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소통, 가족, “엄마”

[괴물] 2006.07.31.월, 오전 09:00 아트레온 2관(3층) B-7

일요일 오후에 볼까 했다. 하지만 주말이면 무려 8,000원씩이나 하는데 그럴 수야 없지. 조조로 즐기는 [괴물]은 ‘괴물’스럽게도 9시 조조임에도 관객수가 상당했다. 웬만한 영화의 오후나 저녁 시간대 관객수가 9시 조조에 몰렸다. 역시 인기가 있다는 의미일까?

우선, 전반적인 느낌은, 만약 한국사회의 특정 맥락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그냥 무난하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종종 놀라는 장면도 있고 합동장례식장에서의 장면은 울다가 웃는 당혹스러운 순간을 맞기도 한다. 정말이지 눈물 흘리며 울고 있는데 바로 그 장면이 깔깔 웃지 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바뀌면 어쩌란 말이냐! 정말이지 당혹스러운 찰라.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서 뭐가 난다는;;;;;;)

사실, 이 영화, 분석하고 싶지 않을 만큼 복잡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 좋게 보려면 마냥 좋게 봐줄 수도 있고 과도하게 읽으면 정말 끔찍하게 읽을 수도 있다는 느낌 때문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 후기는 반드시 분석이어야 할까, 하는 의심도 들지만 그냥 어떤 상념이 몸을 타고 흘렀는지 적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크진 않지만 신경 쓰일 수도 있는 내용이 조금씩 있음. 하지만 영화 관람을 방해할 만한 스포일러는 없을 듯.

# 소통
송강호(강두) 등이 강두의 딸 고아성(현서)이 괴물에게 잡혀갔지만 살아 있다고 말했을 때, 누구도 믿지 않는 장면을 접하며, 기존의 언어와 ‘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느꼈다.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도 재단할 수 있는 권위/권력을 가졌다고 믿는 이들-이른바 전문가들이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무시하는가를 이 영화는 드러낸다. 그래서 극비라는 비밀을 강두가 폭로할 때, 강두의 목소리를 저항이 아니라 정신병자의 헛소리로 간주한다.

사실 이 영화는 이런 소통에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정신병자로서 탈출하고 숨어 지내고 쫓기는 신세지만, 자신들의 언어와 경험을 믿고 달려갈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행동은 주이상스라고 할 수도 있다.) 이른바 권력을 가진 자,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이 통제한 법을 위반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행한다는 점에서 [안티고네]가 떠오르기도 한다. 법 보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를 구해야 한다는 믿음이 더 우선하는 모습. ([안티고네]를 이런 식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기존의 법체계에 도전한다는 점에선 역시 닮아 있다.)

소통은 실패하고 이들은 질서를 위협하는 정신병자-지명수배자가 된다. 세균보균자라는 말은 괴물병원균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통제권을 위협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재해석할 수 있다.

#(새로운)가족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거의 마지막 장면. 현서(고아성)와 같이 숨어 지내던 세진(?)을 구출한 후, 강두(송강호)는 처음엔 현서만 챙기지만 괴물을 죽인 후엔 현서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세진에게 가서 깨운다. 그러며 하는 말: “우리 현서와 같이 있었니?”(조금은 다를 수도 있음;;;)

이 말을 한 후 강두는 세진을 껴안고 가는데, 마지막 장면은 강두와 세진이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이다. 이 장면.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이 장면이 좋았다. 비록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이른바 “정상가족”이라는 환상을 깨는 구성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가족구성을 상상하고 있다. 현서와 같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유만으로 혈연과는 상관없이 구성하는 가족. 하지만 바로 이런 지점이 꽤나 꺼림칙한 지점이기도 하다.

#’괴물’스런 “엄마”
기사 둘:
“스크린, ‘엄마’가 가고 ‘아빠’가 온다”
“괴물, ‘소시민 아버지들’에 바치는 봉준호의 찬사”

지금부터의 느낌은 “오바”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글을 어제 시작했음에도 지금 마무리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의 해석이 과도한 “오버”일 수도 있음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적는 건, 지금은 이런 식의 느낌도 가졌다는 루인의 소소한 메모라고 여기기 때문.

