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행려승이 어느 절에 며칠 머물렀다. 때는 겨울이었고, 밤은 깊어 가는데 몸을 녹일 땔감이 없었다. 한참을 추위에 떨고 있던 행려승은 불단에 있는 목조불상을 부셔서 불을 때기로 했다. 불상은 오랫동안 말라 있었으니 불은 잘 붙었고 몸도 녹았다. 그때 주지스님이 헐레벌떡 달려와선 무슨 짓이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니, 부처님 상으로 불을 때다니, 이 무슨 무엄한 짓입니까?”
“아, 부처님의 사리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행려승은 답했다. 이 대답에 어이가 없는 주지스님.
“나무 조각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답니까.”
“그럼 뭐가 문제죠?”
난 꽤나 오랫동안 이 우화가 종교의 우상숭배를 풍자하는 거라고 해석했다. 근데 행려승과 주지승의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우화일 수도 있겠다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떠나는 자/떠날 수 있는 자와 남겨진 자/한 자리에 머물러야 하는 자의 입장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고민을 했다. 우상이라도 붙잡고 있지 않으면, 삶이 위태로운 자의 모습.
지독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슬픔. 언젠간 이런 모습의 기다림도 끝나겠지….
언젠가 만난 네 살 난 아이는,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걸 너무도 아쉬워했어. 적어도 몇 달 안엔 다시 만날 예정인데도, 서럽게 울었어. 그래. 다음에 만나자는 인사는, 기약이 없다. 내일 만나자는 인사는, 가장 불확실한 인사지. 그 아이의 울음은, 진실을 폭로하는 소리인지도 몰라.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어. 물론 헤어질 때마다 하는 나의 인사가, “살아 있으면 또 만나요.”인 이유가 꼭 이런 것만은 아니지만. 그러니 6,700여 년 전 당신을 만난 이후, 다시는 못 만난다는 걸 슬퍼하거나 아쉬워할 이유는 없어. 애당초 기약할 수 있는 약속과 미래란 없잖아.
저기 놓인 목조불상을 태워서 324년간 내 몸을 녹이지만, 아직도 한기가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