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과 실패의 윤리

오랜만에 대중강연을 한다. 잭 핼버스탬의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을 자세히 읽는 작업이다. 각 강좌 제목은 어떤 이들에게 아이러니할 텐데 일부러 그랬다. 강의는 책 내용, 논의의 맥락과 함께 연구자의 윤리도 함께 이야기할 계획이다. 왜냐면 괜찮은 논의를 담은 구절을 읽을 때마다 “그래서 너는 왜 그랬니”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ㅠㅠㅜ

대전퀴어문화축제 후기

어제(2024.07.06.) 대전에서 제1회 대전퀴어문화축제가 열렸고 다행스럽게도 참가했다. 2019년인가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 전국 지역 퀴어 활동가 실태 조사를 진행할 당시, 대전에서 활동하는 한 퀴어 활동가에게 대전에서는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인터뷰 이후 대전 지역의 게이/레즈비언 바를 구경했던 적이 있다(지역에 있는 퀴어 업소를 포착하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했다). 그리고 5년의 시간이 지나 대전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날이 좋았다. 비가 많이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고 구름이 많아 선선했다(후덥지근했다…). 비가 안 왔고 땡볕이 아니었으니 다행이었다. 사람도 많았다. 도로의 일부를 점거하고 행사를 진행했기에 부스 뒤로 버스와 차량이 지나다녔지만 경찰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고 차량을 적당히 통제하고 있었다.

혐오세력의 시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혐오세력은 KTX대전역 1번 출구 부근에서 행사를 진행했고 대전퀴퍼는 그보다 몇 백 미터 거리를 뒀고 그래서 혐오세력의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았다. 몇 명의 혐세가 행사장에 난입하려 했지만 경찰이 이를 막어내기는 했다.

축하공연이 매우 좋았고 발언들 역시 좋았다. 대전충청 지역 단체와 개인이 조성한 부스 역시 좋았는데 지역 페미니스트 모임, 대학 부스, 대전충청 지역 외국인 교사 모임, 무성애 모임, BDSM 모임, 청소년 모임 등 다양한 부스가 있어 즐거웠다. 비서울지역 퀴어문화축제를 참가할 때면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모임이나 단체를 배울 수 있어, 언제나 좋다.

기사에 따르면 별다른 충돌이 없다고 나와 있다. 이 문장의 정확한 내용을 나는 현장에서 목격하고 촬영했었다. 일단 선두 차량이 출발하려고 도로를 개방하는데 댓 명의 혐세가 그 입구를 막아섰다. 나는 처음에 그들도 축제 기획단인 줄 알았다. 그들이 막아서고 대형 선두 트럭은 일단 멈췄는데 그 사이에 혐세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열 명… 스무 명, 나중에는 4~50명 정도가 앞을 막아섰다. 그 중에는 유치원생이거나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인 이들도 있었고, 검은색 단체티를 입은 중고등학생도 있었고 성인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렇게 입구가 막히자 2014년 신촌 퀴퍼도 떠오르고 2018년 인천 퀴퍼도 떠올랐다. 1회 인퀴를 떠올리는 것이 좀 과할 수 있지만 그때 기억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암튼 혐세가 입구를 가로막자 대전퀴퍼 기획단이 지금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나중에 모두 고소를 하겠다고 1차 경고를 정확하게 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했는데 대전퀴퍼의 행사가 갖는 의미를 선언하는 것이자 오래 준비한 팀의 결기를 담은 선언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직후, 경찰들이 혐세와 대치하는 형태로 진을 짰다. 대전퀴퍼 기획단이나 참가자와 혐세가 직접 대치하지 않도록 경찰이 그 사이에서 벽을 세웠다. 그리고 현장 지휘관이 곧바로 경고를 했다. 해산하라고. 보통 해산 선언은 3회 정도를 진행하기에 오래 걸리겠구나 싶었다(규정인지는 모르겠고 예에전에 참가한 한 행사에서 들었던 이야기라). 그런데 경고를 몇 번 하더니 현장 지휘관은 바로 혐세와 대치하고 있는 경찰들에게 1보 전진을 명령했다. 이것이 시작이었고 경찰은 조심스럽게 1보 전진을 했고 혐세는 항의했지만 밀렸다. 그리고 곧바로 혐세 뒤를 다른 경찰들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앞에서 1보 전진을 계속했고 뒤에서 새로운 유입을 막고 기존 혐세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0여 분 정도가 지나가 퍼레이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것이 충격이었다. 경찰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밀려면 밀 수 있었다. 물론 대전경찰만의 행동은 아니다. 전주경찰은 험세를 격리시키는 전략을 취했고(난입하는 혐세를 바로 제압하더라), 제주경찰은 혐세의 관심을 한 곳에 둔 뒤에 우회로를 통해 퍼레이드가 가능하도록 했었다. 훨씬 규모가 큰 서울은… 협상하고 협의해야 할 사항이 너무도 많아 내가 적을 내용은 아니지만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가 이 건으로 협상하기 위해 몇 달을 고통받는다고 알고있다. 아무려나 중요한 것은, 경찰은 혐세를 밀어낼 수 있었다는 점이었고 그리하여 2018년 인천의 경찰은 혐세와 공모하고 공범이었다는 혐의는 더욱 짙어질 뿐이다.

