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검열

좀더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이른바 자기검열이란 말은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란 말 만큼이나 폭력적이야. 최근 몇 가지 경험을 통해 느끼는 건, 자기검열로 인해 말을 하기 힘들다는 말은 검열 없는 발화가 그 모임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칫 잘못 말했다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람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걱정 때문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어. 물론 두 가지 모두가 동시에 작동하겠지만 왠지 후자에 더 큰 비중이 가 있다는 느낌.

문제는, 검열 하려면 좀 제대로 하라고. 자기검열 때문에 발화하기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폭력적인 언설을 하는 걸 듣고 있으면 도대체 자기검열의 기준은 누구에게 맞춰져 있는 건지 의심스러워. 결국 “정치적으로 올바른” 만큼이나 언어가 아니란 얘기지. 그냥 피곤하단 얘기로 들릴 뿐이야.

댈러웨이 부인

제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10.20:00 아트레온 2관, 1층 G-10 [댈러웨이 부인]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느꼈을까. 끝나고 박수 소리가 작았고 적었던 것으로 느끼기엔 메를린 호리스의 다른 영화에서 만큼의 만족은 없었나 보다. 사실 충분히 그럴 법한 영화다.

루인은 정말 매력적으로 즐겼는데, 그럴 수 있었던 건, [디 아워스]를 이미 즐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알다시피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토대를 두고 있는 영화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영화화한 이 작품이 재미있었던 건, 책으로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의 흐름이 왜 그렇게 변화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에 울프의 문체와 구성을 어떤 식으로 영상화할 것인가가 너무도 궁금했던 루인은, 오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했다. 자살하는 사람의 일이 댈러웨이 부인에게 영향을 주고 그런 상호작용에서 풀어나가는 방식을 영화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는 정말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영화는 잘 풀어가고 있다. 자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입을 비추고 댈러웨이 부인의 고통을 대비하는 방식. 등등 여러 장면이 흥미로웠다.

이 말은 이전에 [댈러웨이 부인]을 읽지 않았다면 이 영화를 즐기는 동안 꽤나 헤맸을 수도 있다는 얘기. 루인은 만족하지만 사람마다 평은 갈릴 것 같다.

침묵에 대한 의문/그녀의 비밀/부서진 거울

2006.04.09.11:00 아트레온 2관 1층G-11, [침묵에 대한 의문]
2006.04.09.14:00 아트레온 2관 1층G-7, [그녀의 비밀]
2006.04.09.20:00 아트레온 2관 1층G-7, [부서진 거울]

#[침묵에 대한 의문]
누구의 언어로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상대가 소리쳐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으면 듣지 못한다. 그래서 루인이 하곤 하는 말은, 타자들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서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혹은 들으려는 귀가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동성애’/이반이 가시화되자 “세기말이 되고 서구문화가 유입되니까 성정체성 위기가 생긴다”며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동성애’는 한국”전통”문화에는 없었는데 서구문화가 유입하면서 생긴 거란 얘기다. 하지만 과거 기록에 ‘동성애’ 관련 기록은 있고 관련 목소리는 항상 있었다. 19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듣기 시작하고선 그때야 처음 생긴 거라고 얘기하는 셈이다.

누구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며 그래서 들을 수 있는 것 밖에 못 듣는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침묵은 침묵이 아니라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말을 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말해도 상대가 알아듣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협상력으로서 침묵을 선택하기도 한다.

[침묵에 대한 의문]은 이 지점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른바 페미니즘 고전영화라고 평하는데, 영화를 즐기고 나면 왜 그렇게 평하는지 알 수 있다. 페미니즘 고전영화라고 해서 재미없는 영화냐면, 호리스의 영화 자체가 너무너무 재미있다.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심리학자가 처음엔 기존의 ‘남성’언어만 사용하기에 세 ‘여성’들의 말을 못 알아듣다가 자신의 위치를 읽으면서(positioning) ‘여성’의 언어로 기존의 법언어에 저항하는 것. 영화 끝 부분에 ‘여성’들이 소리 내어 웃는 장면은 정말 통쾌하다.

#[그녀의 비밀]
이 영화의 평을 쓰고 싶지만 쓸 수가 없다. 세 가지 코드가 겹쳐있는데, 망명/”불법”체류, ‘레즈비언’/이반queer, 트랜스/드랙이다. 기존의 법언어 바깥에 위치하는 주인공의 행동은 커밍아웃 혹은 아웃팅이 곧 바로 추방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추방되어 돌아가는 고국에선 사형선고와 같은 선고가 내려져 있는 상황이다(주인공은 이란 출신이고 이곳에선 ‘동성애’는 금지되어 있다). 이제, 주인공은 죽을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타자”로서의 정치학으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엮어 간다.

빼어난 작품이지만 한국에 개봉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언젠간 꼭 이 영화의 평을 쓰고 싶다.

#[부서진 거울]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한 감독의 욕망을 읽었다. 1995년 작품이 [안토니아스 라인]이라면 11년 전 개봉한 이 영화에선 그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외딴 집에 사는 사람, 사회에서 배제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주로 나오는 공간은 해피하우스라는 성매매업소이다. 이 공간의 이름은 역설적인데 루인은 해피하우스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관계를 엮어가는 그 순간이 해피하다는 점에서 해피하우스라고 읽었다.

메를린 호리스의 영화는 매유 유쾌하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