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정희진 선생님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 서론에 나온 에피소드를 떠올린다. 누군가가 정희진 선생님께, 너는 할 말을 다 하고 살지 않느냐고 했다는 에피소드. 이 사회의 비규범적 존재의 발화는, 두어 마디여도 규범적 사회는 시끄럽다고 느낀다. 참, 말 많다고, 할 말 다 하고 산다고.
블로그를 운영하는 나는 꽤나 많은 말을 떠드는 편이다. 정말 수다스러울 정도로, 때때로 트윗 하나 분량이면 충분할 얘기를 블로그 포스팅 하나 분량으로 쓰니까. 어떤 날은 할 말이 없는데 블로깅은 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니 참 많은 말을 한다 싶다.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은 얘기 열 개 중 하나, 아니 백 개 중 하나도 못 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많은 얘기가, 내 안에 작동하는 많은 검열로 인해 그냥 묻힌다. 혹은 내가 너무 많이 떠들어서 남들이 얘기할 기회를 앗는 것은 아닐까라는 어쭙잖은 염려로 말을 삼가기도 한다.
이렇게 말을 망설이는 무수한 상황에서도, 어떤 경우엔 늘 그때그때 말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주로 개별 관계 맥락에서 더 자주 작동한다. 특히 안 좋은 얘기보다 좋은 얘기일 땐 더 그렇다.
이를테면… 나는 나와 처음으로 산 고양이, 리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못 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안타까워 한다. 정말 좋아했는데, 그래서 만날 “아웅, 예쁘다. 우리 오래오래 함께 하자”라는 말은 했지만, 정작 사랑한다는 말은 못 했다. 정말 사랑했는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 말을 못 했다. 무엇이 부끄럽다고.. 그냥 말 하면 되는 것을… 리카는 갑자기 아팠고, 나는 안타까워만 했다. 그 순간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못 했다. 그 순간에도..
혹은, 이곳에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는 간단한 생일 축하 인사였다. 그냥 어색한 말투로 생신을 축하드린다고 말했다. 원래 그날은 부산에 가서 같이 밥을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난 바쁘다는 이유로 부산에 가지 않았다. 그냥 전화만 했다. 명절에 볼 텐데라며 말을 아꼈다. 그냥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얼추 열흘 뒤, 아버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말을 할 기회 자체가 사라지는 찰나. 어떤 감정의 관계였건 상관없이 뭔가 나눌 얘기가 있었을 텐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지는 않는다. 다 하고 살 수도 없다. 그럼에도 어떤 관계에선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물론 잘 못 한다. 아직도 많은 관계에서 좋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 못 한다. 그냥 간단하게만 말할 때도 많다. 그러지 말하야 하는데.. 적어도 블로그에 떠드는 만큼이라도 직접 전할 수 있어야 할텐데…
♡ – 헤헤 🙂
에헤헤헤 저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