행진의 첫 경로는 지하차도를 지나가는 것이었다. 시작한지 얼마 안 지나 지하차도를 지났고 꽤 오래 걸은 뒤 지상으로 나왔는데 선두 차량에서 계속 구호를 외치며 참가자의 흥을 돋구고 의제를 외친 인물은 ‘어둠을 지나 이제 밝은 곳으로 간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문장으로만 읽으면 진부하거나 오글거릴 수 있지만 중요한 선언이기도 했다. 오랜 준비 기간과 그 과정에서 가졌을 많은 어려움과 고민 등을 담은 표현으로 읽혔다. 대책없는 낙관적 희망이 아니라 ‘그럼에도 계속 뭔가를 하겠다’는 다짐이자 그동안 고생했던 기획단과 퀴어 개개인에게 전하는 위로 같기도 했다. 사실 그 발언의 의도를 직접 묻지 않았으니 나의 해석은 과잉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진부한 문구의 힘이 느껴졌다.

대전에 거주하는 참가자의 목소리가 많았던 와중에… 내가 사는 동네의 주민을 만났다…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인데 내가 평소 하고 다니는 굿즈가 많다보니 눈에 띄었나보다. 그리하여 대전퀴퍼에서 보여 말을 걸어왔었다. 접경지역에 사는 내가 대전에서 동네주민을 만난 썰을 풀었더니 H가 앞으로 무단횡단도 하면 안 되겠다며 놀렸다. ㅋㅋㅋ 차카게살아야지……

아무려나 대전퀴어문화축제도 오래오래 유지되기를. 오랫동안 대퀴는 대구퀴어문화축제의 줄임말이었는데 이제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었으니, 어려움이 많겠지만 힘든 순간도 많겠지만 오래오래 유지해주시기를, 그저 응원할 뿐이다.

개념에 대한 메모

탈식민주의 지식을 공부한다는 것은 고정된 대립항을 맥락 없이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유통과 소비를 통해 변형되기 마련이라 그에 대한 섬세한 접근 없이, 누가누가 뭐라고 했는데 너는 이걸 잘못 사용했다거나, 이런 중요한 가치가 있고 문제적 체제가 있는데 문제적 체제를 일방으로 비판하며 중요한 가치를 찬양하는 순간, 그 중요한 가치는 교리가 되지 질문이 되지 못한다.

추상적 표현을 한 이유는, 언제가 자긍심이라는 용어가 한국에서 재의미화되는 방식을 탐구해보고싶어서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자긍심이나 프라이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쓰이는 프라이드와 동일하고, 러시아의 퀴어가 사용하는 프라이드와도 동일한 개념일까? 개념어 혹은 용어는 지역을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운 언어로 재의미화되는데 이에 대한 촘촘한 이해가 누락되면 개념에 대한 비판은 공허해진다. 더 정확하게는 비판의 논점이 모호해지면서 비판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잃고, 비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소중한 지점이 뻔한 소리로 변형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자긍심 혹은 프라이드라는 용어는 죽음과 애도의 정치와 깊이 연관되고, 그래서 타인과 연결되는 감각을 내재한다. 장애여성공감은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라는 소중한 정치학을 제시했는데 불화가 곧 제도화나 자본의 활용을 배제하는 태도는 아니다. 이들과 싸우지만 동시에 필요로 하는 정치가 불화인데 이것은 언제나 양가적이고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집단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트랜스젠더퀴어가 호르몬 투여 등 의료적 조치를 취하고 더 안전한 병원을 만들고자 로비를 하는 일이 곧 의료규범에 동조하거나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의료 규범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동시에 의료 시스템 내에서 필요한 장치를 활용하는 것은 모순도 아니고 딜레마도 아니지만 너무 많은 경우에는 모순과 딜레마로 경험된다. 한국에서 쓰이는 자긍심이나 프라이드라는 용어 역시 이런 모순과 딜레마를 동시에 포착한다. 애도의 정치와 분노, 저항, 시위하는 태도를 포함하면서도 때때로 가장 규범적인 의미의 안전과 질서를 지켜나가기도 한다. 이 층위를 읽는 것은 한편으로 애정을 필요로 하고(나는 공부노동자와 활동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비판하거나 연구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라고 믿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순과 딜레마를 견디는 힘이다. 여기에 실패할 때 비판의 내용이 아무리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일 때에도 공허해지고, 비판의 맥이 힘을 잃게 된다. 내가 퀴퍼에서 트랜스 자긍심 깃발을 들 때 그것은 ‘내가 이 바닥 제일 잘난 트랜스다!’라는 의미일까, 아님 계속해서 세상을 떠나는 이들에게 손짓하는 것이자 죽음을 목격하고 오늘도 고단하고 힘들었던 하루를 살아낸 다른 트랜스에게 보내는, 생존하자는 신호일까? 자긍심이나 프라이드를 둘러싼 논의는 이 복잡한 시대적, 지역적 의미를 읽는 작업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언젠가 자긍심/프라이드가 지역에 따라 달리 의미화되는 방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보고 싶다. 찬반의 양자택일, 적대의 피아구분으로는 계속해서 누락되는 맥락을 읽는 방법은 모순과 딜레마의 정치에서 읽기 작업을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