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라는 말의 불편함: 해석의 변화

한때, 천재라는 명명에 엄청난 질투를 품은 적이 있다. 지금이라고 덜할까? 특히 고등학생 시절까지,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었다. 닮고 싶었고 스스로도 천재이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좌절’하면서 선망했다.

그 중 가장 선망했던 인물은 랭보. 푸훗. 그땐 랭보가 좋았다. 시 한 편 제대로 안 읽었고 어떻게 해석도 못했지만 랭보가 좋았다. 이유는 하나, 천재이기 때문이다. 랭보의 삶을 그린 [토탈 이클립스]란 영화가 있다는 정보가 있었을 땐 너무도 읽고 싶었지만, 루인의 집에서 영화는 곧 대학생 이상의 관람가란 분위기였기에 비디오를 빌려 즐긴다는 건, 감히 못할 일이었다. ‘동성애’자란 얘길 읽었을 땐, 더 이끌렸다. (누군가 랭보가 ‘동성애’자라고 말했을 때, 그의 말에서 비난의 뉘앙스를 느꼈기 때문만은 아닌 이유로,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회피했던 기억도 있다. 커밍아웃의 정치학이 여기서도 작동하고 있다. 그땐 두려움이었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이렇게 단순하게만 해석하진 않는다. 언어가 변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천재를 선망한다는 건, 사실 루인으로선 가장 ‘불행’한 일이었다. 뱁새가 황새를 쫒아 가는 격인지 황새가 뱁새를 따라하는 격인지 알 수 없지만 루인은 애시 당초 천재가 아니었고 될 수도 없었고 그럴 ‘운명’도 아니(었)다. (물론 ‘운명’은 고정되어서 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니라 경합하고 협상하는 과정이다.) 그랬기에 누군가 루인에게 천재라는 말을 해주길 바랐고 스스로가 천재가 아님을 너무도 잘 아는 상황에서 이건 결코 이룰 수 없었다. ‘이성애’혈연가족의 부모들부터도 루인을 무시하는 상황이었는데.

돌이켜 다시 읽으면, 천재가 되고 싶다는, 천재를 향한 선망이 자기 발전을 가로막은 요인의 하나이지 않았을까 싶다. 덕분에 자의식과 자존심만 강해졌지만 동시에 너무도 취약한 인간이 되었다. 언제나 전전긍긍하고 눈치를 보면서 동시에 주변에 완전히 무관심하고. 가장 큰 문제는 따라하기였다. 천재를 향한 선망은 루인의 재능을 읽기 보다는 이른바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의 행동(재능을 따라할 수는 없으니까)을 따라했고 겉멋이나 들었다. 이쯤 쓰면, 부끄럽다는 말 정도 할 수 있겠지만, 별로 부끄럽지 않다.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바로 그런 행동이 그 시절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게 한 힘이었기에 그때의 모습을 부정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고 몸앓는다.

천재를 선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선망이 자기발전을 가로막는 한 요인이긴 했지만 동시에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자원이기도 하다. 욕심만 많고 “눈”만 높아 언제나 일정 이상의 수준을 요구하고 그렇게 하길 다그치고 그래서 자뻑과 자학의 접점에서 갈팡질팡하고. 하지만 바로 이것이 자랄 수 있는 힘이라고 믿는다. 지금도 바로 이 갈팡질팡하는 행동이 루인을 자라게 하는 힘임을 안다.

그 시절도 지금도 루인에게 천재는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을 의미한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누구나 놀랄 법한 재능을 발하는 사람. 그래서 그땐 그렇게 선망했고 지금은 욕으로 해석한다. 그 시절과 지금의 언어가 변했다.

일테면 공유하면서 좋아하는 누군가(가수? 작가? 누구든!)를 얘기할 때면, 정말 천재 같다니까, 란 감탄사를 듣곤 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말이 그 사람을 향한 칭찬이 아닐 수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건.

