‘내’가 “여성의 목소리”라고 판단할 자극을 받았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것이 위의 의사들이 성적 매력, 유혹으로 판단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이런 구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매우 드물고 나 역시 이런 구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이런 구분을 옳고 그름이나 잘잘못으로 구분하는 건 곤란하다. 이 말을 덧붙이는 건, 예전 어느 강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의사의 사례를 언급했는데, 그 당시 강의실은 술렁이며 의사를 비난하는 분위기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그건 의사의 성차별적인 태도를 향한 비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술렁임, 의사를 향한 비난/비판은 용인할 만한 행동과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구분하고 있단 점에서 유쾌하지 않다.
유쾌하지 않음, 불쾌한 건 아니라도 유쾌한 건 아닌 감정은 순전히 나의 경험 때문이다. 내 몸은 언제나 나를 배신한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많은 이들이 나를 “남성”으로 판단했다가 내가 트랜스젠더인 걸 ‘알면’ 태도가 미묘하게 바뀐다. 혹은 나의 이름은 알고 오프라인의 모습은 모르다가 오프라인에서 인사를 할 때, 내가 “그 루인”이라는 얘길 할 때면 종종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놀람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소비하는 방식에서 내 몸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글로 드러나는 나와 오프라인에서 드러나는 나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성질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놀람은 온라인이나 글로만 알던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만났을 때도 빈번하잖아. 그저, 이런 놀람과 의사의 발언을 구분하고 놀람은 괜찮지만 의사의 발언은 나쁘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태도가 유쾌하지 않았다.
어제 지하철에서 『젠더』를 읽다가 이런 저런 고민이 떠올랐다. 요즘 다시 두드러진 고민 중 하나가, 20~30년 뒤의 내 모습이라 좀 심란하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