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는 것의 의미: 누구의 경험인가 – 포스트모더니즘

그런 경험이 자주 있는 편이다. 루인은 쉽다고 느낀 텍스트를 다른 사람들은 어렵거나 이해할 수가 없다고 반응하는. 특히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나 이론가들이면 이런 반응의 간극은 더 커진다. 일전에 수업을 통해 식수Cixous나 이리가레Irigaray를 읽은 적이 있는데 루인의 경험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쾌락적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렵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였다. 이 간극.

작년, 어떤 글을 쓰면서 차이와 관심/무관심의 관계를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읽은 친구는, 이런 해석이 (데리다인지 들뢰즈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그런 누군가도 이와 비슷한 논의를 한 적이 있는데 루인은 이와는 다른 각도로 해석하고 있다는 얘길 전해준 적이 있다. 이 지점.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렵다는 얘기가 워낙 많아서 아직 접근할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접할 때마다(비록 2차 텍스트라는 문제가 있지만) 느끼는 건, 루인을 설명하고 읽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 혹은 그 언어를 그 사람들도 고민하고 언어를 모색하고 있음을 깨닫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 느낌.

이렇게 적으면 마치 엄청 잘난 척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얘길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언어의 위치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을, 탁상공론이니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것, “현실”에선 아무 쓸모도 없는 것으로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루인도 그 말을 믿었고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걸 어렵기에 아직은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영역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이 누구의 경험을 반영하는지는 조금도 묻지 않았다. 기존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어렵다는 걸, 왜 진작 깨닫지 않은 걸까. 루인의 몸앓이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하는 내용과 일정 부분 접점이 있고 그래서 때로 ‘쉽게’ 다가온다면 그것엔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지점은 고민하지 않고 여전히 어려우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간주한 건 왜일까.

일전에 “어렵다”는 것은 누구의 입장인가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일테면 트랜스베스타잇이나 MTF/FTM과 같은 언어들, 트랜스를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언어는 어려워서 암기용 지식이며, 돌아서면 잊어버릴 만한 내용이지만, 트랜스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이 언어는 절실하며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절박한 언어라는 얘기.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이런 위치에 있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들에겐 어렵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쾌락의 언어들이다. 그러고 보면 어렵다고 반응한 사람들 대다수가 ‘이성애’-젠더 구조에 익숙한 시스젠더들이었나. 물론 이런 식으로 구분할 수 없지만, 단순히 어렵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왜, 어떤 맥락으로 인해 어렵다고 느끼는지, 그 지점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농담처럼 하는 말: 그러고 보면 루인은 존재 자체가 근대의 언어체계에선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원단일 수밖에 없구나. 이거 철저히 농담이다. 근대와 후기근대를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포스트모더니즘을 관념놀이로 여기는 사람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나누는 사람들 모두에게 보내는 농담이면서 조롱인 셈이다. 이런 구분 자체가 웃긴 일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언어에서나 루인을 설명할 수 있다는 얘긴 근대/모더니즘을 누구의 언어로 구성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항상 존재했지만 없다고 간주하며 삭제했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근대와 후기근대란 구분은 웃긴 일이다.)

공간

오랜만에 조금은 긴 시간을 나스타샤와 놀다, 설레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을 찾은 계기는, 예전에 리퍼러 로그 놀이를 하다 우연히. 구글 검색으로 루인 블로그, [Run To 루인]에 들어왔는데 그곳에서 가장 상위에 링크되어 있는 곳을 들어갔다가 찾았다.

설렘과 두근거림과 기쁨과 … 이런저런 여러 감정들이 몸을 타고 논다.

언제나 그렇듯 [Run To 루인]에 들어오는 검색어 중, 가장 좋아하는 검색어는 트랜스젠더나 크로스드레서, 트랜스베스타잇, 드랙 킹이나 드랙 퀸 등 트랜스와 관련한 언어들이다. 그렇게 들어온 사람 중엔 그저 호기심이나 책을 읽다가 우연히 나온 언어를 잘 몰라서 들어온 사람도 있겠지만, 그 중엔 자신의 정체성-현재의 위치를 고민하는 와중에 들어온 사람도 있을 거란 기대를 품는다. 그렇게 들어와서 리플을 남기기가 쉽지 않기에, 흔적을 남겨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좋다. 이렇게 연결의 끈을 통해 가능성을 꿈꿀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좋다.

아무튼, 그렇게 찾은 그곳이 오프라인으로도 연동하는 곳이며 루인이 쉽게 갈 수 있는 곳, 루인이 즐겨 노는 곳 바로 근처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기쁨이란. 조만간에 한 번쯤 가봐야지. 꺄릇.

