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컷』

패트리샤 맥코믹. 『컷』Cut. 전하림 옮김. 서울: 보물창고(메타포), 2008.

그런 책이 있다. 제목을 읽는 순간, ‘이 책은 내 책이야’라는 어떤 예감이 드는. 하지만 읽기는 쉽지 않아 계속해서 망설이는. 언제든 읽을 수 있는 곳에 책이 있지만, 결코 책을 꺼내지 않는. 읽으면 단박에 좋아할 걸 알면서도 계속 망설이고 외면하고 회피하고 싶은 책. 『컷』이 그랬다. 난 이 책의 제목을 읽자마자 구매했지만 읽기까진 무려 8개월이 걸렸다.

한편으론 걱정했다. 내가 기대했던 내용과 너무 달라서 실망할까봐. 기대가 너무 커서 실망의 크기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일까봐. 이런 저런 감정들 속에서 지내다 지난 설연휴를 빌미로 이 책을 읽었다. 그래… 읽기를 잘했어. 정말 잘했어.

물론 어떤 사람에게 이 책의 진행과 결론은 다소 식상할 수도 있다. 드라마 혹은 이야기의 감동을 위한 기본적인 요소 혹은 필수 요소에 어느 정도 충실하게 따르며 소설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익숙함이 안도와 위로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진부하기만 한 건 아니다. 관점의 변화가 익숙한 형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음을 『컷』은 증명한다.

이 책의 내용은 제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Cut. 구글사전에 따르면 “베다. 상처를 내다. 자르다.”와 같은 뜻이 가장 먼저 나온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손과 팔에 자상을 내고 그로 인해 요양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 요양원엔 거식, 폭식, 약물 중독과 같은 이유로 온 사람들이 모여 있고. 이 공간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작가는 연민이나 치료의 대상이 아닌 소통이란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다. 핵심은 치료가 아니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이다. 모든 상처는 한 개인에 국한하지 않고 타인들과의 관계, 그리고 사회 구조적인 틀 속에 발생한다는 걸, 이런 거창한 설명 없이 이야기 속에 녹여내고 있다.

좋아한 부분은

“내가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피어싱 하는 거랑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어. 젠장! 다른 사람들은 혀도 뚫고, 입술도 뚫고, 귀도 뚫는 마당에 내 몸 내가 알아서 한다는데 왜 난리인 거야?”
그 애가 애들을 쭉 훑어본다. 모두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는다.
“이건 내 몸을 장식하는 거야. 문신처럼 말이야.”
[…중략…]
“모두 왜 그렇게 야단법석인지 정말 모르겠어. 이건 개인의 표현의 자유 아닐까?”
나는 소매 끝자락을 잡고 만지작거린다. 멀리 개가 미친 듯이 짓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아만다인지 만다인지는 그 애가 잡지에서 보았다는 기사에 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여 듣기 시작한다.
“그거 알아? 옛날에는 사람들이 아프면 일부러 피를 내곤 했대. 그러면 엔도르핀이 생성된다는 거지.”
그 애가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
갑자기 들리는 클레어 선생님의 말소리에 방 안에 있는 애들의 고개가 일제히 선생님을 향한다.
“그런 행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니?”
클레어 선생님이 묻는다.
“그렇고말고요.”
아만다인지 만다인지가 의자에서 몸을 움직이며 대답한다.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어요. 정말 끝내 줘요. 그 전에 기분이 아무리 엉망이었더라도 그 순간에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죠. 갑자기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또 그렇게 하고 싶니?”
클레어 선생님이 묻는다.
내 손가락 감각이 무디어진다. 소매 끝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나 보다.
“네. 그래요. 그런데 그게 왜요?”
(67-68쪽)

내가 하고 싶은 말, 나의 어떤 행동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읽는 내내 아팠다.

8 thoughts on “『컷』

  1. 장식이라니……. 루인님, 그런생각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정말 기분이 좋아질까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ㅋ
    제가 댓글다는 거 참 그렇져…….

  2. ……발췌한 부분만 읽어도 아픈데요.
    소통을 통해서 상처가 치유될까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근데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1. 전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 나의 아픔이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지 스스로 납득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상태를 소통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이럴 때 소통은 치유의 과정이지 않을까 싶고요. 문제는 이 과정이 너무 어렵다는 거죠… ;ㅁ;

  3. 왠지 이해할 수 있을것 같은 느낌.
    컷트를 통해서 살아있음을 확인한다는것 말이에요.

    1. 컷, 자르는 행위는 정말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과정이라고 느껴요. 흐흐. 어쩌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언어인지도 모르겠어요. 🙂

  4. 앗, 이 소설 전 직장에서 제일 친했던 동료가 번역한 책이에요~ 퇴사 선물로 저에게 한 부 줬는데 아직 읽지 않고 있어요. 루인님 좋으셨다니 저도 읽어 봐야겠어요.

  5. 핑백: Run To 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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