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트위터에서 일어나고 있는 바이섹슈얼과 무성애, 젠더퀴어를 향한 혐오, 삭제, 부인, 부정 암튼 그런 상황 관련 제보(는 아니지만 나 입장에선 결국 제보기도…)를 받고 있다. 용어가 등장한지 고작 150년 정도고 한국에서 정체성으로 등장한지 이제 20년 좀 넘은 동성애 범주로 그렇게 다른 범주를 부정하고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접하면서 드는 고민은… 트랜스(트랜스젠더퀴어&인터섹스) 맥락에서 동성애 혹은 동성이란 개념이 얼마나 우발적이고 우연적 사건인지, 때때로 그것이 불가능하며 동성을 고집하는 태도가 트랜스를 전혀 사유하지 않는 태도일 수 있음을 설명하는 글을 쓰고 싶다. 어디선가 짧게 쓴 기억이 있지만 이 지점만 특화해서. 물론 이것 역시 그저 무수히 많은 “쓰고 싶은 글” 목록 어딘가에 위치하겠지만.
암튼 분명한 것은, 어떤 범주가 정체성이다, 차별을 받고 있다 아니다란 논의에 덧붙여 트랜스 맥락에서 동성/애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추가하고 싶다. 그런데 이건 바이섹슈얼 맥락에서도 가능한 질문이다. 인식론적으로, 현실적으로 트랜스와 바이섹슈얼리티/양성애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몸이나 욕망이란 개념들의 기능, 정의, 실천 등에 있어서 이분법적 분절은 그저 폭정
동성이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꾸준히 생각해보고 있어요. 나와 타인의 젠더가 같다고 판별할 수 있는 확신을 주는 무지막지한 기준은 대체 무엇일까요.
(아래 댓글과 포함해서)
정말 동성이라는 관념, (이성애주의 맥락에서 사용하는)이성이라는 관념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을 당연시하면서 버틀러를 이야기하는 말을 들으면 참 곤혹스러워요. 때론 트랜스에게 우호적이라며 말을 하는 걸 들으면 난감하고요. 퀴어이론은 자신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다시 사유하는 학문인데 어째서 자신의 위치를 방어하는 언어로 전유하는건지…
트랜스금기를 좀 더 제대로 설명하는 글을 써야 하나 싶기도 하네요.
말씀하신 트랜스금기를 다루게 될 글이라면 내용이 모더니티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기 때문에 언어라는 체계 자체와 싸우는 작업이 될 거 같아요. 매니페스토 형식이려나요. 저도 요즘 계속 젠더의 존재론, 젠더의 현상학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어요. 아무튼 기대하겠습니다.
뭐랄까.. 저 요즘 좋게 말하면 ‘영적인 체험’, 속된 말로는 ‘미쳐가고’ 있어요. 익숙하던 것들과의 결별.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작업. 다른 세계로 연결되는 다리에 주춧돌을 주물럭(?) 거려보는 작업. 식당에서 일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짧은 만남을 갖다보니 좋은 영감을 많이 받는 듯 해요. 예를 들자면, 모든 젠더의 사람들을 대하는 저의 태도가 많이 변화했달까. 이론을 머리로 인식하는 것과 그것이 육화된 습관으로 정착할 때까지는 시차가 있는데, 드디어 몸에 배인 습관이 되는 거 같아요. 되게 기뻐요…
뜬금없는데 quantum physics에 등장하는 여러 논리를 비유적으로 끌어와서 젠더를 사유해봐도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거 같아요.
그나저나 퀴어이론 서적을 번역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는데, 루인님께서는 어찌 진행하셨었나요?
언제 곧 한번 미팅을 갖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즉 엉망진창이긴 하다만 <성괴> 목차도 점점 그 변태적 뼈대를 드러내고 있어요. 보고 싶어요 루인님.
이 글을 보니까 예전에 루인님이 올리셨던, 근친 금기 < 동성애 금기 < 트랜스 금기 글이 생각나네요.
트랜스와 젠더퀴어와 무성별을 비롯하여 무수하게 비/성별화된 몸과 정체성을 생각하면 할수록 동성 간 욕망에 전제돼 있(곤 하)는 규범적 몸/성별 관점과 자꾸 더 부대끼는 느낌이에요. 이성 간 욕망의 외연과 내포가 실상 감당 못할 만큼 퀴어하게 다양하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