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

E는 내가 채식하는 걸 다행으로 여긴다. 그나마 채식을 하니 이 정도로라도 챙겨 먹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육식을 했다면 나의 식사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3분요리 음식으로 아침을 먹고 점심은 햄버거 혹은 그 비슷한 종류, 저녁은 안 먹었겠지만 간혹 라면이나 면 종류 음식. 그러니까 나의 일상은 레토르트와 패스트푸드로 가득했을 것이다.
E와 맥도날드나 그와 비슷한 가게에 갈 때가 있다. 가끔 갈 때마다 나는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는 기분이다. 세상에, 이런 음식이 있다니! 여기서 이런 음식이란 이렇게 맛나 보이는 음식이 있다니가 아니다. 메뉴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음식을 뜻하기도 하고(필리치즈와퍼란 메뉴를 들으며 E에게 무슨 의미인지 몇 번을 되물었다..) 이렇게 편하게 한 끼를 때울 수도 있다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샌드위치나 햄버거 같은 음식은 육식하는 사람에겐 정말 손쉬운 한끼 식사잖아. 육식하는 사람 중 일부가 꼬기꼬기라고 얘기하는 고기도 먹고 배도 채우고. 주문만 하면 배달해주는 치킨으로 한두 끼를 때울 수도 있고. 얼마나 편한가. 특히나 1500원 가량의 기본 햄버거나 샌드위치는 아침이나 저녁으로 정말 적당하지 않은가. 그렇게 많은 양도 아니고 가격도 괜찮고. 그 음식이 특별히 맛나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간편하게 그리고 집 근처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다는 건 내게 최대 매력이다. 그 음식이 건강한가 여부는 나의 관심이 아니다. 내가 건강 생각해서 채식하는 것 아니잖아. 그냥 가볍고 즐겁게 한 끼 때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말로 만약 내가 먹을 수 있는 비건메뉴의 패스트푸드 가게가 집 근처 혹은 알바하는 곳 근처에 있다면 나는 거의 매일 방문해서 먹을 것이다. 2000원 이하로 가벼운 샌드위치나 콩버거가 판다면 아침은 그것으로 해결하겠지?
하지만 내가 사는 곳 근처에도, 알바를 하는 곳 근처에도 그런 가게는 없다. 베지버거를 판매하는 곳은 신촌 러빙헛 뿐이다. 가격이 그렇게 저렴한 편도 아니다. 바로 이런 제약이 나로 하여금 아침에 밥을, 점심에 밥을 먹도록 한다. 따지고 보면 알바를 하지 않는 시기보다 알바를 하는 시기에 밥을 더 잘 챙겨 먹는다. 알바를 하지 않을 때면 종일 집에만 있는 경우가 많고 이런 날은 하루 두 끼 중 한 끼는 면을 먹는다. 하지만 알바를 하는 시기엔 아침도 밥, 점심도 밥이다. 알바하는 곳 근처에 채식으로 먹을 수 있는 마땅한 곳이 없으니 별 수 없다.
E는 내가 채식하는 걸 정말 다행으로 여긴다. 채식을 하니 그나마 몸에 좋다고 얘기하는 식단으로 밥을 먹기 때문이다. 육식을 했다면? 일주일에 다섯 번은 햄버거를 먹을 가능성이 높고, 세 번 이상은 라면을 비롯한 면 종류 음식을 먹을 가능성이 높다. 비건 음식을 파는 패스트푸드 가게가 많이 생기면 좋겠다. 후후. 채식이 나의 의도와는 별 상관없이 내 건강과 체력을 지키는 계기인지도 모른다.

