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대한 의문

제 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13.10:30 아트레온1관 2층W-7, [침묵에 대한 의문]

지난번에 쓴 [침묵에 대한 의문]의 후기는 여기서 참고.

너무 좋아서 다시 찾았다. 그리고 다시 열광했다. 이렇게 유쾌하다니.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묘한 ‘상처’가 생겼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일행에게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같이 온 사람은 뭔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루인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 “배운 사람들이나 좋아하는 영화”라고. 이 말을 듣고 순간, 분개하고 ‘상처’로 다가왔지만 뭔가 들킨 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영화는 언어를 질문하고 있고 침묵의 의미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하다보면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는데도 서로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하고 있는 느낌이 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말하고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기에 사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별로 손해 볼 것 없다. 이때 저항자는 상대가 이해할 때까지 열심히 말해야 할까? 이 영화는 “아하하하하하”하며 소리 내어 웃으며 법정을 비웃는다(판사는 법정모독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이 유쾌한 지점이다.

그런데 루인 앞을 지나간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모른다는 것”, “배운 사람이나 좋아”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 영화가 페미니즘/여성학 혹은 이른바 “타자”로 불리는 이반queer/트랜스처럼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모색하며 책을 읽는 사람들이나 좋아할 영화일까. 고민 없음을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엘리트주의가 아닐까. 흔히 페미니즘과 여성학을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들을 내용이라고 비판하지만, 정희진 선생님의 말처럼 페미니즘 언어를 접하며 쾌락에 빠지는 사람은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른바 저학력 비정규직 “아줌마”들이다.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기존의 ‘이성애’ ‘남성’ 언어에 익숙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이다. 채식(주의)자라고 루인의 위치를 밝혔을 때, “베지테리언도 여러 종류가 있지”라고 말하면서 아는 체 하는,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들보다 “베지테리언”이 무슨 말인지 몰라 “채소만 먹는 사람”으로 바꿔 말해야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관계 맺고 소통할 지를 한 번에 이해하는 식당 주인을 알고 있다. 대학 혹은 대학원 공부를 했다는 것이 “잘 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지나가듯 한 말에 분개했지만 묘하게, 들키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이었을까. 지적 컴플렉스? 루인의 무식이 주는 열등감? 언어의 빈약함이 주는 갈증? 그 말을 듣고 내내 우울했다. 그 말을 듣고 분개하는 루인이 더 이상한 건 아닐 런지. 어쩌면 루인도 그 사람이 한 말과 비슷한 몸앓이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부정할 자신이 없다. 무엇일까.

어떤 사람의 말에 화를 낸다는 건, 상대의 폭력에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는 의미가 있는가 하면, 상대와 자신을 동일한 위치에 두는 탈맥락화의 과정 때문인 경우도 있다. 루인은 종종 말투가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라는 말을 듣고 글이 (인터넷 게시판 글쓰기의 기준에선) 길다는 얘길 듣는다. 물론 상대는 비난이나 비판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다르다”는 느낌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한동안 열심히 해명하려고 애썼다. 이랑의 한 친구는 이와 비슷한 말을 듣고 화가 났었다고 한다. 화가 나진 않았지만 억울했고 상대가 한 말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래도 싫었다. 하지만, 나중에야 깨달았다. 글이 짧은 게 문제가 아니냐고. 루인은 시간 여유만 넉넉하다면 글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사용하는 문장이나 언어를 새로이 해석하거나 “해명”하는 작업들 때문이다. 글이든 말이든 하기 시작하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 만큼 루인에겐 기존의 언어를 그냥 사용하기엔 불편한 지점들이 너무도 많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루인이 쓰는 글이 길어진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루인에게 글이 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해명하려고 하는 건, 상대와 루인의 위치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루인은 지난 학기, 한 달 알바비 135,000원을 주는 학부 조교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한 달 용돈도 안 되는 비용이란 식으로 말한 것에 화가 났었다. 루인에게 이 돈은 중요한 생계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낼 필요가 있었을까. 자치하는 루인과 서울에 집이 있는 그와의 계급과 환경의 맥락이 다른데. 화를 낸다는 건, 그 사람과 루인의 위치가 같다고 가정해서다. 그런 반응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여전히 그때그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의 말이 왜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걸까. 무언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떤 지점이 들킨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을까.

