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읽은 에쿠니 가오리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하느님의 보트]와 [반짝반짝 빛나는], 이렇게 두 권이다. [하느님의 보트]는 그 광기가 좋았고 [반짝반짝 빛나는]은 주인공 ‘여자’가 딱 루인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울증에 뜨거운 물이 가득한 욕조에 몇 시간이고 들어가 있는 걸 좋아하는. 자취를 하며 가장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가 욕조가 없다는 것.
그 시절 에쿠니 가오리를 읽은 후, 더 이상 에쿠니 가오리를 읽지 않았고 더 찾지도 않았으며, 헌책방에서 발견하더라도 대체로 시큰둥한 정도였다. [하느님의 보트]와 [반짝반짝 빛나는]이 나오면 사야지 했지만 아직 헌책방에서 발견한 적이 없다. 그러니 여전히 루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 두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짝반짝 빛나는]이 아프게 즐길 수 있기만 한 책이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너무 불편해서 화를 내고 싶은 책이다. 이성애 ‘여성’이 게이 ‘남성’에게 가지는 판타지를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같이 여행하기 “안전”하고 대화가 잘 통하고 패션 감각이 뛰어나고 세련되고, 등등 이성애’남성’에게 바라지만 실현할 수 없는 지점들을 게이 ‘남성’들에게 투사하고 있는 이 소설의 내용은 사실 소설에서만의 것이 아니라 루인이 가끔 혹은 우연히 들리곤 하는 블로그에서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본 적은 없지만 한국의 한 드라마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왔다고 들었다.)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란 말을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어왔다. 이성간의 관계는 곧 성적인 관계란 얘기다. 이성친구와 조금만 친하거나 자주 같이 다녀도 “둘이 사귄데”란 소문이 돌고 그로인해 멀어진 사람도 몇 있다. 잘 통하는 친구일 뿐인데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만남 자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말과 이런 반응은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란 전제를 깔고 있다. 물론 요즘은 동성끼리 손잡고 다니면 “이반이냐?”란 말을 듣기도 하지만, 여전히 이성애를 정상화하고 비’이성애’자를 별나라의 외계인 취급한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게이 ‘남성’에 대한 판타지가 이성애 ‘여성’에게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른바 사회에서 “남성다움”이라는 역할-무뚝뚝한 것이 “남자답다”로 여겨지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등의 행동들에서 게이 ‘남성’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판타지. 결국 이성애 제도에선 무성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이코드”, “동성애코드” 따위의 말이 모두 이를 드러내는 언어들이다(“이성애코드”란 말은 없다).
정말 이런 사람이 있다, 없다, 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판타지가 폭력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반/비’이성애’자/트랜스들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고 이들의 담론이 자신의 세계관을 흔드는 것은 거부하지만 판타지를 재현할 수 있는 “스크린”이 된다면 환영이라는 것.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은 이런 이성애 ‘여성’이 게이 ‘남성’에게 바라는 판타지를 완벽하게 그리는 “동화”일 뿐이라 읽고 나면 좋은 만큼 짜증도 함께 밀려온다.
어제 [브로크백 마운틴]과 놀고 난 후기를 쓰며, 에니스의 가부장적인 모습을 언급했던 이유도, 에니스에게 일이 생기자 알마가 바쁘게 일을 하고 있음에도 짜증을 내며 아이들을 맡기고 가버리는 장면이 몸에 깊이 남은 이유도 그래서다. 불필요한 판타지를 덧입히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자신을 게이라고 정체화하고 커밍아웃을 하거나 운동을 하지도 않고 그저 죽은 잭을 기억하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좋았다. 이반queer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반들이 권리투쟁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러지 않아서 실망했다는 얘길 들은 기억이 몸에 있는데 이반이면 모두가 운동을 해야 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운동하지 않음을 비판하고 운동을 요구하는 반응은, 노골적인 이반혐오와 별로 다르지 않은 혐오다.
그냥 잘 만든 로맨스물이라고 부르고 싶다. ‘동성애’가 나온다고 “비주류” 영화라는 식의 표현은 심각한 착각이며 과도하게 “퀴어/동성애” 운운하는 건 오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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