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이 병인 양하여]는 계속 떠올리는 연극이지만 아직 어떻게 감상을 말해야 할지 못 정한 연극이기도 하다. 한 번만 볼 게 아니라 더 봐야 했나 싶었고. 그저 오늘 관계자(이렇게 표현해도 괜찮나…)와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나만의 해석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남기는 메모(누군가도 비슷한 고민을 했겠지). 이런 메모가 쌓이면 뭐라도 되겠지.
관객과의대화때 다정의 성적 실천이나 다양한 혼란이 세월호와 연결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설명해주면 좋겠다는 질문이 있었다. 그때 들은 답번은 다정의 슬픔과 미안함이 개인적인 것과 함께 사회적 사건으로 확장되는 장이라고 했었다. (내 기억이 얼마 간의 오류를 야기했을 수도…)
그 순간 나는 두 가지 기묘한 순간을 거쳤는데. 하나는 2014년을 거친 세대에게 세월호는 개연성이나 설명이 필요 없는, 삶의 어떤 순간에도 개연성이 기입되는 장이지 않나 했다. 그것을 사회적 사건으로 경험하든 개인적 사건으로 경함하든 상관없이. 다만, 세월호 10주기 추모를 위한 [2024 셰익스피어 소네트] 공연(?)에 참가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 아무런 연고도 인연도 없는 이들이 10년이 지나도 이렇게 애도하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대사가 있었다. 두고두고 곱씹는 말이다. 그 기적은 망각에 저항하는 힘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상의 연대와 용기에 관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다시, 다정이의 무대 장치에는 귓속을 보여주는 듯 창밖을 보여주는 듯한 둥근 창문이 있다. 세월호 집회 에피가 나올 때, 나는 그 창문이 선박에 자주 쓰는 창문처럼 보였다. 혹은 잠수함에서 사용하는 창문 같기도 했다. 기묘했고 슬펐고 호흡이 어렵기도 했다. 오늘 관계자에게 여쭈니, 완전히 이런 의도는 아니었다고 하셨지만 그럼에도 정말 잘 만든 무대 장치였고 어쩌면 저 창문이 다정이의 정동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