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정년퇴임했지만, 수업이 어렵고 힘들기로 유명한 어느 교수는 박사학위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박사학위가 있어도 전임교수가 되기 어렵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 할 필요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는 연구성과의 측도라는 발표논문도 몇 편 안 된다고 한다.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는 아니라고 한다. 그의 수업은 내용을 정확하고 꼼꼼하게 분석하기로 유명하며, 대학원생이라도 어지간히 공부하지 않으면 따라가기도 힘들다고 했으니까. 그가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않은 이유, 그가 발표한 논문이 거의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고 한다.
그의 제자가 진행한 수업을 들었을 때, 그와 관련한 또 다른 일화를 전해 들었다. (이 말은, 내 주변에 그의 수업을 따라다니는 팬이 있었다는 뜻이다.) 어느 날 어느 잡지에서 그에게 논문을 청탁했다고 한다. 그는 수락했다고 한다. 원고 마감 날 편집자가 그에게 찾아가니 사무실에 없더란다. 찾아 보니, 그는 소각장에서 그의 원고를 태우고 있었다고. 이유는 간단했다. 발표할 만한 논문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나라면 어느 선에서 타협하고 발표 했을 테니까.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니, 현재의 부족함은 나중에 보충하리라 위안하며. 그런데, 지금 내가 딱 그 꼴이다.
난 지금 내가 쓴 학위논문을 잊으려고 아등바등이다. 마치 내가 그런 글을 쓴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리고 누군가가 내 논문을 얘기하면 어떻게든 외면하고, 달라는 얘길 하면 회피한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작년 11월 정도만 해도, 난 논문을 좀 많이 찍어 널리 배포하리라, 다짐했다. 내용이 엉망이라 해도 누군가에겐 쓸모가 있을 테니까. 몇 가지 정보를 수정한 후, PDF로 변환한 파일을 이곳에 공개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근데 그게 쉽지 않았다. 참 이상하지. 심사위원에게 제출할 원고를 완성하고 링제본하여 제출한 이후로, 나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동안 너무 몰입하여 거리를 두지 못 했기에 깨닫지 못 한 문제점들이 팝업창처럼 불시에 튀어나왔다.
내가 무슨 대단한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 건 아니었다. 시작은 창대했다. 시작할 때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글을 쓰면서 나의 기획은 과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내 글은, 글쓴이의 의견이란 조금도 없는 허접한 발제문이지만 새로운 논의를 요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 근데, 아니었다. 내 글은 내용 요약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뭔가 엉망진창이란 느낌만 남기 시작했다. 그냥, 그런 느낌 뿐이었다.
학제에서 통과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요건을 갖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라고, 몇몇 선생님들은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난 그 말을 관용어구로 이해했다. 내게 하는 칭찬은 모두 관용어구로 이해하는 나의 고질이 발동했다. 배배 꼬인 거다. 그 선생님들의 말은 믿지만, 그것이 내게 해당할 리가 없다고 믿었다.
널리 배포하겠다는 만용은 간 곳 없고, 숨고 싶은 몸으로 변했다. 논문제본을 최소한으로 했고 그 마저도 도서관을 제외하면 심사위원을 포함해도 극히 적은 부수만 배포했다. 심지어 웹 공개도 동의하지 않았다. 웹 비공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정보는 공유할 수록 좋다고 믿지만, 청탁 받아 쓴 매우 부족한 글도 이곳에 곧잘 공개하는 나지만, 논문만은 차마 공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론 이런 나의 태도는 논문후유증에 따른 진부한 반응이란 것을 안다. 적잖은 이들이 논문을 쓰고 난 후 우울증에 빠진다고 했으니, 나의 상태 역시 염려할 정도는 아니다.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운 걸까? 시간이 지나면 다 우스운 일이리라.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어 부끄러우리라. 하지만 이건 시간이 지난 후의 상황이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미래는 미래고 현재는 현재.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것.
