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거의 일주일 전부터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를 속으로 외치고 있는 요즘이다. 사실 이럴 때 먹고 싶은 음식은, 바로 그 음식을 지칭하기보다는 그 음식이 주는 어떤 느낌 혹은 그런 맛의 음식(즉, 짜고 매운 찌개)을 먹고 싶다는 바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어디 가서 사 먹을 곳이 없다. 김치찌개에 들어가는 고기 때문이 아니라,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를 사용하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채식식당”을 표방하는 곳이 아니면 젓갈을 사용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김치를 먹지 않은지 몇 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너무 먹고 싶다는 바람이 몸에 차오를 때, 특히나 비라도 내고 어떤 얼큰함이 그리우면 더 간절하게 느낀다. “김치찌개~~~” 흐흐. 그럼, 또, 속으로 중얼거린다, “오늘만 채식을 그만두고 사 먹을까?”라고. 크크크. “내일부터 채식하지, 뭐”, 라고 말할 수도 있고, ‘육식하는 채식주의(비건)란 상상력’으로 채식을 해석하려하기에, 김치찌개를 못 먹을 이유는 또 뭔가 싶기도 하다.
1994년 가을 이래로 채식을 계속해서 할 수 있었던 건 “의지가 굳건해서”가 아니다. 언제부터 채식을 했는지 얘기할 일이 있을 때면, 거의 항상 “의지가 정말 굳건하다”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해다. 어느 시기까지는 의지로 버텼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에 와선 “의지”가 아니라 지금까지 해온 습관 때문이다. 채식을 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지금까지 해왔으니 내일도 할 가능성이 높을 뿐. 그러니 “나 이제부터 채식 안 해!”라고 자신에게 선언한다고 해서, 식습관이 바뀔 가능성은 별로 없다. 무엇보다도 몸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가끔 루인도 모르게, 그동안 먹지 않던 “음식”을 먹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면 어김없이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니, “오늘 김치찌개 먹고, 내일부터 다시 채식하지, 뭐, 흐흐”라고 중얼거린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02
며칠 째, 01번에 쓴 내용의 고민을 했다. 오늘도 비가 내리고, 점심 겸 저녁으로 무얼 먹을까를 고민하다가 김치찌개를 떠올렸다. 무얼 먹을지 결정하지 않은 상태로 연구실을 나섰을 때, 때마침 비가 그친 길을 걷다가, “‘채식을 한다’는 선언은 가능해도 실제 가능한 행동인가”란 의문이 들었다. 특히나 비건(“비건”을 비롯해 채식주의와 관련한 코미디 같은 분류가 궁금하면 여기로)이라는 실천이 정말 가능한 행동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젓갈을 사용하지 않는 김치라고 해서, 유산균이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닐 텐데, 그럼 젓갈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유산균은 있는 김치를 먹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유산균은 비록 “고기”라고 분류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채소”라고 분류하는 존재도 아닌데 비건에게 가능할까? 어쨌거나 “동물”에게서 얻은 건 아니란 점에서 무방할까? 유전자음식을 반대한다는 코미디가 있긴 하지만, 아무려나 “품종개량” 혹은 “병충해방지”란 명목으로 토마토에 어느 생선의 유전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토마토피쉬라고 부르던가? 어떤 명칭이 있었는데 기억이… -_-;;). 그렇다면 생선유전자와 함께 살아가는 이 토마토는 채소일까, 생선일까? 이처럼 실험실을 통한 유전자 이식이 아니어도, 자연 상태에서도 유전자 이식은 무수하게 발생하고 있는데, 표면적으로 채소나 과일 혹은 동물이나 생선으로 여겨진다고 해서 그렇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여기서 트랜스라고 얘기하는 루인의 경험들이 겹쳐지기도.) 이것은 분명하게 동물, 이것은 분명하게 식물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며, 이런 종(species)들 간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자 하는 맥락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서, 종들은 섞이지 않으며, 분명하게 구분할 있다는 믿음이 유지될까?
이런 의문들 속에서, 어쩌면 채식주의자 혹은 비건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야 말로, 종들 간의 “순결한 분리주의자”들이 아닐는지. 종들은 결코 섞일 수 없다고, 동물엔 식물의 유전자나 흔적이 결코 없고, 식물엔 동물의 유전자나 흔적이 결코 없으며, 어떤 경우에도 섞여선 안 되고, 종들을 섞는 행위는 인간에게 위험해서 불매운동이라도 해야 할 일이라는 엄청난 환상이, 채식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아닐는지. 이런 의심들이 들었다. “자연”이라고 불리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괜찮거나 그럴 수 있지만, “실험실”이라고 불리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절대 안 될 일이라고 믿음의 토대는 어떻게 구성되는 걸까? 죽은 동물의 시체를 먹고 자란 사과를 동물과 분리해서 얘기할 수 없음에도, 비건을 “동물로부터 얻은 모든 것을 배척하는 완전 채식주의“라고 정의(definition)한다면, 이는 동물/식물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한 실천 혹은 정의일 수밖에 없지 않나.
