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방학 때, 학과 동료 몇 명과 글쓰기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그때 사용한 강의 자료를 서너 번에 걸쳐 이곳에 공개할 계획입니다. 이미 아는 내용일 수도 있고 의외로 낯선 내용일 수도 있고요. 아래도 적었지만 오탈자 및 비문이 있지만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귀찮았.. 아, 아니, 그게 바빴.. 아니… 그냥 넘어가주세요.. ㅠ
02 표절[Plagiarism]
“북미지역의 학교에서 제대로 인용하지 않은 문장은 표절로 간주되고 표절하면 교칙에 따라 벌 받거든요;; 대학교에서 표절하면…무려 퇴학.” – 지인이 블로그에 남긴 댓글
지난 총선 때 문**(익명 처리하는 이유는 언급하는 것도 아까워서) 씨는 문도리코란 별명을 얻으며 논문 표절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타인의 논문을 오탈자까지 그대로 배꼈다는 논란. 하지만 조금만 고민하면, 학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공부하며 표절 개념을 제대로 배운 적 있나요? 어디까지가 표절이고, 어디까지가 표절이 아닌 것일까요?
*표절 이슈를 비롯한 이후의 내용은 The Modern Language Association of America. MLA: Handbook for Writers of Research Papers. 7th ed. New York: MLA, 2009. Print.(이하 MLA)를 밑절미 삼았습니다. 별다른 표시 없이 나오는 쪽번호는 모두 이 책을 지칭합니다.
표절은 유괴범(kidnapper)에서 파생한 단어로 도둑질하거나, 기존의 자원을 훔쳐 마치 새로운 것 혹은 자신만의 독창적 아이디어로 포장하는 것을 지칭한다(52). 표절은 다음 두 가지를 뜻한다: 다른 사람의 동의(=인용) 없이 그의 아이디어, 정보, 혹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 정보 혹은 표현을 더 좋은 평가를 얻기 위해 마치 자신의 것인양 사용하는 것(52). 간단하게 예를 들어, 책을 비롯한 기록물에서 읽은 것 뿐만 아니라 수업시간에 강사가 했던 발언이나 논평, 친구와의 대화 등 모든 것을 출처 없이 사용하는 것은 표절이다.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 떠올린 아이디어(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가 아니라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며 들은 것, 어디서 읽은 것 등은 모두 그 출처를 밝혀야 한다(즉, 인용해야 한다). 아이디어가 같은 경우, 상대방의 것이 먼저 출판되었다면 무조건 인용해야 한다. 그 아이디어가 아무리 해당 출판물을 읽기 전 떠올린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먼저 출판된 이상 그 아이디어는 인용해야 하는 아이디어다. 아울러 정확한 출처를 밝히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최소한 누가 했던 말인지 정도는 밝혀야 한다. 이것이 기본이다. 표절은 기본적으로 법적 문제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 윤리적 문제다(52). 즉 저자의 양심, 윤리 문제다.
외국 논문이나 단행본을 보면 논문의 각주1번이나 별도의 Acknowledgement로 감사인사를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첫째, 글을 작성하며 도움을 준 사람을 밝히는 것은 자신의 글이 자기 혼자만의 글이 아니라 이른바 공동작업임을 밝히는 작업이다. 둘째, 이것은 글 곳곳에 다른 사람의 논평이 개입되어 있을 때, 그리고 이것을 일일이 인용하기 애맴하거나 밝히기 어려울 때, 이 상황을 알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즉, 글 전체에 논평을 받았거나 곳곳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받았지만 그것 자체를 직접 인용하긴 어려운 상황일 때 감사인사를 통해 이를 밝히는 것이다. 감사인사를 작성하는 것은 저자가 특별히 더 착한 사람이고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그냥 글쓰기의 기본(=윤리)이다.
그리하여 표절은 글쓰기에서 윤리 이슈다. 단순히 다른 사람 아이디어를 훔쳤다 아니다가 아니라 글쓰기에서 어떤 윤리로, 어떤 태도로 접근할 것이냐란 이슈다.
그럼 MLA에 나와 있는 예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다른 사람의 글을 뻔뻔하게 자기가 쓴 것처럼 내는 것이야 표절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보다 좀 애매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를 테면 다른 사람이 쓴 단어를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이 쓴 유려한/폼나는 구절을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의 논의, 다른 사람의 사유 선상에 있는 것을 활용할 때다(56).
ㄱ. 단어를 인용할 때(재인용한 영어문장은 모두 56쪽에 실린 것이다)
원문(Martin, 625)
Some of Dickinson’s most powerful poems express her firmly held conviction that life cannot be fully comprehended without an understanding of death.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사용했다고 치자.
Emily Dickinson firmly believed that we cannot fully comprehend life unless we also understand death.
만약 이렇게 작성했다면 이것은 표절이다. 사실 누가 봐도 표절 -_-;; 하지만 사실 이렇게 정리하고 인용표시 안 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한 것도 현실. 이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As Wendy Martin has suggested, Emily Dickinson firmly believed that we cannot fully comprehend life unless we also understand death(625).