국경의 남쪽: 사랑이 변(색)하는 시간

2006.05.05. 아트레온 21:15, E-12 [국경의 남쪽]
※스포일러 같은 건 없을 듯. 뭐, 영화 자체에 스포일러가 없으니까.

1. 끝나서 영화관을 나서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행이야, 라고 중얼거렸다. 우산을 쓰고 길을 걸으며 종종 울음이 나왔다. 울다보면 끝나고, 끝나고 나서도 울음이 나는 그런 영화.

2. 차승원을 좋아하는 편이다. 아니, 배우 중에선 거의 유일하게 좋아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이유가 좀 재밌다. 차승원 영화를 모두 즐긴 것도 아니고 차승원 연기가 탁월하다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몇 년 전, 그때도 우울증이 심하고 별자리에 한창 빠져있던 그 때, 48가지 별자리 책[흔히 보는 12가지 별자리가 아니라 별자리를 48가지로 나눈 것]에서 루인과 같은 별자리인 사람 중 한 명으로 차승원이 나와 있었다. 차승원이란 배우에게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이유는 오직 이것뿐이다. 뮤즈Muse의 매튜도 루인과 (48가지 중에서) 별자리가 같다. 뭐, 뮤즈는 이로 인해 더 좋아한 경우다. 그리고 뮤즈의 음악이 어떻게 변할지도 감을 잡을 수 있다.

3. 이 영화를 읽으며, 사랑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그리고 있다고 느꼈다. 너무도 사랑했지만 그것이 환상으로 자리 잡았을 때, 그리고 그 환상이 깨지기 시작할 때, 어떻게 변색하는지를 그리고 있는 영화.

오랫동안 앓고 있는 감정, 보고 싶어서 우연히 라도 만나길 갈망하면서도 결코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래, 그저 한 번이라도 우연히 만나길 바라고 그 만남으로 긴 공백이 만든 환상이 깨지길 바라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결코 만날 일이 없길 바라고 있다. 아니, 만났다가 더 좋아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도 품고 있다(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났는데 못 알아보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과 아무런 감정이 안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 바로 이 감정에서 영화는 떨림을 가졌다.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사랑의 환상이 발생한다. 너무 사랑하는 상황에서 헤어졌고 그래서 그 사람의 모습은 더 커져있다. 그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체념한 순간, 그 사람이 나타났다.

‘체념’이란 단어를 쓰고, 아프다고 느끼고 있다. 체념이란 포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희망하지만 희망의 가능성을 무기한 연장한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당장 일어날 것 같지 않음을 깨닫고 흐르는 방향으로 흘러가며 바람을 품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결국, 체념한다는 건, 바람(바램)의 크기를 한 순간에 키웠다고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크기를 평생에 걸쳐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이런 체념의 순간에 그 사람이 나타났고 이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사실 환상이 자란 자리에서 사랑이 이루어지긴 어렵다. 그 환상이 끊임없이, 지금 만나고 있는 모습과 만날 수 없는 기간 동안 만든 모습 사이에 간극을 만들고 갈등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매울 것인가가 관건이지만 새로 시작하지 않는 이상, 어렵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사랑하지만 이어질 수 없음.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 사랑한다고 말하는 상황의 아이러니.

이 아이러니는 차승원이 누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느냐 하는 장면에서 더 여실히 드러난다. 정말 사랑한다고,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겐 “복숭아 모양”을 그릴 수밖에 없음. 하긴, 너무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발화하는 순간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4. 이 영화를 읽고 나오며, ‘이성애’-일부일처-가족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에 있는지를 느꼈다. 사진 속에선 웃고 있지만 사진 밖에선 언제든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불안을 품고 사는 삶. 한국에서 가족주의는 강하지만 가족들 간의 대화와 사랑은 별로 없듯, 그 균열지점이 이 영화에서도 나온다. 치유하지 않은 상처 혹은 버릴 수 없는 체념으로 사는 삶에서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 다들 이렇게 치유 받지 않은, 치유할 길이 없는 가족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불안함. 가족사진을 찍을 때만 웃고 있을 뿐인 생활.

미약하나마 이 영화는 가족의 불안한 균열지점도 드러내고 있다. 잊었다고 믿고 싶은 상황에서 발생한 흔들림 혹은 균열, 바로 이 상황에서 웃고 있는 가족사진을 찍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의 매력엔 이 지점도 한 몫 한다.

5. 뭔가 조금은 허전하고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래서 흥행에 성공할 거란 느낌은 안 든다. 차승원이 평균 200만 명은 보증한다지만 이 영화, 과연 그 정도가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루인에게 이 영화는, 재밌다. 슬퍼서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