이 느낌은 이른바 “타자성”이라고 불리며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며 겪는 갖은 불이익과 고통들을 고민하면서부터이다. 이른바 빼어난 트랜스이론가를, 이반queer이론가를, 페미니스트를, 정희진 선생님을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하는 시간 동안 겪었을 아픔과 상처을 “천재”라는 말로 칭찬할 수 있을까. 그것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끊임없는 고민과 노력의 산물이며 그런 상처들을 언어화하는 쾌락의 과정인데 “천재”라고 “칭찬”할 수 있을까. 그건 참 윤리적이지 않다고 느낀다. 더구나 그 앎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앎인데, 사회와 무관한 개인의 타고난 재능으로 부르며 사회 상황과는 무관한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건, 더더욱 문제가 많다고 느낀다.

※여러 날 전,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다가, 블로그에 쓰기로 했던 글. 아마 한 달은 아니어도 그 정도의 시간은 지난 것 같아… 쿠헹~

바쁘지만, 즐거워

일테면 요즘의 생활은, 5분 거리에 있는 우체국에 가는 시간도 아까워할 정도다. 저녁 따위 안 먹고 하루에 한 끼로도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득 담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종종 바쁘다고 징징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힘들지는 않다. 힘들다고? 아니, 오히려 즐겁고 너무 좋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말, 맞다. 종종 이 말은 어쩔 수 없는 ‘진리’라고 느낀다.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너무 많아도 즐길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말, 좋은 말이다. 만약 별로 안 좋아하는 텍스트와 놀아야 한다거나 별로 안 좋아하는 일을 이렇게 징징거릴 정도로 바쁘게 해야 하는데도, 즐거울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루인은 언제나 하고 싶은 일만 하는 편이다. 학부 때 수학과를 선택한 것도 그것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지 누군가 권해서가 아니었다. 수학 담당이었던 고3 담임도 말렸지만, ‘이성애’혈연가족의 부모들도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선택했고 그래서 중간에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운 배움이었다고 느끼고 있다. 루인에게 수학을 배운 배경은 너무도 중요한 바탕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쁘다고 징징거리지만, 즐겁다. 재밌다. 핵심은 이것. 쾌락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다. 아마 쾌락을 느끼지 않았다면 이런 생활방식을 엮어가지도 않았을 것 같다. 그냥 수업교제는 읽는 둥 마는 둥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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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활 와중에 재밌는 걸 깨달았다. 수업 시간에 발화를 한다는 것과 수업 사람들과 친밀함을 느낀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

두 개의 수업을 듣고 있는데, 한 수업 시간엔 아무 말도 안 하는 편이다. 선생님이 시키면 간신히 말할까, 그냥 침묵. 하지만 그 수업은 재밌고 그 수업 사람들과도 친밀함을 느끼며 지낸다. 다른 학교에서 듣고 있는 수업이다. 반면 (루인의 입장으론) 꽤나 많은 발화를 한다고 느끼는 다른 수업에선 수업은 재밌지만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과는 별다른 친밀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 서먹함을 느낄 정도다. 현재 등록금을 내고 있는 학교에서 듣는 수업이다.

이 차이는 여러 이유로 생겼을 테다. 친밀함을 느끼는 수업은, 조모임을 몇 번 했고, 수업 사람들과 저녁을 여러 번 먹었고 등등. 못 느끼는 수업은 그저 수업 시간에 접하는 것이 전부. 세미나든 수업이든 그것만으로 친밀감을 형성하는 건 어려운 일일까. 하지만 단순히 오프라인의 모임이 친밀감을 형성하는 핵심인건 아니다. 커밍아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루인에게의 핵심은 이것이다. 친밀함을 느끼는 수업은 커밍아웃을 했고, 그래서 종종 이런 얘기를 하고, 못 느끼는 수업은 안 했고, 공공연한 혹은 “세련된” 젠더혐오/공포 발언을 듣는다.

트랜스/젠더/섹슈얼리티/이반queer 자료창고

어제, 여이연에서 한 박통의 콜로키움을 듣고, 트랜스/젠더/섹슈얼리티 아카이브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심지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선 지금의 루인에게 트랜스 아카이브가 특별히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학생이기에 학교 도서관을 통해 관련 정보에의 접근권이 용이한 편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아카이브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조차 없었다. 아니, 아카이브가 뭔지도 몰랐다-_-;;; 진짜다. 요즘 기획 중인 행사가 있어서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아카이브란 곳에서 영화자료를 찾았지만 아카이브의 뜻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냥 자료목록을 올려두는 곳이려니, 할 뿐.

