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리 라이 작가의 그래픽노블 [복숭아씨를 깨물면](안민재, 프리케의숲)을 읽었다. 한 줄 평이라면, 참 좋다. 또 하나의 좋은 퀴어 그래픽노블이 번역되었다.
책 소개는 퀴어커플이라고 나와 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소개는 많은 것을 누락한 소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누락은 독자가 책을 읽으며 가질 감정의 흐름을 위해 의도적으로 덜 언급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책 소개로 미리 아는 것보다는 등장인물의 말 실수, 혐오발화 등을 통해 드러나는 순간을 미리 책소개로 말한다면 독자의 감각이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책은 퀴어 파트너와 각자의 가족과의 관계를 그리는데 그것은 마냥 아름답지는 않다. 레이는 언니와 감정적 갈등이 있고 언니는 레이의 파트너 브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브론은 양육자와 갈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일한 지지자인 동생에게 상처받기도 한다. 이 책은 갈등을 적당히 마무리하기보다, 레이와 브론의 관계를 포함해서 모두의 관계를 적당히 해소하지 않고 종종 그냥 내버려두며, 씁쓸하지만 가능한 형태로 남겨둔다. 이게 좋다. 해피엔딩도 언해피엔딩도 아닌, 봉합하지 않는 관계의 갈등 속에서도 또 그냥 살아가는 삶. 머리맡에 두고 종종 찾아 읽을 듯하다.
ㄴ
며칠 전 한 시나리오작가와 인터뷰 비슷한 것을 하며, 안전하게 상처받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안전하게 상처받고, 안전하게 실패하는 것은 내가 자주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때의 이야기는 인권 교육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내가 학교의 교육을 잘 모르니 상당히 공허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인권 감수성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경험이 안전하게 상처받는 것이라는 점만은 강조할 수 있을 듯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내거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음을 안전하게 경험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겪어가는 것. 나만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차별에 공여하는 나의 권력을 직면하는 과정. 교살에서는 공허한 이야기일 수 있어, 인터뷰 비슷한 자리에서도 좀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