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박미선, 주해연 옮김. 서울: 여이연, 2009)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애초 협의한 날짜는 이미 지났지만 원고를 청탁하신 분의 말을 믿고 다음 주 중에 발송하려고요.
이 책의 리뷰는 매우 간단하게, 단 한 줄로 쓸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제까지 읽은 페미니즘관련 책에서 당신의 언어를 찾을 수 없었거나 아쉬움이 남았다면 이 책을 읽으세요.”
미리 얘기하자면 이 책의 교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Run To 루인]에 이 책 관련 글을 쓰는 게 겸연쩍기도 해요. 하지만 이런 이유로 더 애정이 가기도 합니다. 책 자체가 좋기도 하고요. 🙂
02
리뷰의 형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른 리뷰들을 뒤적이기도 합니다. 책이 논하는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고, 이런 맥락에서 해당 책의 위치를 설명하고, 이 책이 현재 어떻게 유용한지를 밝히고. 이건 리뷰나 독후감의 기본 형식입니다. 반드시 이렇게 써야 하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책의 맥락을 설명해주고 책과 리뷰를 쓰는 사람의 긴장 관계를 드러내는 식이죠. 그러니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리뷰를 쓴다면 미국에서 흑인여성의 상황, 페미니즘에서 인종 논의, 젠더와 인종을 논한 이론 개괄, 흑인 페미니즘의 현재 등이 리뷰에 들어가겠지요. 하지만 이런 관습적인 방식의 글을 쓰기에 저는 적절한 글쓴이가 아니죠. 해당 전공자도 아니거니와 이런 내용을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수십, 수백 명은 되니까요. 제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리뷰를 쓰면서 미국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역사적인 맥락을 훑는다면, 적어도 저에겐 코미디입니다. 벨 훅스 조금 읽었을 뿐이고, 오드리 로드 글 몇 편 읽었을 뿐인 걸요. 사실 상 아는 것이 없죠.
이런 고민은 조금 나중에 했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전공자, 미국현대문학전공자, 미국흑인문학전공자, 미국 사회학 전공자, 이주와 인종 이슈 전공자들이 매우 많은 상황에서도 굳이 저에게 이 책의 리뷰를 청탁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먼저 고민했습니다. 아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전공자들이 쓸 거라 예상하는 글이 아닌 다른 어떤 리뷰를 바란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사회학자나 미국문학전공자가 쓸 수 있는, 쓸 거라 예상하는 글을 바랐다면 애당초 저에게 리뷰를 요청하지도 않았겠죠. 즉, 트랜스 활동가의 맥락에서 이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를 바랐던 거겠죠. (아…, 아닌가? ;;)
03
트랜스젠더 혹은 퀴어 활동의 맥락에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리뷰하기. 쉬운 일은 아닙니다. 쉬운 일이 아닌 건, 제 블로그 [Run To 루인]에 쓰는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을 싣는 매체의 성격과 형식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처음 계획은, 리뷰를 쓰는데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글이었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인식론과 방법론를 밑절미 삼아, 콜린스가 한국어판 서문에도 밝혔듯, 이 책이 “배타적으로 흑인여성의 소유물로만 그치지 않”(7)고 “사람들과 대화를 촉진하는 논의”(8)로 활용하는 글쓰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문제가 있더군요. 이렇게 쓸 경우,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은 사람은 왜 이런 리뷰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읽지 않은 사람들로선 황당하겠죠. “리뷰라는데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단 한 번도 언급을 안 해? 도대체 이 리뷰와 책은 무슨 상관이지?”라는 식으로.
저의 욕심은 간단했습니다. 이 책이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 무관할 것만 같은 이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것. 고민을 풀어가는 데 있어 매우 소중한 조언이 될 것이란 것. 어쩌면 활동을 하고 공부를 하는데 등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 이런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저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봉합사 삼아 글을 풀어가기로 했습니다. 최근 제 고민들, 활동들을 엮고 꿰매는 봉합사로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리뷰하기. 한 가지 다행인 건 그 매체가 형식 자체를 따지진 않는다는 거죠. 글쓴이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거죠. 그래서 좀 편하게 쓰고 있습니다. 수필도 아닌 것이 논문도 아닌 것이 리뷰도 아닌 것이 일기도 아닌 것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떤 형식으로.
그래도 걱정인 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나름 소심해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밀어붙이고선 나중에 벌벌 떠는 타입이거든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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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옮긴이들에게 미리 변명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흐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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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쓴 관련 글
『흑인 페미니즘 사상』: 매우 짧은 리뷰
인용: 『흑인 페미니즘 사상』 + 이종태 기자의 기사
저도 읽고 싶네요^^ 센터에 있지만..센터에서만 봐야하니, 한권살까봐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여러 가지로요. 헤헤.
고민을 함께 나누는 느낌이 든달까요. 🙂
편한대로 쓰시는 게 제일 좋죠! 다만 리뷰라는 장르의 기본인 1) 내용설명과 2) 어떤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 수 있다는 견해, 두 가지만 포함이 된다면요! 고마워요.
고백하자면… H 님 댓글이 없었다면… 내용 설명을 생략할 뻔했어요… 아하하… ㅠ_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