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무

언젠간 이 멍청함에 짓눌려서 짜부라지고 말거야. 반추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재수 없는 인간인지 너무도 잘 알게 돼.

아침마다 학교 오는 길, 학교 안에서 만나는 그 나무들과 인사할 때마다, 오래 전에 읽은 [이웃집 토토로]가 떠올라. 몇 해 전, 이래저래 치이고 결국 어느 골목 한 곳에서 주저앉으려 했던 때였어. 그저 시간을 견디겠다며, 학교 영상실로 가서 [이웃집 토토로]를 빌렸어. 왜 선택했는지는 지금으로서야 이해할 수 없지만(그땐 영화를 거의 안 봤을 뿐 아니라 애니는 더더욱 안 봤는데) 아무려나, 그렇게 그 애니를 보다가…. 이 애니를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사 간 집에 있는 커다란 나무와 관련한 얘기. 오랜 세월을 견딘 나무라고 했던가. 그 한 마디. 전체적인 흐름과는 아무 상관없을 수도 있는 그 한 마디.

그 시절엔 “나무”란 별칭을 사용하고 있었어. 그 시절이 지나면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지만(그래서 나무님을 만났을 땐 별칭만으로도 반가웠어). 나무, 오랜 세월을 살아온 혹은 견딘 나무. 그 한 마디가 그 동안 겪고 있던 모든 감정들을 보듬어 주고 위로해 주는 느낌이었어. 그 이후, 이 애니는 루인에게 각별한 느낌으로 남아 있어. (반드시 이런 이유로 루인의 필통이 고양이버스인 건 아니지만… 흐흐)

별칭은 바뀌었지만, 그때도 지금도 바뀌지 않고 있는 바람 하나. 사후 세계까지는 아니어도 윤회는 믿는 편이야. 그래서 인연이란 말도 믿는 편이고. 그리고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 선택할 수 있다면, 나무로 태어나고 싶어. 그래서 최근 ㅅㅇ님이 알려준 “나무를 심는 사람”을 보면서도 나무에 이입했는지도 몰라(고마워요!). 나무. 나무.

만약 죽어, 화장가루를 나무 아래 뿌린다면, 나무가 될 수 있을까? 혹은 화장가루를 땅에 파묻고 그 위에 나무를 심는다면 나무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건 서로를 죽이는 일이지. 화장가루가 얼마나 안 좋은데.

아침마다 나무들에게 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해. 그때에야 비로소 하루를 시작하지. 매일 조금씩 변하는 나무를 느끼며, 변화란 건 매순간 눈치 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 거란 걸 배우고 있어. 묵묵히 세월을 견디면서 지내다보면 어느 순간 달라진 모습을 만나겠지.

그러면서도… 예전엔 자학과 자뻑의 무한반복이었는데(자학이나 자뻑이나 결국 같은 거긴 하지만) 요즘은 자학의 무한변주 속에서 살고 있어. 결국 이런 변주가 이 상황을 견디는 힘이란 걸 배우고 있지. 이런 변주를 사랑하고. 그런데, 어쩌나, 오늘이 왔어. 벌써 오늘이야. 몇 해 동안, 오늘은 글을 쓰지 않으며 기억했지만, 이젠 글을 쓰며 기억하려고 해. 글을 쓰건 쓰지 않건 마찬가지야. 어떤 형식으로 기억하느냐의 차이일 뿐, 결국 어떤 형태로건 기록하고 있는 걸.

아무려나, 이젠….

8 thoughts on “언젠가: 나무

  1. 루인님, 잘 지내시죠? 요즘 바쁜 생활 때문에 컴퓨터와 놀 시간이 없어서 여기도 통 못 들어왔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왠지 자꾸 여기에 놀러오고 싶어서 들어와봤는데, 이런 글이 있지 뭐예요! 아아 그래서 이렇게 들어오고 싶었던 걸까요? 아무튼 너무너무 반가워서 격한 마음에 리플을!! 이웃집 토토로, 아침마다 나무한테 인사하기, 나무로 태어나고 싶은 꿈 등등 너무 제 생활과 똑같아서-_- 놀랐지 뭐예요!!
    사실 루인님과 비슷한 점이 많아 (물론 저 혼자 생각하는 거지만!!) 혼자 막 놀랄 때가 있어요;;;;;; 호호
    그러고보니 예전에 임옥희님(?)한테 싸인 받았던 책을 이제서야 읽으려고 뒤적거리고 있는데, 싸인에 ‘우리 나무가 되는 꿈 꼭 이루어요”라고 씌어 있어서 또 놀랐지 뭐예요!!
    하하, 정말 정말 반가워서 이렇게 이상한 리플을 남기고…
    잘 지내세요. 루인님 블로그 자주 들를께요^^ 안녕,

    1. 꺄악~~!!!
      정말 반가워요! 이 글을 쓰면서, 혹시나 읽으실까 했는데, 정말 불렀나 봐요. 헤헤 🙂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 때마다, 꺅꺅, 하면서 놀라고 즐거워 해요. 헤헤.
      혹시, 배수아의 [당나귀들]과 [홀], 쿳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읽어 보셨나요? 채식과 관련해서 정말 흥미롭더라고요. 참, 오수연의 [부엌]도요.

  2. 저도 나무 좋아요!
    근데 나무로 태어나시면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요?;

    1. 헤헤.
      루인의 경우, 워낙 한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인간인 몸으로 지낼 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레기도 해요. 🙂

  3. 오;; 화장 가루가 안 좋구나;; 화장 하면 사실 숲이나 나무 바다 이런 데 뿌려도 좋겠다 그런 생각 했었는데;; 안되겠네요. =_=

    1. 화장가루가 자연을 오염시킨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래서 화장가루를 뿌리는 건, 불법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고보면 이 나라가 언제부터 환경을 이렇게 고민했다고;;;) 풍장이나 관 없이 땅에 묻는 건 어떨지 모르겠어요… 흐흐

  4. 저도 사실 나무입니다.

    나 = 키드 / 무 = 키드 다리;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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