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불온한 당신인가? : 이영 감독, 불온한 당신

ㄱ. 커밍아웃
70살의 바지씨 이묵은 말했다. ‘나는 그냥 이렇게 살아왔다’고. 어릴 때부터 동네 사람들이 쟤는 여자애인데 남자로 행동하는 걸 다 알고 있었다고. 그냥 그렇게 살았다고 했다. 동일본에서 살고 있는 텐과 논은 대지진 이후 살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커밍아웃을 했다. 그리고 지금, 1990년대 이후 이른바 퀴어판에 등장한 나/우리는?
70~80년대를 20대로 보낸 많은 변태 선배에게 있어 커밍아웃은 “내가 말했는데 저 사람이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어떡하지?”가 아니었다. 가족은 어떻게 반응할까, 말해도 괜찮을까가 아니었다. 커밍아웃 자체를 용기로, 진정성의 핵심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커밍아웃이란 개념, 인식 자체가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낯선 개념이다. 지금은 부치인지 ftm/트랜스남성인지 남성적으로 자신을 재현하는 젠더퀴어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엔 바지씨였던 이묵 선배는 그냥 주변에서 알았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냥 고백했고, 애인이 생기면 자신의 집에 데려오고, 상대의 집에 찾아갔다. 물론 우리 애인사이다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가족과 만나는 일을 반복하다보면 그냥 서로 익숙해졌다고 한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이후 한국의 많은 사람이 원전 폐쇄를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일본산 음식을 기피하고 어패류 섭취를 자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반응은 정작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말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LGBT/퀴어에게 커밍아웃은 그 의미가 어떻게 변했을까? 언제 다시 대지진이 발생하고, 그리하여 내가 혹은 나의 연인/친구/가족이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커밍아웃은 프라이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존 문제며 관계를 엮어가는 매우 중요한 방식이다. 사람을 찾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가족만이 실종자 신고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친구의 실종 신고는 받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 상황 자체를 바꾸는 작업과는 별개로 커밍아웃은 친구를 가족으로 여기며 찾을 수 있는 소중한 방법이다. 그것은 지금 한국에서 인권을 주장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무엇이 더 절실하고 간절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처한 상황이 달라지면 행위의 의미는 전혀 다른 식으로 해석되고 배치된다. 대지진 이전엔 커밍아웃을 했다가 헤꼬지를 당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대지진 이후론 그런 헤꼬지가 더 이상 큰 걱정거리가 아니라는 말이 깊이 와 닿았다.
그리고 지금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이 끊임없이 LGBT/퀴어를 적대한다. 단순히 LGBT/퀴어만 적대하지 않는다. 종북게이라며, 종북좌파와 LGBT/퀴어는 동류라며 남북 분단상황을 상기시킨다. 정말로 남북전쟁을 염두에 둔다면 사실 태도가 바뀔 수도 있다. 전쟁을 겪고도 경제개발한 한국인데 고작 퀴어 때문에 나라 망하랴? 혹은 3년의 전쟁도 겪었는데 커밍아웃이 대수랴. 하지만 반공 이데올로기를 자극하는 이런 태도는 내 가족의 태도에 영향을 끼친다. 커밍아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일처럼 바뀌고 있다. 십대가 가족에게 커밍아웃했다간 집에서 쫓겨나며 생존 자체가 위협 받을 수 있다. 커밍아웃을 마치 긍정적 경험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십대건 아니건 상관없이 커밍아웃이 마냥 긍정적 경험은 아니다. 스스로 경제적 삶을 감당할 수 없다면 커밍아웃은 불가능한 일이거나 끊임없는 괴로움을 동반하는 일이다.
처한 상황에 따라 커밍아웃의 의미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 풍경의 중첩이 인상적이었다.
덧붙이면 미국 중심의 논의를 보면 그런 이야기가 있다. 시골이나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와서야 비로소 LGBT/퀴어는 익명의 삶을 살며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한국은 오지랖이 워낙 강해서, 임대인/집주인이 임차인 방을 제 안방처럼 드나들고, 누구나 타인의 삶에 관여할 수 있다고 믿는 분위기여서 미국 논의와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대도시 서울이 좀 더 괜찮다는 믿음이 있다. 이묵 선배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아무래도 고향이 편하다고. 자신을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사람이 있는 곳,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란 걸 알고 있는 고향이 더 편하다고. 고향에선 가슴 바인더도 하지 않는다고. LGBT/퀴어와 공간을 이야기할 때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ㄴ. 이야기를 쌓아가기
이 영화의 또 다른 성취, 혹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세월호 참사 이슈를 퀴어 정치에서 반드시 고민해야 할 이슈로 설명했다는 점이다. 세월호 사망자, 실종자,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이나 친구 중에 LGBT/퀴어가 (있을 수) 있어서가 아니다. 일본 대지진을 겪으며 커밍아웃과 삶의 양식 자체가 바뀌었던 논과 텐의 이야기는 세월호 이슈로 넘어간다. 세월호 참사는 그 유가족, 실종자의 가족, 그 친구들, 세월호 참사를 고민하는 이들의 삶 자체를 바꿔놓는다. 익히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세월호 애도 작업을 비난하고 적대하는 집단의 언설은 정확하게 퀴어를 혐오하는 집단의 언설과 겹친다. 다른 말로 이 사회의 ‘안전’ 혹은 ‘규범’을 조직하는 방식에서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의 애도와 LGBT/퀴어는 동류의 집단으로 배치된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축제판을 벌이냐며 2014년 6월, 신촌에서 퀴어문화축제를 방해했던 세력이 ‘그만 슬퍼하라’고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고 ‘배를 인양하려면 돈이 들고 그 돈은 세금으로 지급해야 하는데 내 돈 낭비하지 말라’고 악다구니를 한다.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는 언설, 그만 슬퍼하고 조용히 지내라는 언설과 퀴어 너네들 공공에 함부로 나오지 말라는 언설이 겹치는 순간 세월호 참사 이슈는 참사와 관련된 사람의 구성원이 어떻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퀴어 정치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이슈가 된다. 다큐멘터리 [불온한 당신]은 이 장면을 만들어 낸다.
