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의 쾌”라고 프로이트옹은 말한 적 있다. 켁. 치유 혹은 치료를 계속해서 미루며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그것을 지속하고 이런 과정에서 쾌락을 느낀다는 뜻이라고, 날림으로 얘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다른 사람에겐 불쾌이지만 자신에겐 쾌락이니 불쾌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자신에게(도) 불쾌이기에 쾌락인 셈이다. 그래서 “불쾌의 쾌”인 것이고. 이와 관련한 예로, 프로이트옹은 아이들이 대변을 참으며, 그렇게 참는 과정을 통해 쾌락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우울증이, 사실은 최고의 쾌락임을 깨달았다. “우울해~!”라는 외침은 한편으론 “즐거워”라고 말하는 의미라는 것도 아울러 깨달았다.
키워드: [짝사랑], [짝사랑이라는 섹슈얼리티]
한 아이가 대변을 참으며 [불쾌의 쾌]를 느끼다
성장했더랬죠-
그 아이의 이름은 까뮈고, 그 애는 지금 만성변비로
고생한다죠-
아앗… 그런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