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랜 만에 사무실 컴퓨터를 켜지 않고 책을 읽다가 저녁 즈음, 풀어야 할 녹취가 있어 컴퓨터를 켰다. 30분 분량이니 2시간 넘는 시간을 들여 녹취를 풀고 나서, 책을 읽다가 표시한 참고문헌을 한 편 찾았다. 뭔가 상당히 괜찮은 글일 것 같진 않았지만, “트랜스섹슈얼은 혁명의 최전선인가, 혹은 남성과 여성의 전형을 강화하는가?”란 부재를 읽곤 한 번 읽고 싶었다. 너무 진부한 질문 같으면서도 너무 자주 접하는 질문이라, 이 사람은 어떻게 풀어 갔을까가 궁금했다. 물론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와 관련 있는 글이란 점도 이 글을 찾게 하는데 한 몫 했다.
이 글: Richard M. Levine “Crossing the Line: Are transsexuals at the forefront of a revolution — or just reinforcing old stereotypes about men and women?“
당장 읽을 시간이 될지는 몰라도, 식당에 가서 밥 먹을 때 읽기엔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며 몇 가지 자료를 더 찾다가 뜬금없이 조세핀 호(Josephine Ho)의 자료가 걸려들었다. (아, 게일 러빈의 “Of catamites and kings”가 실린 1992년도 책을 구할 수가 없어 혹시나 워드나 PDF로 구할 수 있을까 해서 찾다가 조세핀 호가 걸렸구나.) 그렇게 해서 조세핀 호의 홈페이지(영어 버전은 여기로)로 갔다. 몇 가지 자료를 인쇄하면서 호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둔 글 목록을 훑어보다가 2003년에 [Transgender]란 책을 편집했음을 알았다. 오오. 대만에선 2003년에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책이 나왔다는 의미고, 그렇다면 그 전에 상당한 운동이나 담론 논쟁이 있었다는 의미일까? 아님 그저 책을 먼저 냈다는 의미일까? 책 제목이 영어여서 (영어 버전 홈페이지를 읽고 있다는 걸 깜빡하고) 영어로 책을 냈나 하는 기대로 책을 구하겠다는 기대로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 아마존으로는 검색이 안 되어서 어떻게 구할까를 고심하다, 호의 영어 버전이 아닌 중국어(대만어?) 버전의 홈에 갔더니, 서지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겼다.
책 제목은 《跨性別》. (세부 목차는 여기로) 우선 책 제목 혹은 대만에서 트랜스젠더를 부르는 방식이 재밌다고 느꼈다. “과성별” 즉, ‘성별을 넘어서는’ 혹은 ‘성별을 가로지르는’ 정도의 의미. 한국에선 종종 “성전환자”라고 부르기도 하니, 미묘하게 의미가 다르다. 아무려나 여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세부목차를 확인했을 때부터, 좌절. 위에 링크한 곳을 확인하면 알 수 있듯, 모두 한자다. 물론 페이지를 한참 내려가면 영어로 적어둔 걸 확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뿐. 이 지점에서 기분이 기묘했다.
루인의 경우, 한국어를 제외하고, 영어가 아니면 읽을 수도 소통할 수도 없는 상황. 한국에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나라의 언어도 영어를 매개하지 않으면 읽을 수도 없고 소통할 수도 없는 상황. 그래서 은근히 《跨性別》이 영어로 쓴 책이길 기대했던 상황. 문득 이 상황이 슬프다고 느꼈다. 아시아라는 지리적인 공간에 산다고 해서 반드시 아시아라는 지리적 공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고, 인접 국가라고 해서 반드시 연대를 할 수 있거나 소통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일전에 [트랜스 가족]이었나? 독일 감독과 얘기를 할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도 사람들은 독일어나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트랜스젠더 운동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그 역사는 대충이나마 읊을 수 있지만 일본이나 중국, 대만, 홍콩의 상황은 전혀 모르고, 비록 몇몇 사이트와 몇 해 전에 나온 [Inter-Asia Culture Studies]의 특집이 홍콩과 대만의 트랜스젠더 혹은 트랜스-섹슈얼리티와 관련한 내용이긴 하지만, 루인의 참고문헌은 절대다수가 미국의 특정집단이 생산한 내용들이었다. 아시아라는 지역에 살지만, 아시아와 가장 무관하게 살고 있는 건가 하는 반성을 하고 있다. 물론 ‘탈식민’이라는 것이 “한국” 혹은 “아시아”를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지금 루인의 상황은 좀 너무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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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에서 생산한 트랜스젠더 관련 자료를 모아두고 있는 곳은 Transgender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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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파인버그(Leslie Feinberg)를 소개하면서 적은 말이 “美國著名跨性別運動人士及作家”(미국저명과성별운동인사급작가: 미국의 유명한 트랜스젠더 운동가 및 작가)인데, 이 말을 읽으면서 왠지 재밌다고 느꼈다. 흐흐. 뭐, 그렇다고 웃길 만한 내용은 아닌데도 그냥 낯설다는 느낌이랄까. 이 낯설음이 지금 고민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루인씨, 저한테 루빈 북챕터 피디에프로 있어요. 근데 기대만은 못해요. 어쨌든 비공개 덧글로 메일 남겨주시면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보내줘서 고마워요! 잘 읽을 게요 🙂
참, 그리고 참고문헌의 미국 편향은 어느 분야에서나 있는 일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지만, 트랜스 문헌의 경우에는 트랜스 연구의 경계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또 좌우가 되는 문제 같아요. “트랜스섹슈얼”이라는 정체성/주체의 명명 자체가 특정 역사적/지역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보니, 예컨대 그런 소위 근대적 ‘트랜스’와 다른 의미의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섞여 있기도 하고, 호르몬/수술 등의 이용 방식에 차이가 나는) 인도네시아의 와리아라든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카토이, 히드라 같은 주체들은 ‘트랜스 연구’로 잘 포함되지 않죠. 저는 그걸 넓혀서 보면서 그 경계 범주 자체를 의문시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Tom Boellstorff (인도네시아) 나 Kulick (브라질), Manalansan (필리핀), Sinnott (태국) 같은 작업들이요.
정말, 트랜스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참고문헌부터 연구의 성격까지 참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종종 미국의 맥락으로 다른 지역의 존재들을 트랜스젠더로 (선별적으로) 소환하고 환원하는 경향도 있어 좀 불편하기도 하더라고요. H님 말처럼, 이런 식의 범주경계 자체를 얘기하고 논의하는 작업은 정말 중요하다고 느껴요.
참, 글고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작위적인 구분, 본질주의와 구성주의의 이분법 논의도 갈 수록 한계를 만나는 것 같아요. 스트라이커의 경우엔, 트랜스연구가 본질주의와 구성주의의 이분법 자체를 문제시하고 이런 식으로 구분할 수 없음을 얘기한다고 말하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