그런데 어제 콜로키움에서 박통은 자신이 속해있는 한국레즈비언권리연구소에 아직은 열지 않은 아카이브를 곧 열어서 사람들이 ‘레즈비언’관련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다는 얘길 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땐,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이 바람은 어제 잠들기 전부터 부풀어 올라 급기야 오늘은 도메인을 사고 서버를 사야지, 라는 쪽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자료의 정보만 올릴 것인지, PDF파일이면 자료도 올릴 것인지, 파일을 올린다면 분명 불법이 되는데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루인이라고 모든 자료에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도서관이란 통로를 통해서 제한적인 수준만 접할 수 있지만 이 정도라도 어디야. 더구나 처음 트랜스/젠더/섹슈얼리티를 고민할 땐,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를 몰라 난감했었다. 다행히 두 편의 멋진 글이 있었기에 그 글의 저자들이 쓴 다른 글, 참고문헌으로 나온 글들을 찾아가며 읽을 수 있었지만,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항상 있다.

자료 접근도가 그나마 있다곤 해도 그렇다고 현재의 방식이 만족할 만 한 건 아니다. 매번 새로이 찾아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물론 한동안 혼자 노는 카페에 관련 자료를 모아두기도 했지만 이 일도 몇 달째 방치 중이다.

욕심은 PDF파일까지 업로드할 수 있는 그런 자료창고(“다락방”이란 이름도 괜찮을 것 같다, 트랜스다락방? 트랜스놀이방? 트랜스놀이터?)를 만드는 것. 물론 이럴 경우 용량의 문제도 문제려니와 저작권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자료 접근도가 제한적이란 점에서 어떤 자료가 있고 그 자료를 어느 사이트에 가면 유료로 결제하고 볼 수 있다고 적는 것도 좀 그렇다. 절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뭐, 결국 논문이나 책의 서지정보를 적는 수준에서 그치겠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사실 아쉬움을 품기엔 다른 일만으로도 만만치 않다. 자료가 상당히 많고 루인이 아는 건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뭐, 물론 논문 혹은 책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건, 루인의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서지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기에 ctrl+c, ctrl+v 정도의 작업이긴 하지만(사실 이 작업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준다), 분류의 문제가 있다. 어디까지를 트랜스 이론의 범주에 포함할 것인가의 문제. 루인의 배경이 페미니즘과 이반queer, 트랜스에 겹쳐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조안 스콧Joan W. Scott이란 사람의 글은 누가 읽어도 괜찮으며 트랜스 언어를 모색하며 많은 아이디어를 주기 때문에 지나치기 어렵지만 스콧은 페미니스트이다. 혹은 재니스 레이먼드라고 대표적인 트랜스혐오 페미니스트의 책은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포함해야겠지?

이런 저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고 있다. 기말논문이 끝나면 일주일 정도 작정하고 매달리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하지만 예전에 홈페이지를 만들다 실패한 전력이 있으니 홈페이지론 못하겠고, 그렇다면 블로그로 만들까? 어차피 “분류”를 누르면 목록이 나타나니까, 괜찮을까? 그래도 게시판 형식으로 만들어야 할까? 으으. 이러다 그냥 조용히 지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공상과 기대와 망설임 속에서도 도메인을 검색하다 놀랬다. 처음부터 하고 싶은 도메인은 누구도 등록하지 않고 있지만, 그냥 찾아본 곳은, 으으으. (말을 못 잇고 있음.)

그냥 이런 부풀어 오르는 기대로 설레고 있지만, 정말 할지는 알 수 없다. 그냥, 대형포털 사이트에 카페를 만들고 그곳을 이용할 수도 있는 일이다. 문제라면 이 경우 접근성이 훨씬 제한된다는 것. 하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루인 블로그를 찾아주는 검색사이트에 엠파스나 네이버는 없다. 라이코스도 루인을 찾지만 네이버나 엠파스엔 없다. 이 말은 개인블로그로 했을 때, 구글이나 다음, 야후 등으론 찾아올 수 있어도 엠파스나 네이버로는 못 들어오고, 네이버카페로 했을 땐, 오직 네이버로만 검색해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뭐, 무슨 상관이람. 이것까지 고려하면 머리 아파요. 흐흐. ;;;;;;;;;;; 다만 이렇게 공개적인 자료실이 있어서 누구나 쉽게 자료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