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주의, 사라지기

수상한 시절이라 그런지 만약 전쟁이 나거나 큰 재난이 닥쳤을 경우를 대비하여 얼마나 준비를 하고 있느냐는 글이 이런저런 게시판에 올라오곤 한다. 어떤 사람은 깡통이 몇 백 개 준비되어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2리터 물이 50여 통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방독면이 있다는 집도 있다. 그래서 곰곰 생각하니, 만약 전쟁이 나고 내가 사는 집은 다행히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다고 가정할 때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물론 집이 서울 외곽이고 경기도 북부에 해당하니 멀쩡하진 않을 것 같다. 알바를 하는 곳은 행정기관이 밀집한 곳에 속하니 그리 안전하진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전쟁이 났고 나는 마침 집에 있었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그나마 멀쩡하다고 가정할 때 나는 며칠을 버틸 수 있을까?

엔하위키의 ‘생존주의’ 항목에 따르면 물 없이 사흘 정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지금 집에 물은 2리터 병으로 40여 개가 있다.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온 다음, 나름 가장 기뻐한 일이 이것이다. 간혹 다른 사람 집에 갔다가 6병 묶은 생수 여러 팩을 쟁여둔 모습을 보면 부러웠다. 그땐 이태원에 살 때인데 그 시절 나는 한 팩씩 사먹곤 했다. (그 전엔 한두 병씩 사먹었다.) 집 근처 가게는 배달을 하지 않는 곳이었고 한 번에 여러 팩을 사서 들고갈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사는 집 근처 슈퍼마켓이 생수는 배달해준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항상 6팩을 쟁여두고 지냈다. ‘생존주의’ 항목에 따르면 마실 물은 하루에 2리터, 위생에 2리터 정도 필요하다지만, 적당히 조절하면 일주일 이상은 버티겠다.

그런데 식량은? 어떤 사람은 일상에서 소비하는 캔이 200개 가량 상비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쌀은 있지만 그런 건 없다. 채식을 하며 깨닫지만 콩이나 옥수수 정도가 아니면 캔으로 파는 채식 음식이 사실상 없다. ‘사실상 없다’는 표현은 콩단백 통조림을 제외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식사 대용품이 아니다. 예를 들어 참치캔은 식사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콩단백 제품은 철저하게 반찬용이다. 무엇보다 콩단백 통조림은 매우 비싸다. 그러니 생쌀만 씹어먹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이것저것 합치면 15kg 정도의 쌀이 있으니 또 어떻게 버티겠지(모 잡지에 글을 쓰고 고료로 쌀 10kg을 받았다! 와아!). ‘생쌀’을 씹어먹어야한다고 표현한 것은 집에 휴대용 조리기구가 없기 때문이다.

뭐, 이런저런 구체적 상상을 하다가 깨닫기를, 만약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 트랜스젠더라면 호르몬을 구하는 게 가장 큰 일이겠구나 싶었다. 만약 지니고 있는 호르몬을 다 먹기 전에 전쟁이 끝나고 호르몬을 다시 처방받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호르몬을 투여하던 트랜스젠더는 강제로 호르몬 투여가 중단된다. 그럼? 가장 안 좋은 효과가 발생하는 거지. 보통 호르몬 투여를 중간에 중단하면 mtf는 남성화, ftm은 여성화 효과가 상당히 강하게 일어난다고 한다(이른바 반작용). 수술을 한 다음에도 호르몬을 적절히 투여해야 효과가 좋다고 한다. 그래서 호르몬 투여를 시작하면, 중간에 중단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전쟁 나면 약국부터 털어야 하나? (농담 같은 진담일까, 진담 같은 농담일까?)

그런데 전쟁이 나면 내가 바라는 건 따로 있다. 나는 전쟁으로 사망 혹은 실종 처리되길 바란다. 이 문장은 ‘나는 전쟁 때 죽길 바란다’를 뜻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살아남지만, 공식적으로는 사망 혹은 실종으로 처리되길 바란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나의 생존을 알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나의 생존을 전혀 알 수 없길 바란다. 만약 이 바람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지금 집에 있는 많은 기록물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런 바람을 있다. 그냥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 내게 익숙한 공간에 살고 있지만 공적 기록에선 사라지는 삶을 사는 것.

어쨌거나 다들 무사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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