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힐 수 있음의 권력

며칠 전, 메일로 문의를 했으나 답장이 없어서 그곳에 전화를 했다. 전화 하는 것을 워낙 싫어하다 보니 여러 날 미루며 기다렸는데 답장도 없고 메일확인도 하지 않고 해서 결심하고 전화를 했다.

보통 어떤 곳이든 전화를 하면, 개인의 집이 아닌 이상, 받는 곳이 어딘지를 밝히기 마련이다. ○○사무실입니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전화를 건 사람이 정확하게 전화를 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날 전화를 했을 때, 받는 사람은 그냥 “예~”라고만 했다. 순간 머뭇거린 루인도 그냥 상대방이 알아차릴 수 있는 용건의 핵심어(행여 전화를 잘못했다 해도 별문제 없을 그런)를 사용해 서로를 확인하지 않고 용건을 처리했다. 물론 나중엔 루인을 밝혔고 그래서 좀더 쉬웠지만.

전화를 끊으며, 불특정한 사람에게 자신을 밝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권력이라고 몸앓았다. “나는 ○○입니다” 혹은 “여기는 ○○입니다”라는 식의 드러냄은 사회적인 예의나 관습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어도 사회적인 폭력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자의 권력인 것이다.

혹자는 한국이 채식 위주의 음식문화라고 하지만 채식주의자vegan로 살아가는 루인의 경험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채식 조리법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채식 위주는 전혀 아니며 오히려 잔치나 회식, 뒷풀이 같은 자리에서 그리고 거의 모든 음식에서 육식은 필수이다. (된장국에도 조개 등의 육류가 들어간다. 루인에게 육류란 채소나 과일 같은 것이 아닌 모든 것, 즉 유제품까지도 포함하는 언어.) 이런 문화에서 자신이 채식주의자임을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애지상주의 사회이고, 연애/커플이 정상화되고 있는 사회이기에 커플이 자신들의 연애행위나 사귀고 있는 사람을 소개하는 것은 이른바 “염장질”이라고 ‘질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자신이 사귀고 있는 사람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이성애자queer에겐 자신이 사귀고 있는 사람을 ‘누구’에게나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밝힐 때엔, 어떤 폭력이든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철저히 정치적인 행위/운동이다(이 ‘운동’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성애gender문화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격의 ‘운동’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밝힐 수 있다는 건, 기존의 사회제도와 별다른 갈등을 일으키지 않거나 자신을 밝혀도 별다른 문제/폭력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이들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것이 루인이 루인이라고 직접 밝히지 않은 사람에게 루인임이 밝혀지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면서 인터넷상에서 여러 개의 닉네임으로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6 thoughts on “밝힐 수 있음의 권력

  1. 음.. 채식 위주의 음식 문화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채식과 육식이 복합 문화라고 생각하는게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디서 글을 읽었는데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외국인 친구의 이야기. 어느 날 특이한 음식을 먹기로 결정을 하고, 보쌈을 먹은 이야기인데.. 그 복합오묘한 맛에 깜짝 놀라더랍니다. 그런 음식은 서양인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쿡~ 그들은 하나 하나씩, 그 맛을 순서대로 음미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래서 일식이나 중식이 친해지기 쉬운 음식인 이유이고.. 웰빙의 영향으로 한식에도 관심을 많이 갖기 시작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 외국인 친구는 그 복합적인 맛에 놀랐지만 아주 맛있게 둘이서 보쌈을 먹어치웠다는 가슴훈훈한(?) 이야기.. ㅋ 그 외국인 친구가 생각하기에 한식은.. 고기를 먹으면 그 고기에 궁합이 맞는 각종 채소들이 함께 곁들여 올라 온답니다. 그래서 그게 매력이라고..

    1. 오호호, 그 외국인 이야기, 재밌어요. 흐흐=_=
      갑자기 떠올랐는데, 어릴 때 잡식일 땐, 어른들이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채소가 몸에 좋다는 얘길 하다가 채식을 하기 시작하니까, 고기가 몸에 좋다고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말을 바꿨네요. 처음 깨달았어요. ^^
      물론 골고루 먹으란 얘기지만, 그래도 뭔가 재밌다는 느낌이 들어요. 흐흐

  2. 인지하지 못했지만 고기가 주인 음식들을 떠올려보면… 그러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채소가 많이 올라가는 음식문화지만 어디까지나 조연이기에(?)… 채식을 하는 사람에게 힘겨운 부분일 듯 하네요.

    1. 종종, 채식을 경험하고 있는 혹은 가까운 사람 중에 채식을 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채식과 육식의 범주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아요. 채식감수성이 없는 사람들은, 식당에 가면 된장찌개나 김치를 예로 들며 채식 위주라고 말하지만 루인은 바로 그것을 루인같은 비건이 안 먹는 “육식”의 종류라고 말하거든요. 된장찌개에 조개 등이 들어가고 고기집에선 육수를 사용한다고 하더라고요. 김치에도 젖갈이 들어가고요.
      그런 지점들이 재미있다고 몸앓아요. 사람들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경험하는 지점이라서요.^^

  3. 요건 비공개로.. ^^; 마지막 문장을 보고.. 아.. 루인님도 그러시구나 하며 공감을.. 헤헤~ 저도 여러개의 닉네임을 사용하거든요. ㅜ.ㅡ 워낙 변덕이 심한 탓도 있고.. 밝혀지는 것이 싫을 때도 있기에.. 그래서 새로 시작한 블로그에서의 첫 트랙백은 꽤나 용기가 필요했던 부분이였답니다. 🙂 아마 루인님의 블로그에서는 mayjune 이나 수인 이란 닉네임으로 덧글을 몇 번 달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쿡~ ㅡ_ㅡ;

    1. 으헤헤, 루인만 그런 게 아니었네요. 히히. 루인도, 사용하는 메일이 다섯 개인데 모두 다른 아이디를 사용하고 있어요(마찬가지로 메일닉네임도 다 다르고요). 흐흐. 그런데 이걸 가지고 누군가가 막 뭐라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ㅠ_ㅠ 어떤 블로거들은 몇 년 씩 처음 시작한 아이디나 닉네임을 사용한다고 하던데, 루인은 심할 땐, 일주일에 한 번씩 탈퇴와 가입을 반복하며 아이디나 닉네임을 바꾼적도 있어요-_-;;;
      (뭔가 말을 하려다가, 적으면 안 되는 말이구나, 하고 움찔했답니다. 흐흐. 적으면 안 되는 내용을 적을 뻔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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