웬디 마틴의 책 625쪽에서 한 말이란 점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물론 이것은 MLA 스타일이라 자신이 어떤 스타일에 따르느냐에 따라 인용 표기는 다르긴 하다. 간접 인용일 경우 MLA는 인용할 때 저자 이름, 괄호 속에 쪽번호를 가급적 문장 끝에 쓸 것을 권한다(더 자세한 것은 ‘인용’ 장에서).
ㄴ. 유려한/폼나는 구절 인용하기(영문은 57쪽의 것이다)
원문
Everyone uses the word language and everybody these days talks about culture… “Languaculture” is a reminder, I hope, of the necessary connection between its two parts. (Michael Agar, Language Shock: Understanding the Culture of Conversation [New York: Morrow, 1994; print; 60])
만약 글을 쓰다 다음처럼 적었다고 치자.
At the intersection of language and culture lies a concept that we might call “languaculture.”
이것은 표절이다. Agar가 만든 언어를 마치 보편적 용어처럼 사용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표현하자면
At the intersection of language and culture lies a concept that Michael Agar has called “languaculture”(60).
ㄷ. 사유의 흐름을 인용하거나 논의할 때
(영문이 길어 다 옮기기 귀찮으니 생략.. 크크 ;; )
어떤 사람의 두어 문단을 읽고 그것을 이른바 요약하는 문장을 쓸 때 반드시 인용을 표시해야 한다. 해당 요약을 시작하기 전 원저자의 이름을 밝혀야 하며, 해당 요약이 끝났을 때 출처를 밝혀야 한다는 뜻이다.
예) 리카에 따르면, 야옹이는 야옹야용야옹하고 울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용야옹아용하고 우는 것과 야용야옹야용하고 우는 것은 다르다는 뜻이다(10).
위와 같은 표기는 리카에 따르면이라고 시작하는 부분부터 인용 쪽번호가 나오는 구절까지 모두 리카의 의견임을 뜻한다.
다른 어떤 글쓰기보다 학술적 글쓰기에서 인용은 매우 중요하지만 인용 없이 쓸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독자와 학제 구성원이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는 논의를 얘기할 때 그러하다. 이를 테면, “젠더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와 같은 구절을 여성학과나 문화학과 구성원을 대상으로 쓴다면 인용이 필요없다. 이것은 인용 표기를 하지 않아도 표절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에게 관련 참고문헌을 알려주고자 할 경우, 해당 논의에 충분히 의미 있는 반론이 있을 경우, 혹은 독자와 특정 분과 학제에 낯선 내용일 경우 인용을 표기해야한다. 아울러 글을 쓰는 과정에서 애매하다 싶을 경우엔 그냥 인용 표기를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표절을 피하는 길이다. 자유롭게 타인의 논의를 사용하되 내것처럼 쓰지는 말아야 한다.
MLA는 표절을 피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우선 나의 아이디어, 나의 요약,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 및 사실을 구분해서 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리 노트 등을 작성할 때 이것을 반드시 구분하고 분명하게 표시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평소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55).
표절을 둘러싼 몇 가지 관련 이슈를 더 살피면
ㄱ. MLA는 자신의 이전 연구를 재활용하며 아이디어를 더 개진하고 싶을 경우엔 연구책임자 혹은 지도교수, 이전 연구를 출판한 저널과 상의할 것을 권하고 있다(59). 여기에 몇 가지 덧붙이면, 과거 연구를 재활용할 경우, 각주에 반드시 이를 표시해야 한다.
ㄴ. 공동연구일 경우, 그 연구를 바탕으로 논문을 출판할 땐 반드시 연구책임자 및 다른 공동연구자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 자신이 연구책임자일 때도 마찬가지지만 연구책임자가 아닐 경우엔 더욱더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행동이다. 해당 연구를 계기로 또 다른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발표할 경우에도 이전 공동연구자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공동연구자에 대한 기본 예의(=윤리) 문제다.
표절문제에서 타인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 외에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자기표절이다. 아직은 논쟁적 이슈로서 학위 논문의 PDF 공개를 둘러싼 표절 논쟁도 있다. 웹 출판이 빈번하고, 웹페이지(게시판, 블로그, SNS 등)에 작성한 글 모두가 출판물의 일종이다. MLA는 이 모든 것을 인용하는 방법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학위논문을 온라인에 PDF로 공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출판이다. 실제 한국에서 나온 학위논문 대다수를 인쇄판으로 열람하기보다 PDF라는 온라인 출판물을 컴퓨터로 혹은 인쇄해서 열람하고 있다. 그래서 PDF로 공개한 기록물을 다른 형태로 재활용하는 것이 표절인가 여부로 논쟁이 일고 있다. 즉, PDF로 공개한 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재출간할 때 이것이 이중출판인지, 자기표절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논쟁거리다(단행본 출간 예정인 학위논문의 경우 PDF 열람이 금지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출판사의 사정 – 도서 판매의 문제 – 때문이 아니라 이중출판, 즉 자기표절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다). 학제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국에 있는 영문학과의 경우, 석사학위논문을 일부 요약해서 학술지 저널로 출판하는 것은 최대 한 편, 박사학위논문을 일부 요약해서 학술지 저널로 출판하는 것은 최대 세 편(두 편인가;;)으로 제약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표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는 것도 또한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