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운세 그리고 구성

01
“해부학이 운명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성별/젠더 구분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이러한 구분과 이런 구분에 따른 억압을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다. 이 말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해부학은 운명이 아니다”란 방식이었다. 하지만 “해부학은 운명이다”란 말이나 “해부학은 운명이 아니다”란 말이나 결국 같은 말이다. 둘 다 해부학과 운명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해부학은 과학적인 사실로서 변할 수 없고, 운명 역시 타고난 것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니 “해부학은 운명이다”라는 말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은 “해부학은 운명이다”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사용하는 “해부학”과 “운명”이 내가 사용하는 “해부학”과 “운명”의 의미와 어떻게 다른지 경합토록 하는 것이다. 과학은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라 과학자가 살고 있는 사회 문화적인 맥락에서 해석한 내용이고 운명 역시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 내용은 “채식이 중산층 특권이라고?“라는 글에도 있는 내용.)

02
요즘 들어 운세에 예민해지고 있다. 고3 때도 듣지 않았던 운세를 올해 들어선 아주 작은 한 마디까지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루인은 한 편으론, 운명론자이고 그래서 이 운명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가 항상 고민이다.

루인은 금(金)의 아이임에도 흙이 4개나 있어서, 이 흙을 모두 파내야만 금을 구할 수 있다. 한때 천재에 혹했던 루인은 이런 대기만성 형 운명을 저주하기도 했다. 사주팔자로는 금의 아이지만 네 개의 흙에 묻혀 있기에 그 흙들을 파내야만 금을 구할 수 있는 운명. 이것은 분명 루인의 운명이다. 이것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이제 금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흙이 네 개이기에 포기할 것인가가 남은 과제이다. 대충 150살까지 산다고 치고 죽을 때까지 흙을 파서 금을 구할 지 말 지는 루인의 몫이다. 그렇기에 운명이라는 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운명이라는 건 반드시 그렇게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배웠고, 루인의 손금은 의지와 노력을 통해 운명을 만들어 간다고 나와 있다.

03
루인의 장점 중 하나는, 모든 사업을 없애는 것이다. -_-;; 그러니까 누군가 무얼 하라고 시킨다고 해서 반드시 하는 건 아니고 귀찮으면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듯이 무효로 만드는 것. 조교를 하면서 그렇게 없앤 사업들이 많다. 운세가 말하는 내용도 이렇게 하면 그만이다. 작년의 운세가 그랬고 그 운세에 대한 루인의 대처가 그랬다.

04
무료 인터넷 운세에 따르면 2월 달 운세가 최악이었다. 1월 말부터 시작해서 2월 중순 즈음까지가 최악이라니. 한동안 이 운명을 피할 길이 없다고 느끼며 우울해 했다. 만성우울이니 별로 신경도 안 쓰이고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어쨌거나 이번엔 좀 심각했다. 그렇잖아도 일 년 운세에 민감한 상황인데 최악의 내용이라니.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그저 조용히 숨어 지내는 것 외엔 별 다른 방책이 없어 보이는 운세라니.

며칠 전부터 이 운세 내용 때문에(그것도 무료로 한 내용임에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지금의, 올해의 몸이 이런 상태다) 주구장창 우울해 하며 어떻게 지내야 할지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래, 어차피 운명은, 운세는 그렇다고 하니 그걸 피하거나 슬쩍 가지고 놀면 되겠구나.

운세라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이 비록 주어져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될 수도 있으니 좀 더 신경 쓰라는 정도의 의미라는 것을 배운 건, 고등학교 때 읽은 주역과 관련한 책을 통해서다. 주역과 관련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그 책에서 유일하게 지금의 몸에 남아 있는 내용은, 인생은 점의 내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점의 내용을 통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

그전까지는 운명이라는 것, 일 년 운세라는 걸 전혀 안 믿고 듣지도 않다가 듣기 시작한 계기가 이 한 마디였다. 일 년의 운명은 이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으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라는 식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루인의 인생은 끝없는 흙 파기의 연속이고 이런 과정 자체가 루인의 인생이다. 그러니 금을 발견하고 발견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금이 4개의 흙 속에 파묻혀 있다는 사주팔자의 말은, 그 금을 구해야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금을 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일정한 패턴 속에서, 변화를 모색하면서도 여전한 인생. 그것이 루인이 살아갈 방법이다.

이걸 깨달았다.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인데, 깨달았다, 라는 말을 쓴다.

05
아무튼 운세 내용을 염두에 두고, 가방에 책 두 권을 챙겼다. 읽을 일이 생길지 안 생길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놀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3 thoughts on “운명, 운세 그리고 구성

  1. 쑥의 손금은 생명선이 좀 짧은데 – 말년에 복이 많을거라 하더라고요, 복은 많으나 다 누리지 못할; 쑥의 친구 왈 – 하루에 1분씩만 손톱으로 눌러서 생명선을 늘려!! ㅋㅋ

    1. 오오 그거 괜찮아요. 흐흐흐. 그러고보니 언젠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칼로 손금을 세긴 사람의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바뀌었다고 들은 것 같아요. 확실하진 않지만;;;
      그나저나 “복은 많으나 다 누리지 못 한다”고 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과는 말년의 시기가 다른 게 아닐까요? … 하고 말하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 쿨럭. 죄송해요;;;

  2. 핑백: Run To 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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