오랫 동안 이 글을 써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있었다. 써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논문을 드리겠다고 약속한 분들에게 정황을 알리고 양해를 구해야 하니까. 다른 한편으론 현재의 내 상황을 정리하고 기록하고 싶으니까. 이 글을 시작하며 언급한 어느 교수처럼 내가 완벽주의라서가 아니다. 그가 느꼈을 어떤 부끄러움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이라면, 발표한 적 없는 그의 글은 무척 빼어났겠지만, 나의 글은 그 누구에게도 부족하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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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오해하실까봐 첨언하면, 논문때문에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 부끄러운 글이라 차마 공개할 수가 없다는 의미랍니다. 흐흐 ;;;
루인님, 이곳에 글 낙기는것 정말 오랜만이네요. 글 잘 읽었고요. 이 글 또한 제 수준에서 이해할수밖에 없는것이, 항상 글쓰거나 말하는걸 망설이게하지만 꼭 드리고 싶은 말이있어서요. 음.. 블로그를 정말 짧으기간동안 운영하기도했고 또 사는 세상이 다르기도 해서 정작 루인님의 어떤 일?ㅋ 과 많이 연루된 당사자이긴 하지만 이웃분들의 반만큼도 글쓰는 방식, 표현들을 이해못했다고봐야 옳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동안 드렸던 말들은 순전히 저의 입장과 느낀점만을 말한, 저 자신조차 불신할수밖에없는 것들이기도 하고요.
(저와 연루된 글들이 아니라면ㅋ) 루인님은 글을 정말 잘쓰는 분이라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요. 제가 드렸던 불만스런 말들은 어찌보면 특정 이슈하에 루인님이 경험해온 문화나 이성애자로서 살아온 제가 경험한 문화의 마찰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아요. 이를테면, 어렴풋이 기억하건데 루인님의 먹는것에 관한 비유를 읽을때마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최근에 동성애 문화에서 그런비유가 거부감없이 통용된다는 걸 알았거든요. 종종 대상을 미화하는 표현들도 찬사처럼느껴지기보다는 물건이 된 느낌이었고요. 오해나 갈등이 불가피했다는 뜻이지 님의 글이 부끄러워할만한것이 아니란 뜻이에요. 이웃분들과 음악이나 책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하는동안 드러나지 않던 ‘차이’들이 “연애”라고 표현하기는 뭣하지만, 그런 문제 하에 드러난 극명한 차이는 아니었을까 생가해보아요. 시간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아마 이성애자들 입장에서는 저라는 사람이 ‘관심을 받으니 부럽다’가 아니라’참 불쌍하다’ 라고 읽혔을것도 같고요. 물론 이는 전적으로 저의 생각이고 저보다 오랫동안 루인님과 소통해온 이웃분들은 또 다른 생각일테지요. 암튼 루인님의 지난 글들을 읽어보면 참 재밌고 새로운 인식을 주는 글들이 많은데 부끄럽다니요. 그건 맞지 않아요.
어떤때는 블로그라도 열어서 더이상 분란이 없도록 노력해볼까 하다가, 여건도 그렇지만 그럴만한 자신도 없고요. 숨고 싶어서 숨는게 아니라 어쟀거나 비난받기는 똑같을테니. 그건 저의 처신 문제이기도 하지만 각기 개인들 불만과 욕망의 쓰레기통이랄까… 그런 입장인것 같아서요 (불순한 욕망만을 의미하지 않기때문에 나쁘다고만 할수도 없고, 원망보단 미안함이 크고요) 단지 저에게 말을 걸어주시니까 루인님께는 계속 연락을 취한거고요. ( 그 과정에서 무례함도 보았을 것이고 실망도 하셨을 것이고요).
토룡에서도 말걸어주면 언제든 달려갑니다?하하 기피인물 1호! (아무도 안찾아주지만 제쪽에서도 기피합니다?!)