채식을 실천하는 개개인들이 이런 단순한 구분과 정의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채식” 혹은 “육식을 하지 않음”이란 상상력의 토대엔 종들 간의 분명한 구분, 그리고 개별 종들은 결코 섞이지 않는 존재란 상상력에 근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여전히 트랜스로 설명할 때의 루인을 떠올리고 있다.)
03
물론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여전히 지금까지 먹어온 방식의 식사가 가능한 식당에 가고,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주문한다. 그러면서도 채식과 관련한 의심을 계속한다. 종들 간의 “분리주의”, “식물은 마치 생명이 아닌가요?”란 질문에 분개하는 일부 채식주의자들의 반응들, 등등. 재밌게도, 이런 의심이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을 더 강화하고 있다는 의심이 드는 건 왜일까? 흐흐흐. -_-;;
[#M_ 근데.. | 흐흐.. |
왠지 이 글이, 내일 “김치찌개” 먹으러 가기 위한 변명으로 쓴 글이라는 느낌은 루인 만의 착각? 낄낄낄.
그렇다고 정말 가지는 않겠지만.←이 말이 더 의심스럽다? 케케 _M#]
[#M_ ++.. | –.. |
그러고 보니 쓰겠다고 하고 안 쓰고 있는 글이 한 편 있네. -_-;;_M#]
의식적으로 고기를 그만 먹겠다고 처음 생각한 건 6년전쯤 되었을 거에요. 그 이후에 완전히 비건이던 시기, 해산물은 먹던 때, 현장연구를 할 때 누가 집에서 대접한다면 고기도 먹던 때를 오가다가, 일년 전쯤 채식주의에 완전히 질려버린 적이 있었어요. 비건인 미국인 룸메이트와 2년간 생활을 했었는데 결국은 그 친구의 심해지는 정신적 문제, 결벽증, 그리고 그걸 같이 사는 내 탓으로 돌리는 것, 그리고 인종차별주의가 겹쳐서 결국 계약기간보다 빨리 나와서 친구집을 얼마간 전전해야 했는데, 나도 그 기간 동안 거의 비건으로 살았지만, 그 친구의 채식주의는 정말 자기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먹을 것 밖에 없다는 그런 식의 순결주의, 게다가 채식인이 아닌 사람들을 드러내놓고 내려다보는 태도가 몇 가지 개인적 사건들과 겹쳐서 완전히 질려버렸었죠. 그 후에 반작용으로 저는 고기를 다시 좀 먹다가 요즘은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에요. 그냥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적어봤어요.
루인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과 채식과 관련한 얘기를 할 때면, H님이 들려준 얘기와 비슷하게 “채식주의자들의 도덕적 우월감”이나 “채식주의자로 살아기 어려움”에 대한 경험을 전해 듣곤 해요. 그런 얘길 들을 때마다 함께 지내는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지도 못하면 채식이 웬 말인가 싶기도 해요. 그래서 어떤 땐, 정말이지 채식이 “정치적 올바름”을 보증하는 신용장인가 싶기도 해서, 뜨악할 때도 있고요.
그래서 어떤 채식주의자들 혹은 채식모임은,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더 불편할 때가 있어요.
와 놀라운게, 몇년 전에 과외 하던 학생이 저더러 김치는 어떻게 먹냐고 해서 젓갈 안 넣고 담궈 먹는다고 대답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학생이 ‘유산균’도 식물이예요? 라고 반응해서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생각은 거의 하지 않고 살았는데 그 질문을 계기로 위의 고민들 (종 간의 분리주의^^) 이 생기더라구요. 전 지금은 관성의 법칙 때문에 채식한다고 대답하는걸요. 후후. 그리고 “식물은 생명이 아닌가요”라는 채식주의자들을 당황케하는 질문들은 그 질문이 불쾌할 수밖에 없는 맥락이 있는 것 같아요.
그 학생 너무 똑똑해요! 흐흐.
정말 채식을 계속할 수 있는 건, 관성인 거 같아요. 신념이라기보다는 몸이 익숙하게 반응하는 방식처럼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