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람, 그 생명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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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사이트에 뜨는 제목이야 언제나 ‘선정’적이지만 무슨 내용인가, 하는 궁금함이 드는 것 역시 어쩔 수가 없었다. 기사를 읽어가며 무슨 의미인가 하던 궁금증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으로 변했다. “죽은 조센징보다, 넘어진 말은 괜찮은가”와 같은 리플의 형식에 동의할 수 없지만 일장기퍼스나콘이라고 해서 없앨 수는 없다는 네이버의 정책에 동의하면서도 분위기는 수상쩍다.

“죽은 조센징보다, 넘어진 말은 괜찮은가”라는 리플을 읽으며 이런 식의 소통 방식에서 드러나는 폭력성이 섬뜩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 리플에 담겨있는 지적은 유효하기 때문이다(이 리플을 쓴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김형칠씨가 낙마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와중에 그 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소식을 전해들은 적이 없다. 살아서 어딘가 갇혀 있을까?

“죽은 조센징보다, 넘어진 말은 괜찮은가”라는 리플은 그 문맥상 죽은 사람도 말도 고민하지 않고 있다고 느껴지지만, 루인은 사람의 생명이 말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무엇이 사람의 생명이 말 혹은 다른 생명들보다 중요하게끔 하는가. 그리고 이 리플에 흥분하는 사람들이 지율스님의 단식엔 욕설을 하며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말하는 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뉴스장면을 보다가, 말은 죽지 않은 것 같지만(죽는 순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여주는 방송의 행태는 또 무엇이냐), 사람의 죽음 혹은 안전 여부를 묻고 얘기하는 그 만큼 말이나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의 죽음과 안전 여부를 말할 수 없음이 가지는 의미와 고인의 기사 밑에 말의 안부를 물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질문은 사람의 생명을 ‘말 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님에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까봐 걱정하는 루인의 몸의 반응을 묻고 싶어진다.

한편으로는 깔끔하게 글을 정리하고 “모든 생명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이 글을 맺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는 문제이며 그렇게 단순하게 문제제기하고 말 문제도 아니라고 느낀다. “모든 생명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이 가지는 ‘당위’가 사실은 그저 허울 좋은 소리일 뿐이며 생명이라는 말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기제를 질문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생명으로 여기는가는 너무도 논쟁적인데, 인터넷에서 강아지의 얼굴에 못을 박은 사진엔 벌 떼 같이 달려들어 그렇게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개고기” 논쟁이 벌어지면 “그것은 우리의 전통”이라고 옹호한다. 무엇이 생명이고 그래서 함께 살아갈 존재인가는 이런 순간에 모순처럼 충돌하는데, 강아지는 중요하고 그렇게 한 사람은 죽여도 되는지, 그럼에도 “개고기”의 개는 이미 “고기”일 뿐 생명이 아니기에 단지 먹는 음식일 뿐인지. 좀더 얘기하면 유영철은 사형으로 끝낼 흉악범일 뿐인지,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닌지. 지율스님의 단식은 환경운동이라기 보다는 다이어트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종종 차라리 죽어버리라는 리플들이 있는데, 이럴 때 생명이라는 것,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구를 생명이 있는 인간으로 누구를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드는가. 무엇이 이렇게 구분할 수 있게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메달을 딴다면 “국위선양”을 할 사람은 중요하고, 경제발전을 “방해”하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인가. 기수와 같이 생활했을 말의 안부 역시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관련한 질문 자체를 할 수 없게 하는 이 분위기가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지.

혹은, (채식을 해야 한다란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강아지, 고양이 혹은 다른 동물들, 식물들)과 함께 살면서도 육식이나 채식을 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선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동시에 하고 싶다. 함께 사는 생명과 식탁 위에 있는 “음식”(혹은 생명)을 전혀 별개로 여길 수 있게 하는 그것은 무엇인지.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이 둘은 같고 그래서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혹스러운 논리를 펴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사이에 상당한 간극을 만들어 내고 그래서 전혀 별개의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끔 하는 기재는 무엇인지를 묻고 싶다. 사람의 생명만큼이나 사람이 아닌 존재의 생명 역시 말해야 하는 순간에, 돌연 말할 수 없게 하는 벽을 만난다는 느낌.

말해야 하는 순간에 말할 수 없게 하는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글이 자꾸만 길어진다….

#덧붙이면, 일장기퍼스나콘을 달고 “죽은 조센징보다, 넘어진 말은 괜찮은가”라는 리플을 쓴 사람과 이런 댓글을 일본에 대한 혐오로 곧장 연결시키는 사람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둘 다 일본에 대한 열등감으로 가득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본을 통해서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없다.

10 thoughts on “말과 사람, 그 생명의 무게

  1. 생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넘 좋아요. 내방에 화분이 3개 있는데 한데 모아놓으니 옹기종기 더잘 사는것 같아요. 같이 붙어있으면 서로 더 힘을 받는가봐요…건강조심하세요!

    1. 루인도 학교 연구실에 허브 둘과 같이 살아요. 헤헤. 근데 둘을 붙여 놓으니까, 더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서로 막 친밀감도 표시하고요. 헤헤

  2. 루인..생태주의, 생태학을 공부하면서 인간중심주의(Antropocentrism)에 대해서 저도 고민한적이 많았어요. 메타윤리학, 환경윤리학을 가르치던 교수가 심지어 그런말을 하더라구요. “지리산의 반달곰이 우리를 위해서 애쓰지 않는데 뭣하러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애써야 하나” 불교생태학 교수는 더 가관이였는데..”돼지들은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DNA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그들을 사육함으로써 그들의 종족번식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다”

    1. 그 교수들…!!!!!!!!!!!!!!!!!!!!!!!!!! ㅠ_ㅠ
      정말 자신이 뭘 가르치고 있는지 모른단 말인가요!

  3. 나중에 언젠가 루인과 이런 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해요. 암에 걸렸을때 암세포를 죽이는 것은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비난받아야 하는가…하는 그런 황당한 문제들..가끔 인간들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반인간주의, 인간혐오에까지 다다르지만..그게 또한 생태계를 위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근본주의적인 생각까지 미치지만…어찌되었건 루인의 말대로 인간들만이 지구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 무서워져요..

  4. 개고기는.. 앞서 루인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를 생명으로.. 누구를 죽여도 되는 존재로’와 비슷한 범주라고 생각해요. 다른 생명은 죽여도되고 개만은 안 된다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잖아요. (루인님이 그런 주장을 한 다는 것이 아니라.)

    메리 로취의 스티프(stiff)에서 보면.. 사람들은 토막난, 조각난 부위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반응을 보인다는 내용이 있어요. 통채로 보면 부담스러워하지만.. 조각난 것에 대해서는 매우 무감각각한.. 생각해보면 통바베큐라든지.. 기타 구이 요리를 생각해 볼때 꼭 그런것만은 아닌 것 같지만요. ㅋㄷ

    1. 조각난 몸에 무감각하다는 말은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자신은 “고기로 정체화하는 것만 안 먹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은 햄이나 스팸 같은 건 다 먹더라는;;; 조각난 몸과 가공한 몸은 결국 같은 거라, 불현 듯 떠올랐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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