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역사상 최초의 일이 생길 뻔 했다. 지렁이의 업무추진 속도가 상당히 더딘 건 이제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그럼에도 어젠 일이 생기고 두어 시간 안에 그에 대한 공식 반응을 할 예정이었다. 두 가지 가능한 상황에 따른 각각의 대응을 준비했지만, 그래도 첫 번째 가능성을 기대했고, 이에 따른 준비를 했는데…. 국회의원들이 안 도와주는 구나.
지난 주 금요일이었나, 법사위에 계류 중인 “성전환자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안”이 법사위에서 논의를 했다는 소식이 흘러 나왔다. 거의 포기를 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 갑작스런 소식에 다들 긴장하고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우호적이라는 정보도 있었다. 금요일에 있은 법사위 회의에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참석하지 않아서 법안을 통과시킬 여건이 아니니, 화요일 회의 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참석하면 다시 논의를 해서 통과시킬 예정이라는 말들. 물론 최초 법안 상태로 통과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발의한 의원이 자발적으로 수정했달까.
트랜스젠더들이 호적상의 성별을 변경할 수 있는 요건이 최초엔
(의사 2명의 진단서와 함께)
-혼인관계에 있지 않을 것
-생식능력이 없을 것
-미성년자일 경우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있을 것
정도였다. 하지만 발의한 의원은 법사위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명목으로
-자녀가 없을 것(추가 항목)
-성년자일 것(세 번째 요건의 변경)
으로 바꾸었다. 최초의 법안도 별로인데 이렇게 바꾸다니, 이건 말 그대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시나리오였다. “차라리 법을 만들지마!”라며 버럭하고 싶은 상황이었지만, 일단 입법 자체는 찬성하기로 했다. 그래서 성명서를 준비하기로 했다.
첫 번째 계획은, 법사위 1소위를 통과한다는 전제하에(여기서 통과하면 사실상 국회에서도 통과한다는 의미) “입법을 환영한다, 그런데 지금 뭐하는 짓이냐, 최소한 원안대로는 만들어야 할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어제인 화요일 오전, 오후 시간동안 다른 지렁이 활동가들과 성명서를 쓰고 돌아가며 고친 후, 이제 발표만 하면 되는 최종본이 나온 상태였는데, 웬걸, 1소위에서 통과가 안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확실한 건 아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한나라당 의원들이 “외부성기수술” 요건을 요구했다고.
트랜스젠더들에게 “외부성기수술”의 요구는 처해 있는 입장에 따라 확연하게 갈라지는 쟁점이다. 이분법으로 설명할 경우, mtf/트랜스여성들의 경우 의학기술이 상당히 발달해서, 산부인과의사도 깜빡 속을 정도다. 하지만 ftm/트랜스남성들의 경우, 돈은 훨씬 비싸면서도 실패율은 상당히 높고, 외형과 기능면에서의 만족도는 바닥을 칠 정도다. 그래서 이미 입법을 한 외국의 경우, mtf는 몰라도 ftm에겐 외부성기수술을 요구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도 이런 외부성기수술을 요건을 포함하자는 건, 결국 ftm/트랜스남성들에겐 호적상의 성별변경을 포기하란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건 간단하게 둘로만 나눌 경우의 설명이고, mtf건 ftm이건 상관없이 외부성기수술은 말 그대로 실패해서 죽는 경우가 많은, 가장 위험한 수술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기술이 발달해 있고 비용이 (ftm의 외부성기수술에 비해)적게 드는 mtf 중에서도, 호르몬투여는 해도 외부성기수술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니 법적인 안전망(취직, 제도적 결혼, 여행, 거주, 카드발급 등등)에 들어가려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상관없이 외부성기수술을 해야 한다. 동시에 “외부성기수술”을 요구하는 건 외부성기의 형태가 성별을 판단하는 핵심이라는 인식을 명문화하겠다는 의도이다. (회의록을 구할 수 있다면, 회의록을 구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아무려나 두 번째 계획에 따라 며칠 안에 성명서가 나올 예정이다. 짐작했겠지만, 두 번째 계획은 법안이 1소위를 통과하지 않았을 때, 이를 규탄하는 내용이다.
경우에 따라선 현재의 법안이 폐지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촉구하는 성명서를 내긴 해야 한다. 물론 조금도 안 유명한 단체에서 성명서 하나 낸다고 움직일 국회의원들이 아니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냥 당하고 살지만은 않을 거니까.) 그렇다고 “외부성기수술” 요건을 추가하더라도 법을 만들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제정운동보다 개정운동이 더 힘들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고, “외부성기수술” 요건을 포함한 법을 만들려고 한다면, “어쨌든 입법을 환영한다, 그런데…”라는 성명서가 아니라 입법저지운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 차별금지법안과 관련한 논쟁과 비슷한 구도가 생기겠지. 입법권자들과 일부의 트랜스젠더들은 “그래도 법을 만들자”라고 얘기할 테다.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한 운동을 하는 여러 사람들이 “외부성기수술” 요건을 포함한 특별법제정을 반대하는 운동을 한다면 “너희들 때문에 법을 못 만든다”란 말을 들을 테고.
운동을, 어떻게든 법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방식으로 고민하고 있고, 어떻게든 “법”을 중심으로 운동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일 때마다 “입법운동의 전략”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법사위’ 국회의원들이 과연 뭘 ‘쥐뿔이나’ 알고는 있는 걸까요? 본인은 고사하고 쓸만한 지식과 사고를 갖춘 ‘보좌관’을 데리고 있는 의원들이 과연 몇명이나 될지 원…
알면 저렇게는 못 하겠지요. 모르니까, 모르면서도 안다고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권력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겠죠. 정말, 이번 대선과 내년 총선이 불안해요.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