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좀 건방지게 말하자. 나는 한국 페미니즘 운동이 성취한 인식론적 토대의 수혜자면서 바로 그 인식론에 저항해야 하는 도전자다. 페미니즘은 학제에서 비규범적 존재가 자신의 위치로 기존 학제를 다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했다. 내가 아니라 나를 문제 삼는 바로 그 질문의 토대를 문제삼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이성애-비트랜스젠더를 밑절미 삼는다. ‘여성’이란 토대는 여전히 견고하다. 견고할 뿐만 아니라 집요하게 고집하는 근본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와 노력에 포섭될 수도 없고 내쳐질 수도 없는 존재다. 나는 예외로는 머물 수 있지만 예외로만 머물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예외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나로 인해, 꼭 내가 아니라도 트랜스젠더를 인식하며 인식론적 토대, 존재론적 토대 자체를 바꾸길 바란다. 이것이 내가 나를 전시하고 공개하는 이유다. 내가 아니라 젠더란 범주, 여성-남성으로 나뉜 공간을 새롭게, 그리고 지금과는 다르게 상상할 수 있길 바란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지 나의 편의가 아니다. 예외로 머무는 한 나는 편하지 않다. 솔직하게 말해 더 불편하다. 내가 제공 받은 편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편의를 제공하는 사람이 것이다. 내게 편의를 제공하려고 애쓴 분의 노력을 폄훼하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분에겐 언제나 고마울 따름이다. 그저 그 분의 노력과 상관없이 그 행동이 의도하지 않게 유지하는 토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예외로 포섭될 때, 젠더 이분법을 유지하려는 토대는 온전한 형태로 유지된다. 세상은 여성 아니면 남성 뿐이라고 인식하는 방식은 아무런 문제 없이 그냥 유지된다. 누차 말하지만 나는 이것을 바라지 않는다.
02
가장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급진성을 사유할 것.
가장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급진적으로 사는 것이다.
03
어제 처음으로 김비 님을 뵈었다. 글은 여러 편 읽었지만 직접 뵙고 강의를 들은 것은 처음이다. 조근조근 이야기하면서도 힘이 넘치고 또 성찰이 반짝이는 말이라니!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 태도의 문제와 끊임없이 연결하는 말하기 방식은 보통의 내공이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 김비 님의 삶을 말로 듣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힘이었다. 나는 그냥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나중엔 또 어떤 식의 삶을 선택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금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도 괜찮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활자에 처음 등장하여 지금까지 꾸준히 트랜스젠더 이슈를 말하고 있어서 고마웠다. 언제나 하는 얘기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김비 님이나 하리수 님과 같은 이가 있다는 것은 큰 힘이다. 공적 인물이 아무도 없던 시기에 무언가를 얘기하는 것과 그 이후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는 그 이후에 등장했고 그래서 조금은 편하게 말할 수 있다.
참고로 02번의 말은 <못생긴 트랜스젠더 김비 이야기>란 책 제목과도 관련 있다. 이 얼마나 끝내주는 제목이냐!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제 짝지는 활동가보다는 소설을 쓰는일이 맞는 것이고, 루인님은 공부하고 연구하고 글쓰는 일이 많는 것 같아요.
루인님에게 울 짝지가 의미있는 존재였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루인님이 의미있는 존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성소수자는 아니지만, 자주 무기력감과 우울감에 빠져 힘들어하는 사람입니다.
내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소수자이며 약한 존재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저또한 다른 소수자와 약자들에게 관심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게 중요한건 살아내기 입니다. 제가 강하고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면 살아내기를 넘어서는 삶의 목적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힘겨울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하루도 살아냅니다.
짝지가 보잘것 없는 제 옆에 있어 감사하고, 호르몬 투여도 안하시면서 일상적인 삶의 바탕위에 세상에 대해 균열을 내시는 루인님의 모습에 위안을 받습니다.
장소적으로 멀리 있어 뵙기는 힘들겠지만 이제 댓글 다는 법도 알았으니, 블로그에 더 자주 놀러올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정말 각자가 하고 싶어하는 일,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이 다른 듯해요.
짝지님은 소설가로, 저는 또 제 방식으로, 박조건형 님은 또 박조건형 님 방식으로요..
그날 두 분 뵈면서 참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어요. 누가 누구에게 기댄다거나 그런 모습이 아니라 그냥 서로에게 든든하고 또 단단한 느낌이었달까요. 그래서 괜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을 받는 느낌이기도 했고요. 🙂
저도 종종 블로그에 놀러갈게요. 헤헤
어떻게 들으실 지 모르겠지만 루인 님의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매우 반갑습니다; 저는 활동가도 아니고 트랜스도 아니며 퀴어이론이나 페미니즘을 전공하지도 않지만, 저 자신을 배려받는 예외의 존재로 위치시키지 않으려면 퀴어이론이나 페미니즘이 성취한 인식론적 토대를 활용하면서도 그것에 도전해야 한다고 느낄 때가 있어서요. 많은 퀴어이론들이 이성애/동성애의 이분법을 정당하고 적법한 것으로 위치시키고 양성애자를 침묵시키는 silencing tactic 을 쓰며 바이포비아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미 소수(?)이고 비주류인 것에 문제제기 하는 게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사실 너무 반가워서 댓글을 쓰다가 거의 A4한장이 넘어가서…(;;;;;) 다시 씁니다. 원하시는 방향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열심히 읽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이건 참 시건방진 댓글일지도…ㅠ)
p.s – cisgender 라는 말 대신 비-트랜스를 쓰시는 이유가 있는지 여쭤봐도 될는지요? 궁금합니당..
