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주 혹은 존재를 말하는 일: 한국퀴어영화제, 별 거 아닌 큰 문제, 클라이막스

2017 한국퀴어영화제 “커런트이슈 1 빈 칸을 채우는 일에 대하여” 섹션에서 상영한 영화 네 편, [특이한/클라이맥스/엘스/별 거 아닌 큰 문제]과 관련한 큐톡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큐톡에 참여하기 위해 작성한(현장에서 배포한) 글입니다.
배포한 글에서 한 문장 정도는 수정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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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주 혹은 존재를 말하는 일
-루인(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19세기 후반, 당시 나이로 42살이던 소피는 두 달 전 결혼한 남성과 삽입을 중심으로 하는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없어,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소피의 몸을 검사했고 그 과정에서 (외부 성기 형태로만 인간의 섹스 혹은 젠더를 판단할 수 있다면) 소피는 ‘남성’에 해당함을 ‘발견’했다. 소피에게는 음경이라 부를 수 있는 기관이 있었다. 하지만 소피의 부모는 소피를 여자로 인지하며 여성으로 키웠고 소피 역시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며 살았다. 인터섹스 연구자 앨리스 드레거가 발굴한 소피 관련 의료 기록은, 파비앙 골거트 감독의 영화 “별 거 아닌 큰 문제 The Devil is in the Details”에 등장하는 에르퀼린 바뱅(Herculine Barbin)의 경우와 비슷하다. 바뱅은 여성으로 인식되어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수녀원에서 앙리에트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이른바 여성 생식 기관 뿐만 아니라 남성 생식 기관도 있음이 발견되면서 남성으로 재지정되고 수녀원에서 쫓겨났다.
비록 바뱅은 자서전을 통해 그 자신의 이름과 삶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다른 많은 과거의 인터섹스는 그러지 못했다. 19세기 들어 해부학이 발달하면서 인간 신체를 ‘열람’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인터섹스는 의사의 ‘위대한 발견’으로, 사례 연구로, 치험례로 더 많이 기록되고 있다. 그 기록에 남아 있는 실존했던 이들의 이름, 삶의 형태는 주목받지 않았고 신체의 특이함 혹은 다름만이 주목받았다. 동시에 인터섹스는 인간 신체의 복잡한 양상이 아니라 잘못된 양태로 지목되었다. 바로 이 ‘차이’는 인터섹스만의 특징인 것처럼 인지되었고 이 차이를 둘러싼 논쟁적 해석 작업을 통해 양성구유(hermaphrodite) 혹은 인터섹스(intersex)라는 범주가 발명된다.
하지만 누군가가 인터섹스라는 사실, 혹은 인터섹스의 사전적 의미를 알았다는 것이 인터섹스와 관련한 어떤 점을 알았다는 의미일까? 인터섹스가 신체와 관련한 특정 지배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으로 구성되는 범주이기도 하다면, 인터섹스는 바로 그 규범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영화 “별 거 아닌 문제”와 “클라이막스 Climax”는 이와 관련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바뱅은 수녀원을 떠나면서 더 이상 앙리에트를 만날 수 없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바뱅은 앙리에트를 걱정하는데 이 걱정은 수녀원에서의 생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 해석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뱅 이후 100년 정도는 지난 뒤의 논의이기는 하지만, 만약 비트랜스 여성 두 명이 레즈비언 관계라고 믿으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인터섹스로 진단받고 이를 통해 남성으로 자신을 다시 설명한다면 이 둘의 관계는 어떻게 바뀔까? 어떤 경우, 그 둘은 여전히 그 관계를 유지하지만, 다른 경우 둘 중 한 명은 레즈비언이라는 범주를 더 중시하며 그 관계를 끝내곤 한다. 이럴 때 범주는 관계나 삶에서 최우선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가치가 될까?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내가 누가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절대적 가치와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일까? 그래서 상대방이 비인터섹스-비트랜스여성이 아니라면 그 동안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헤어지는 것이 레즈비언 범주를 입증하는 최선의 행위일까? 이 질문은 게이일 때도, 이성애자일 때도 마찬가지다. 성적 지향은 젠더를 밑절미 삼아 작동하는 범주인데 인터섹스가 관계의 상상력 혹은 현실에 개입될 때 동성이나 이성과 같은 환상에 기초한 젠더 범주는 위기에 빠진다.
앞서 언급한 소피의 경우는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흔히 성적 관계는 상대의 신체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고, 성적 관계를 맺은 관계라면 상대의 몸의 상태를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그래서 트랜스젠더퀴어나 인터섹스가 겪는 많은 혐오 범죄, 살인 범죄는 성적 관계를 매개로 발생한다. 몸은 그 자체로 젠더의 징표며, 몸을 통해 확인된 젠더는 그 자체로 성적 지향의 토대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피의 남편은 소피와 두 달 가량 성적 관계를 맺는 동안에도 소피에게 음경으로 부를 수 있는 기관이 있음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럴 때 몸을 안다는 것, 몸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신체와 관련한 어떤 지식과 정보를 알려주는 것일까? 어떤 과정을 통해 몸이나 신체 형태를 ‘정확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체의 형태와 관련한 지식이나 앎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인터섹스가 사유의 한 축으로 등장하면, 알고 있다고 믿은 많은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풀비오 발머 비릴리다 감독의 영화 “클라이막스”의 주인공 래리의 행동은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그는 자신이 ‘호모’가 아니라고 주장한다(그 자신의 범주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인터섹스인 클레오와의 관계를 혐오스러운 것이거나 이성애 범주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 태도는 자신의 이성애 범주를 위협의 대상일 수 없는 절대적 범주로 인식한다는 의미는 아닌데, 파티장에선 자신의 범주가 위협받을 수 있음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래리의 행동은 어떤 의미에서 퀴어하고 또 다른 의미에서 범주나 정체성의 정의(definition)에 얽매이지 않는 관계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사실 관계는 정체성 범주를 규정하는 어떤 정의에 맞춰 이뤄지지 않는다. 관계는 정체성 범주를 규정하는 정의를 위반하는(초과하거나 미달하거나 혹은 완전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거나)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인터섹스(그리고 트랜스젠더퀴어)는 기존 정체성 범주를 어떻게 완전히 다른 관계로 만들까? 인터섹스를, 트랜스젠더퀴어를 특정 정의에 맞춘 정체성 범주가 아니라 구체적 관계를 맺는 상대방으로 이해한다면 기존의 이해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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