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대안이 뭘까?
하지만 언제나 루인의 습관 상 이렇게 묻지 않는다. “루인이 대안을 말하면 그대로 할 거야?” 혹은 “당신이 말하는 그 ‘대안’이란 게 뭔데?”라고 묻지.
어떤 의미에서 어떤 이론/학문이든 대안이란 ‘없다’고 몸앓는다. 대안이라니, 그건 도대체 누구의 관점이란 말이냐.
일테면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페미니스트(혹은 다른 학문의 학자)가 있다고 치고 그 사람이 지금의 사회가 변하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 돼, 라고 대안을 제시했다고 치자. 그럼 그대로 따라 할 거야? 그 사람이 말한 맥락이 있고 루인이 위치하고 있는 맥락이 있으며 이런 맥락들이 서로 다른데 어떻게 그 사람이 말한 ‘대안’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겠어.
일테면 가족제도는 모순투성이니 해체되어야 해, 라고 말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가족은 (제도권 안에서의) 가족구성권이 있는 ‘이성애’자들의 가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반queer/비’이성애’자들에게 가족구성권은 쟁취해야 할 권리이기에 해체할 건더기 자체가 ‘없다’. 이렇게 사람마다 서 있는 맥락이 다르고 위치(positioning)가 다른데 어떻게 ‘대안’이 가능할까. 그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말하는 고민들/몸앓이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란 질문은 어떤 의미에서 식민화된 사유라고 본다. 그 지점은 항상 자신의 위치에서 직접 고민해야할 부분이지 않을까. 자신의 맥락에서 언어들을 다시 읽어내고 자신의 ‘대안’을 생산하는 것, 그리고 이런 다양한 대안들이 경합하고 소통하는 것. 루인이 만난 페미니즘의 사유는 이러한 것이었다. 누군가가 말해주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진단이 있으면 그러한 지식을 삶과의 몸앓이를 통해 앎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그래서 “대안이 뭐야?”라고 묻는 사람의 대안과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대안은 그 자체로 경합하는 개념이라고 본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체계에선 모든 것엔 정답이 있고 그런 정답을 찾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면 페미니즘에선 그런 질문의 전제가 무엇이며 그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구성되었는지를 다시 묻고 질문 자체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과정 자체가 이미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