어떻게 들으실 지 모르겠지만 비공개 님의 이런 댓글을 읽을 때마다 매우 반갑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01번 글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쓴 글인데요, 글을 쓰면서 혼자 너무 흥분했나라는 고민을 좀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공감을 표현해주시는 댓글을 읽노라면 너무 고맙고 또 저 자신을 채찍질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달까요.
그나저나 A4 한 장이 넘어가는 댓글이었다니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네요.. ^^; 그만큼 할 얘기가 많으셨단 뜻이겠죠? 퀴어이론이건 페미니즘이건 여전히 특정 범주를 중심으로 논하거나 특정 범주를 배제하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나봐요. 크크. ;;;
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 표현의 선택은… 그냥 손에 익은 표현으로 써요,라고 하면 안 되겠죠? 크. ;;;
저만의 고민은 아니겠지만,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경계는 어디일까가 늘 고민이에요. 종종 그 경계는 매우 모호하잖아요. 아울러 트랜스젠더의 경험은 단순히 트랜스젠더만의 경험이 아니라 젠더란 범주에서 발생한 경험이며 따라서 비트랜스젠더와는 무관한 경험일 수 없으니까요. 이 둘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순간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게토화시킬 우려가 있겠더라고요. 의도하지 않게 비트랜스젠더 범주를 안정된 것으로 만들 수 있진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이런 고민에서 비트랜스젠더를 시스젠더로 바꿔 부를 경우,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제가 우려하는 지점을 확정할 수도 있겠다는 저 혼자의 우려가 있어서 비트랜스젠더란 용어를 쓰고 있어요. 물론 비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더 분명하게 구분하고 그 경계를 확정하는 느낌이라고 누군가 지적한다면 할 얘긴 없고요. 크크. ;;;;;;;;;;;;;;;;;;;;
정리가 안 돼서 횡설수설하느라 답글이 길어지더라고요…;;
그 내용은 나중에 블로그라거나 어딘가에 좀 정리해서 써보고 싶어요; ‘소수성’ 을 띈 것으로 생각되는 페미니즘이나 퀴어이론에서조차 부차적으로만 다루어져 왔던 범주를 다시 생각할 때, 트랜스이론이 담지하는 문제설정 방식이나 인식론? 그런 걸 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러기엔 제가 트랜스이론을 모르네요! 이 무슨 건방진…;;;크;) 그리고 또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양성애’ 의 정의나 범주를 설정하는 문제가 트랜스, 혹은 gender-variants?의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루인 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하지만 너무 손쉽게 질문해서 이런저런 책임이나 부담을 떠넘기는 꼴이 될까봐.. ㅠㅠ
그리고 트랜스-시스 문제에 관해선, 그냥 답글을 보고 떠오른 제 서툰 생각인데요; 제가 저를 ‘시스젠더’ 라고 말할 때는 사실 젠더 디아스포라(..라고 표현해야 할지..;) 를 전혀 겪지 않는다거나, 제가 여남의 범주와 역할기대에 완벽히 동의하고 들어맞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그럭저럭은 참고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정도의 문제랄까…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비 트랜스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발화될 때, 트랜스젠더들이 가지는 고유한 맥락이나 트랜스의 입장에서만 대면하게 되는 문제들, 그런 걸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을까 혹은 제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해서 ‘시스젠더’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쓰곤 했어요.
그런데 비-백인이라는 말이 백인을 기준으로 두고 논-모노섹슈얼이라는 말은 모노섹슈얼을 기준으로 두는 것처럼, ‘비-트랜스’ 라는 명명은 트랜스를 기준으로 두는 것 같아서 더 좋다고 생각되기도 해요. 젠더 디아스포라가 예외적 현상이 아니고 개인이 젠더에 완벽히 들어맞는 것이 예외적 현상이라 본다면요… 으아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느낌이네요, 흐;; 그냥 제 생각을 말해보았습니당. 저도 앞으로는 시스 대신 비-트랜스라고 말해볼까봐요.
비공개 님 댓글을 읽다가 두 개의 논문이 떠올랐는데요…
Ruth Goldman. “Who is That Queer Queer? Exploring Norms around Sexuality, Race, and Class in Queer Theory.” in Brett Beemyn and Mickey Eliason ed. Queer Studies: A Lesbia, Gay, Bisexual, and Transgender Anthology. New York and London: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6.
Vivian Ki Namaste. “The Use and Abuse of Queer Tropes: Metaphor and Catachresis in Queer Theory and Politics.” Social Semiotics 9.2 (1999): 213-234.
사실 이미 읽으셨을 듯하여 조금 민망하지만요..;;
첫 번째 것은 퀴어이론에서 바이를 배제하는 것과 관련한 논문이고, 두 번째 것은 퀴어란 수사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한 논문이에요. 읽은지 좀 되었지만 읽을 당시엔 꽤나 좋았고요. 흐. ;;
트랜스-시스 부분은 저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비공개 님이 얘기하신 것과는 완전 다른 맥락이긴 한데, 가끔은 트랜스젠더를 젠더 구성의 아이콘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더라고요. 그런 경우 트랜스젠더는 계속 얘기하는데 그 안에 트랜스젠더가 없는 기이한 상황이랄까요. 그래서 저 역시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경계가 너무도 모호하다는 고민을 하는 한편, 둘 사이의 경험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고민을 늘 함께 하고 있어요. 어떻게 해도 쉽지 않달까요… 그래서 어떤 용어도 사실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고 늘 불만이라 딱히 어떤 용어가 더 적절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싶어요. 아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