(반드시 이런 이유만으로 퀴어 정치학이 세월호 참사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월호 참사만이 아니다. 이야기를 쌓아가는 형식을 취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노동자를 빨갱이로 부르고 국가 전복 세력으로 여기는 이들의 이야기를 반LGBT/퀴어 집단의 언설과 포갠다. 그리하여 지금 이땅에서 발생하고 있는 복잡한 현상의 다층적 측면을 단순하게 만들지 않고 복잡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ㄷ. 누가 불온한 당신인가
2014년 서울시 청소년인권조례 관련 토론회가 진행될 때 역시나 반LGBT/퀴어 집단이 찾아와 토론회를 방해한다. 애국가 제창 때 일어나지 않은 이들을 가르켜 사람이 저렇게 해도 괜찮냐고 비난하며 토론회 시작을 방해하고, 토론회 내내 갖은 욕설을 내뱉는다. 토론회가 끝났을 때 밖으로 나오던 한 목사(로 추정하는 인물)가 “이것이 무슨 평화냐”고 말했다. 나는 그 풍경이야 말로 평화롭다고 느꼈지만 그 목사는 그것이 평화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아니 영화가 끊임없이 보여주듯, 목사는 하나의 목소리로 단결하는 사회를 욕망하는 듯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결한 사회, 박근혜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하고 숭배하는 목소리로 결집한 사회 말이다. 그런 목사에게 LGBT/퀴어는 불온한 당신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LGBT/퀴어와 종북척결세력, 반LGBT/퀴어를 주장하는 집단, 세월호 유가족 모두가, 영화에 등장하는 모두가 불온한 당신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나의 목소리,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목소리만이 유일한 목소리이길 원하는 집단에게 다른 입장에서 등장하는 목소리는 불온하다. 기존 사회가 공공연히 배제하길 원하는 목소리, 하지만 이묵 선배가 생생하게 증언하듯 언제나 한국 사회에서 그냥 살아왔던 목소리를 주장하는 입장에선 그 목소리를 부정하려 드는 존재가 불온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온하여 불온함이 경합한다. 아울러 LGBT/퀴어가 주요 관객일 때 불온한 존재는 LGBT/퀴어가 아니라 그 적대 세력일 수도 있다. 다른 관객은 또 다르게 느낄 것이다. 나는 정확하게 이 지점에서 다큐멘터리가 특히 좋았다. 불온함이 확정되기 보다 경합하는 순간으로 고민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ㄹ. 고민
다큐멘터리는 이묵을 어느 한 범주로 확정하려 하지 않는다. 본인이 말한 범주, 바지씨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호명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감독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다. 하지만 초반 나레이션에서 감독은 ‘이묵은 자신을 바지씨로, 나는 레즈비언으로 설명한다’고 말한다(정확한 자구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은 고민거리다. 이묵은 바지씨며, 오늘날의 범주로는 레즈비언 부치일 수도 있고, ftm/트랜스남성일 수도 있고, 젠더퀴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나는 나를 레즈비언으로 부른다’와 함께 등장할 때 이묵은 레즈비언 부치로 환원될 위험이 발생한다. 감독의 의도가 그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지만 저 해설은 이런 위험을 야기한다. 그래서 고민이었다. 시대에 따라 다른 범주 명명, 남성 혹은 남성성을 인지하고 그것을 명명하는 방식, 살아온 세대의 차이 등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이자, 이를 함축하는 문장이지만 바로 그 문장이 영화 자체의 고민을 지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DMZ 영화제에서의 상영은 끝났다. 하지만 반드시 다른 곳에서 다시 상영할 것이고 나는 많은 사람이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좋겠다. 감상과 평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을 다층적으로 엮어내는 작업이란 점에서 꼭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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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 보고 쓴 감상이라 오독이 수두룩할 수 있습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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