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선명하다.
길을 걸을 때면 종종 아무 문장이나 만든다. “눈을 감으면 눈이 분시다.” 아냐, 아냐. “감은 눈 사이로 붉은 물결이 인다.” “붉게 핀 꽃이 시들며, 팔에 흔적을 남긴다.” “팔에 핀 붉은 꽃의 흔적들이, 부끄럽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종종 부끄럽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선명할 때마다, 숨고 싶다.” 하지만 부끄러운 일은 아닌데. 괜히 팔을 숨긴다. 몸에 새겨진 흔적들. 누구나 자기만의 방법으로 세월을 견딘다. 시간을 견디며 몸에 새긴 흔적들, 세월을 견뎠음을 알려주는 흔적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은 세월 속에 색이 바래지만, 그렇다고 아주 사라지진 않는다.
허수경의 시집에서였나, 공후인이란 악기는 악기의 형태는 남아 있지만 연주법은 남아 있지 않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은 남아 있는데, 왜 그랬는지, 이제는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왜.
언제나 그렇듯,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못 하기 마련이다. 에둘러, 에둘러 몇 번을 에둘러 표현을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한 말이 자꾸만 몸에서 맴돌면,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을 바라본다. 그러면 다 잊는다. 아니,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아침에 학교에 왔다는 사실이 까마득한 옛날 같다. 그러니, 지금까지 살아 왔듯, 계속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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