필름 인사이드 특별 강연

제 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12.17:00 아트레온 4관, 1층 K-5 [필름 인사이드 특별 강연]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수업이 아니었다면 이 강연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화요일 수업을 휴강하는 대신 이 강연을 듣기로 했고 선생님께서 표를 끊어 주셨다.

이 강연의 재밌는 점은, 비디오카메라가 페미니즘 운동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 1960년대 당시, 페미니즘 사상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영화가 좋을 거라고 했지만 영화를 제작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에 들고 다닐 수 있는 비디오카메라가 나왔고 이를 통해 비디오카메라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큐멘터리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발표자인, 프랑스에 있는 시몬느 드 보브와르 영상센터의 니꼴 페르난데 페레Nicole Fernandez Ferrer는 농담으로 비디오카메라의 개발이 페미니즘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했다. 물론 1960년대 1970년대 당시 찍은 다큐멘터리는 세련된 형식이 아니다. 그저 누군가가 말하면 그걸 그대로 찍는 정도. 다큐멘터리하면 떠올리는 나레이션이라던가 어떤 설명 같은 것도 없이 그냥 누군가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재미있는 내용도 많다.

일테면, ‘동성애’ 차별 반대 운동을 하는 시위 현장을 찍으며 주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부분을 보여주는데, 그 사람들의 반응이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다. “동성애는 인간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교육이 문제다”, “유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안 된다”, (왜냐고 물으니)”그냥 좀 이상하다” 등등. 1970년대라는 설명만 하지 않는다면 2006년을 살고 있는 한국이라고 해도 믿을 법 하다. 피임과 낙태 허용을 요구하는 시위는 사실, “급진적”이라고 느꼈는데, 지금의 한국에서 이런 시위가 가능할까? 물론 1970년대의 프랑스와 2006년의 한국을 동일한 위치에 두고 비교할 수는 없고 운동의 방법이 많이 바뀐 상황에서 피임과 낙태 허용을 요구하는 가두시위가 없다고 해서 지금의 운동 방식이나 사회가 더 보수적이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혹은 그래서)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런 운동은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일어난 초기였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운동은 항상 초기에 가장 “급진”적이다.
(“급진”적이란 표현을, 별로 안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때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데, 사용의 맥락 때문이다. 보통 “넌 너무 급진적이야”란 말은 “너무 극단적이야”란 말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곤 하는데 이런 말들은 맞는 것 같거나 틀렸다고 하기엔 왠지 자신이 “보수”적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기엔 싫을 때 사용하기 때문이다. 즉, 거슬리는 목소리를 배제하기 위한 ‘세련’된 방식일 뿐이다. “급진”이나 “극단”의 기준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통한 1970년대 프랑스의 페미니즘 운동의 변화상을 짚고 있다는 점이 참 매력적인 강의였다. 다만 때로 2시간이 넘는 다큐멘터리의 내용 중 1~2분 정도만을 보여줬는데, 왜 그 부분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그저 궁금함으로 아쉬움으로 남기며 자리를 떴지만.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그 밤의 진실

제 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11.18:00 아트레온1관 2층W-6,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
2006.04.11.20:00 아트레온2관 1층G-7, [그 밤의 진실]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
이미 한 번 즐긴 적이 있는 다큐멘터리. 너무 좋아서 다시 즐겼다. 다시 즐겨도 좋다 이전에 쓴 글은 여기로.

#[그 밤의 진실]
영화를 즐기며, 트라우마가 남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스스로도 잘 모르면서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을 보며, 이 영화는 트라우마로 남겠구나, 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어차피 국내에선 개봉 할 것 같지 않으니까, 스포일러라고 할 수도 없지) 나약과 보난데 두 부족의 전쟁과 평화 협정 과정을 담고 있다. 나약은 대통령이 있는 국가이며 보난데는 일테면, 저항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부족 모두 10년이 넘는 전쟁을 통해 유혈사태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러 명의 등장인물 중, 나약의 에드나와 그의 남편인 대통령, 보난데의 테오 대령(보난데의 지도자격)와 그 부인 등이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의 핵심은, 두 부족 간의 전쟁 중에 에드나의 자식이 끔찍한(차마 적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죽었는데 에드나의 자식을 죽인 사람이 테오 대령이란 것. 테오 대령은 더 이상 전쟁은 무의미하며 어떻게든 평화 협정을 맺으려고 하는 인물이다. 전쟁을 시작할 초기엔 이유가 있었을지 몰라도 더 이상 그런 의미는 없으며 지금은 전쟁을 위한 전쟁을 하고 있을 뿐이란 걸,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게 되는지를 자신의 만행/폭력―에드나의 자식을 끔찍한 모습으로 죽였다는 것―을 통해 깨닫고 그 사실에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드나에게 사죄하며 용서를 구한다.