저의 바람은요. 저와 관련된 글로 루인님이 정작 다른 각도에서 더이상 부끄럽지 않았으면해서요. 작년 말부터 루인님 글의 퀄리티가 좀 떨어지는데 괜히 제가 죄책감을 느껴서요
완소 블로그의 이미지로 다시 태어나길 바래요.^^
위의 글은 읽고서 갑자기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이란 말이 튀어나와서… 참 사람들이 제각각이란 생각이 들어요. 루인님의 선택을 존중해드리고서 또다시 실수라니…. (그냥 들볶이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 아닌가 싶기도).
어떤때는 저도 루인님 글을 속시원히 이해해했으면 바라기도 했고(루인님 글솜씨가 문제가 아니란 얘기), 내가 정말 딴세상에 잠깐 들어갔었구나 새록새록 놀라기도 했고요. 제가 블로그에 그냥 휘갈겼던 말들을 원거리 이웃까지 저보다 더 잘 기억하는건지 소름돋기도했어요 (그러니 블로그를 다신 못열지…ㅋ)
길어졌습니다. 안녕히계세요.
초심이 몇 주 앞으로 다가왔어요.
아직 실험도 못 끝냈고, 퇴고도 못 했는데 시간은 정말 야속하기만 하네요..
벌써부터 불꽃 속으로 논문을, 아니 컴퓨터 통째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솟아나요. 잘쓰고 싶었는데 라는 감정이 주는 씁쓸한 맛은 정말.. -_-;
맘 대로 논문이 나오지 않으니 더 집중이 안 되는 악순환..에 빠져서 ㅋㅋㅋ 참. 어려워요 ㅎ
논문이 주는 압박과 더불어 진로고민까지 사서 해서 더 문제라지요. 눈 앞에 있는 일에만 집중하는 일이 필요한데, 급한 때 일수록 잡음이 심한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저는 루인님께 논문을 받은 1인이 된 것이 참 기뻐요. 부분 부분 읽어서 아직 완독하지는 못 했지만, 종심을 마치는 대로 읽을 꺼에요. 🙂
아.. 댓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메일로 쓸껄..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네요;;
아아… 정말 초긴장 상태겠어요. 하루하루가 발을 동동 구르는 날들일 테고요… 조금 여유를 가지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유를 갖는다는 게 결코 쉽지도 않고요… 근데 또 신기한 건, 그래도 막상 마감을 앞두고 어떻게 된다는 거죠. ㅡ_ㅡ;; 그래서 더 씁쓸하기도 하더라고요. 내가 바랐던 건 이게 아닌데 싶어서…
더욱이 진로고민까지 같이 하고 있다니,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기분일 거예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다 싶을 텐데… 그래도 아직은 초심이라니, 다시 수정할 시간이 있을 거예요…
참, 그리고 도서관을 제외하면 통틀어 열 명이 안 되는데, 그 중 한 분이에요… 흐흐. 🙂
토닥토닥~
헤헤. 고마워요. 🙂
루인 글을 보고 있자니, 내가 반성이 없어서 발전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ㅠ
하여간 혼자 보면서 자위하는 글과 공개해야 하는 글은 분명히 부담감과 책임감이 다른 것 같다는;;
저의 문제는, 반성은 시도때도 없이 하지만, 반영을 안 한다는 거죠… 크크크.ㅡ_ㅡ;;;;;;;;;;;;;;;;;;;
근데 당고 글은 블로그에 올리는 글만 해도, 출판하는 글과 같은 느낌인 걸요. 🙂
‘팝업창’처럼 튀어나온다는 비유 너무 와닿아요; 그나저나 나날이 인터넷이 우리 생활 속으로 침투하면서 이렇게 은유의 방편이 되기도 하네요…ㅋ
흐흐. 정말 그래요. 이젠 어디까지가 온라인이고 어디부터 오프라인인지 헷갈리기도 해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