음식/채식과 퀴어 범주의 경합

음식은 정체성을 어떻게 재구성할까? 혹은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음을 선택하는 행위가 정체성을 어떻게 바꿜 수 있을까?
이를테면 이곳에도 적었듯, 내가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서사는 매우 간단하다. 어릴 땐 집이 가난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다행이었고 다른 군것질 같은 건 불가능했다. 이런 배경에서 10대 시절 난 채식을 선택했고 채식이 몸에 안 좋다는 당시의 인식에서 나는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채식을 하는 건 내게 중요한 투쟁의 순간이고 채식이 얼마나 정치적 행위인지 그때부터 확인했다. 20대 시절에도 나는 여전히 채식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했고 많은 것을 채식 경험을 경유해서 이해했다. 그리하여 20대 중반 즈음 트랜스젠더로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설명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에겐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내겐 매우 ‘자연’스러운 정체화 과정. 그리하여 음식은 채식주의자라는 정체성 말고 다른 정체성/범주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요즘은 가죽퀴어(leather queer)가 비건채식을 한다면 그의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가죽퀴어는 미국에서 한때 급진적이고 저항적 정치학의 주요 실천 양식 중 하나였다. 가죽퀴어의 역사 자체는 상당하지만, 이것이 1990년대 초반엔 급진적 퀴어 운동의 실천 방식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달까. 단지 급진적 운동의 방식으로서 가죽퀴어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주이자 정체성을 가죽퀴어로 삼는 사람도 많은데.. 만약 가죽퀴어를 자신의 주요 범주로 삼은 사람이 비건채식을 시작한다면 이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 (부연하면, 비건채식은 소위 식물성이라고 불리는 것만 먹을 뿐만 아니라 가죽 제품이나 동물을 이용해서 만든 제품을 입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다고 얘기한다.) 가죽퀴어 범주와 비건채식 범주는 충돌하는 범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비건채식을 선택할 때 가죽퀴어란 범주는 어떻게 변할까? 혹은 어떻게 협상할까? 아직은 관련 논문을 찾아 읽은 건 아니고(일부러 안 찾았다) 그냥 머리 속에서 굴리며 상상/고민하고 있다. 아마도 음식이 정체성/범주를 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만은 확실하겠지라고 가정하지만 이 가정이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겐 옳지만 다른 사람에겐 아닐 수도 있으니까.

채식, 도살, 폭력성, 페미니즘, 계급

생명을 죽이는 행동이, 동물을 죽이는 행동이 어떤 폭력성의 발현이라는 논리는 정당한 것일까? 이것은 타당한 논리일까? 육식을 하면 사람이 더 폭력적이고 채식을 하면 사람이 선하다는 식의 언설이 있다.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이런 언설은 꽤나 만연하다. 만약 생명을 죽이는 행동이 폭력적 행동이라면 가사노동은 폭력적 실천이란 이상한 논리가 가능해진다. 음식을 만드는 여성 젠더 역할은 폭력적 행위라는 논리도 가능하다. 이런 식의 논리가 가능하다면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은 충돌하는 정치학인가? 하지만 적잖은 페미니스트가 생명 윤리를 이유로 채식을 고민하고 채식주의를 얘기한다.
여성이 생선이나 어류를 구매하고 죽이는 일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제된 성역할이지 여성의 폭력성을 표현하는 행동은 아니다’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하는 행동이란 뜻이다. 이런 해석은 정말 여러 가지로 문제다. 여성 중 생선이나 어패류를 좋아해서 직접 요리하는 일은 없다는 걸까? 대행업무라고 해서 책임감이 없다고 단정해도 되는 것일까?
남성성과 폭력성을, 육식 행위와 폭력성을, 생명 살해 행위과 폭력성을 단순하게 등치시켜선 안 되는 찰나다. ‘모순’이나 ‘아이러니’는 등치해선 안 되고 전제가 잘못 된 것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발생한다. 그리고 육식 행위는 폭력적이고 채식을 여성성/여성적 사유로 연결하는 행위는 이원 젠더 규범을 재생산하고 강화할 뿐이다.
도살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도살 행위는 특정 계급의 역할이다. 조선시대엔 정말 천한 일이고 지금도 도살행위가 우대받거나 사회적으로 권장받는 직업은 아니다. 도살을,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폭력성과 붙인다면, 특정 계급에 대한 혐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은 폭력적이다라는 식의 인식과 곧장 결합되면서 계급 혐오/계급 편견를 재생산한다. 즉 채식 행위에 어떤 윤리, 비폭력성을 붙이거나 육식 행위에 비윤리적이거나 폭력적 속성을 붙이는 행위는 결국 특정 계급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논리에 가깝다. 거대 목축업을 하는 건 거대 자본의 일이긴 하지만, 직접적 도살이 상층 계급의 일은 아니란 점에서 도살, 생명 살해 행위를 폭력적 실천으로 재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다른 말로 채식을 윤리, 폭력성 등과 연결해서 논하는 행위는 여성 혐오, 계급 혐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순간을 만든다. 그러니 누가, 어떤 인식론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채식에 윤리와 비폭력성을 붙이려 드는지 되물어야 한다. 이런 논리가 어떤 지배 질서, 지배 규범을 재생산하려고 하는지 탐문해야 한다.
#나중에 출판할 글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