루인은 에드나에 이입했다. 자식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것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졌는데 이 트라우마를 치유하지도 언어화 하지도 못한 체 서둘러 봉합해야 하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나약의 대통령과 보난데의 테오 대령은 서둘러 평화 협정을 맺으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두 부족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소통할 시간이 부족했고 특히 에드나는 그 전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다만 평화가 필요하니 트라우마를 그저 참아야 한다고 “강요” 받을 뿐이다.
(좀더 자세한 혹은 루인과는 다른 소개는 서울여성영화제 홈페이지에서 참고.)

루인은 이 영화를 치유하지도 언어화하지도 않은 상처나 트라우마를 서둘러 봉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런 상처들로 소통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새로운 상처들이 생기는 지로 읽었다.

에드나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매순간 누가 죽였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기를 바라고 평화협정을 맺는 걸 반대한다. 그냥 침묵하며 가만히 있다가도 서둘러 봉합한 봉합사가 터지곤 한다. 이런 모습에서 루인을 만났다. 취약하고 언제나 불안해서, 글로는 항상 상처는 쾌락의 대가라고 쓰면서도, 상처가 생길 때마다 고통 받고 그 과정에서 화내고 불안해하고 화내는 루인에게 혐오와 실망을 느끼고…. 에드나는 루인의 모습이다. 괜찮은 척 하면서도 돌아서면 욱씬거리는 상처를 느끼는, 그래서 에드나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테오 대령은 에드나에게 직접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만 에드나는 거절한다(테오 대령의 용서를 구하는 장면은 별로였다). 그리고 평화협정을 맺고 축제를 하는 마을의 한적한 곳에서 테오 대령을 습격해서 죽인다. 몸에 양념을 바르며 바비큐처럼 태워서(감독의 삼촌이 이렇게 죽었다고 한다). 이 광경이 들키고 두 부족의 모든 사람들이 달려온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로 아팠다. 테오 대령의 부인은 테오 대령의 동생이 에드나를 죽이려고 할 때, 고통스럽게 울면서도 죽이지 못하게 막는다.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무의미한 복수를 막으려는 태도. 이런 태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짐작만 할 뿐이지만, 아팠다. 정작 에드나를 죽이는 사람은, 남편인 대통령이다. 그렇게 얻는 게 평화다. 대화도 협상도 소통도 없이 그저 죽음을 통해 평화를 얻었다.

감독은 평화를 찾고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고 싶었다고,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말했다. 루인은 치유하지 않고 언어화하려는 과정 없이 서둘러 봉합하려는 상처나 트라우마로 대화에 들어간다는 것은 새로운 고통과 상처가 되는 것으로 읽었다. 대화의 과정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소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로 읽었다.

영화는 누구를 위한 누구의 평화인지는 묻지 않는다. 평화가 무엇인지도 묻지 않는다. 그저 아무 일도 없이 잠잠한 상태를 평화로 가정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떤 집단에서 상대의 폭력에 문제제기 하면 처음엔 반박하거나 사과하다가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왜 그 정도 가지고 지금도 얘기하느냐고 오히려 화를 내곤 하는데, 결국 이 과정에서 문제제기를 한 피해 경험자는 더 많은 상처와 고통을 받으면서도 “가해자”로 간주된다. 루인에게 에드나는 이런 역할로 다가왔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말하려는 인물. 테오 대령은 이 과정에서 사죄하려는 사람. 대령의 부인은 그런 과정을 유지하려는 사람. 대통령이 어쩌면 가장 문제적인 인물인지도 모른다. 실용주의자로 자신을 소개하는 대통령은 목소리를 죽임으로써 목소리가 없는 상태-잠잠한 침묵의 ‘평화’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마을의 염소들을 풀어주며 자연으로 자유롭게 돌아가라고 하는데, 우리에선 풀려났지만 목에는 여전히 줄이 메여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