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비엔나, 이틀째

ㄱ. 밤 12시에 잠들었는데 새벽 2시가 안 되어서 깨어났다. 자는 동안 너무 피곤할 때 겪곤 하는 가수면 상태를 겪기도 했는데, 깨어나니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결국 새벽에 발표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고작 두 시간을 못 자는 상황이라니…
ㄴ. 머물고 있는 방에 호텔의 레스토랑 메뉴판이 있어서 살펴보다가 비건 메뉴를 몇 개 발견했다. 오호라! 경우에 따라 여기서 먹어도 괜찮겠구나 싶다. 비건 메뉴가 있음을 확인하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어제 저녁부터 함께한 일행과 함께 했는데, 메뉴가 괜찮았다. 무엇보다 과일이 풍부해서 맘에 들었다. 아침 과일은 무척 매력적이지.
ㄷ. 6명이 한 무리가 되어 이동했지만 서로 가는 방법을 몰라 당황하는 와중에, 마침 트램에서 다른 발표자를 만나서 그 사람의 안내로 간신히 도착했다. 많은 사람이 길치!
ㄹ. 학회장에 도착하니 몇 가지 간식이 있었다. 한국이면 비건이 먹을 수 없는 제품만 둘 가능성이 거의 100%다. 하지만 주최측은 빵은 비건과 비건 아닌 종류로, 비스켓은 모두 비건용으로 준비했다. 감동이었다. 심지어 맛있었다. 정말 대단해!
ㅁ. 점심은 뷔페였는데 모든 음식이 비건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에 알러지/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피해서 먹을 수 있도록 알러지를 유발하는 성분이 들어갔을 경우엔 이것을 모두 표기해뒀다. 사람의 몸을 생각하는 태도, 인식의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ㅂ. 오전엔 ㅅㅇ가 발표를 했는데, 발표 이후 일본이나 중국 상황을 발표한 다른 시간에 비해 질문이 적었다. 나중에 확인한 점은 동아시아라고 해도 주요 관심은 일본이나 중국이지 한국은 아니었다. 그래서 ㅅㅇ의 발표 이후 한국의 퀴어가 겪고 있는 상황, 한국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을 질문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ㅅ. 나의 발표는 내가 영어를 못 하니까 그냥 발표문을 따라 읽으라며 왜 영어로 발표를 해야 하는지가 의문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이것은 영어로 발표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한국이 영어에 강박이고 많은 범주 용어가 영어를 음차하며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과 관련한 논의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나면 ㅈㅇ 님이 통역을 해줘서 질의응답을 진행했다. 발표문을 읽을 땐 몰랐는데, 질의응답을 할 때 한국어로 발표를 하니 다들 진지한 표정은 짓고 있지만 그것이 내 말을 알아 듣는 태도는 아니란 점이 재밌었다. 아마도 극소수의 몇 명을 제외하면 그저 소리가 울린다는 정도의 느낌이었겠지. 그리고 ㅈㅇ님이 통역해줬을 때 그제야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짓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발표가 끝나고 나서 몇 명이 내가 영어의 헤게모니를 지적해줘서 정말 좋았다는 말을 건네줬다. 아, 음, 뭔가 기분이 좋지만 마음이 복잡했는데 영어의 헤게모니를 지적하는 부분이 논의의 핵심은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뭐, 아무려나 사람들에게 뭐라도 인상을 남겼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 ^^; ㅅㅇ와 잠깐 이야기했지만, 한국 학술대회에서 영어 사용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이와 같은 반응이 아니었을 것이란 점에서 마음은 더 복잡했다.
ㅇ. 발표가 모두 끝나고 일을 처리한 다음 어제 만난 일행과 함께, 총 6명이서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다. 하지만 길을 못 찾아서 헤매다가 길에서 주최측 사람을 만나 결국 빈대학교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빈대학교에 되돌아갔을 때 또 다른 주최측 일행을 만났고 그들이 우리를 다른 괜찮은 곳으로 안내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하지만 저녁을 먹으려고 대기하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잠이 몰려와서 잠시 엎드려 잤다. 어제 2시간 가량 밖에 못 잤고 시차 문제도 있었는지 참을 수 없는 졸음이었다.
ㅈ. 식당이 흥미로운 건 채식 식당이 아님에도 채식 음식이 있고, 비건 음식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보다 더 흥미로운, 어제 저녁에 들린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알러지를 유발할 수 있는 음식, 생선, 우유 등이 들어간 음식을 모두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고기가 들어간 음식은 따로 표기가 안 되었지만 직원에게 물어보면 비건 음식을 알려줬다. ㅁ에서 적은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종종 한국이 채식하기 정말 좋다고 말하는 한국인이 있지만 이것은 정말 헛소리다. 육고기 간 것을 넣고는 고기가 안 들어간다고 말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채식을 하거나 음식 알러지가 있다면 한국은 정말로 살기가 어려운 나라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이런 태도(아마도 유럽의 다른 나라도 이렇겠거니 하는데)는 사회 전체가 인간의 몸, 사람의 생활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고민하도록 했다.
ㅊ. 트램을 타고 이동하며, 걸어서 돌아다니며 빈 시내의 건물을 보는 건 그 자체로 매력이다. 그냥 모든 건물 하나하나를 다 촬영하고 싶을 정도로 멋지다. 이것이 역사가 묻어 있는 건물, 건축 문화의 매력인 것일까? 하지만 제국의 건축 문화가 유지되어 있는 동시에 1층만은 최신의 상업 지역으로 변해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제국 문화의 흔적과 최근의 흔적의 공존이라니… 빈의 편의점도 한국의 편의점과 달랐는데, 물건을 배치하는 방식, 조명을 사용하는 방식 등이 모두 달랐다. 백열등을 사용하고, 물건을 밖에선 볼 수 없는 한국의 편의점과 달리 가게 안을 밖에서 확인할 수 있고 조명도 백열등이 아니었다.
ㅋ. 하지만 아직도 내가 빈에 있다는 실감이 안 난다.

6 thoughts on “오스트리아 빈/비엔나, 이틀째

  1. 오오, 루인이 빈에 있다니!
    저도 실감이 안 나네요 ㅎㅎㅎ

    1. 저도 실감이 잘 안 났어요! 그리고 지금은 귀국해서 한국에 있다는 게 슬퍼요. ㅠㅠㅠ

  2. 저도 한국은 채식하기 별로라고 생각해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일단, 아니 이것도 안먹냐, 너 왜 그렇게 까다롭냐, 그냥 남들처럼 먹어라 니가 뭐라고. 이런식이잖아요. 굉장히 불편해요. 그리고 이런 태도는 일반에서 벗어난, 좀 다른 점이 있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 같아요.

    1. 그러니까요. 까다롭다, 민감하다, 예민하다, 그래선 사회생활 못 한다와 같은 말로 모든 사람을 동화시키려고만 하지 사람의 몸을 복잡하지 사유하지 않으려고 해요. 정말 끔찍한 사회라는 것을 다시 배웠달까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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