공포영화를 조금이라도 즐긴 사람은 알겠지만 공포의 핵심은 익숙한 것이 낯설게 돌변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한국에서 학교를 소재로 한 공포물이 많은 것도 그렇고 “엄마”가 괴물로 돌변하는 모습을 취하는 것도 그렇다. “어머니”는 성스럽지만 그만큼 억압으로서, 괴기한 모습을 취한다. [괴물]과 놀며 느낀 지점은, 부재하는 “엄마”와 어느 날 낯설게 돌아온 “엄마”, 도망쳤다가 어느 날 돌연변이로 돌아온 “엄마”-괴물의 형상화였다.

불현듯 이런 몸앓이를 한 것은 위에 링크한 두 개의 기사 덕분이다. 영화에서 현서가 태어나자마자 도망친 “엄마”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성과 모성을 경쟁-대립 구도로 쓰는 기사엔 당혹스러웠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처럼 “남자는 약하지만 아버지는 강하다”는 말로 단순하게 치환할 수 있기에 부성과 모성을 경쟁-대립구도로 몰고 가는 것이 웃긴 일일 수도 있다. 작년 한 해 “엄마”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제 “아버지가 회귀”하고 있다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부성과 모성이, “아빠”와 “엄마”가 동일한 방식으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마지막에 가서야 괴물에게 잡아먹힌 현서와 세진을, 강두는 괴물의 입에서 꺼내는데, 이 모습이 일종의 새로운 출생-죽음을 지나온 새로운 삶으로 다가왔다. 괴물의 입에서 꺼내는 모습은 출산의 장면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강두가 세진을 깨워, 안고 가는 장면에서 현서와 세진의 모습은 겹치며 닮았다고-쌍둥이라고 느꼈다. 사람 얼굴 기억을 잘 못하는 루인으로선 특히 더 심했다. 둘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는 것인지 겹친 것인지 헷갈렸고 순간적으로 쌍둥인가 했다.

이 지점에서 괴물은 현서를 낳자마자 도망친 “엄마”가 돌아온 것으로, 괴물의 죽음은 “모성”도 없으면서 아이가 다 크니까 나타난 “엄마”를 처단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건, 시선을 가진 “여성”은 모두 죽이고, 살인이 추억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그린 전작 [살인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IMF 이후 “아빠, 힘내세요”를 전국민의 응원가처럼 부르고 “여성의 취업이 증가하니까 남성들의 취업이 더욱 힘들다”는 식의 언설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대놓고 이렇게 말하진 않는다 해도 변형한 형태의 언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괴물]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아버지”의 회귀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로 이 영화의 바람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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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는 영화라는 느낌이다. 아직도 뭐라 할 수 없는 불편함과 지금까지 적은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음을 느끼고 있다. 다시 볼까? 하지만 굳이 또 극장에서 볼 필요가 있을까? 어둠의 경로로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기간에 보는 것보다는 일정 시간을 두고 보는 것이 더 좋다는 의미.

오로라 공주: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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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말하는 리비도는 좁게는 성적 에너지로 말할 수 있지만 감정 작용을 비롯하여 몸에서 작용하는 모든 에너지로 설명할 수도 있다. 누군가와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상대에게 리비도를 투자하는데 이는 거의 매순간 상대방을 떠올리고 감정 노동을 하는 등의 자신의 에너지를 상대에게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비도 투자라고 하면 뭔가 어렵게 느껴지지만 이렇게 풀면 사실 별거 아니다. 지식을 권력화하는 전형이 이렇게 쉬운 걸 어렵게 만드는 것.) 하지만 상대와 헤어지고 나면, 상대에게 투자한 리비도 에너지를 회수하는데, 여기서 애도와 우울증으로 나눈다.

애도(슬픔으로 번역하기도 한다)는 상대에게 투자한 에너지를 회수하고 충분히 슬퍼함으로서 다시 새로운 관계를 엮어 갈 수 있는 방식이다. 이제는 남이라는 걸 깨닫고 상대에게 투자한 에너지를 모두 거두어들인다. 다만 이런 분리의 과정, 상대에게 투자한 에너지를 거두어들이는 과정의 고통이 슬픔으로 드러난다.

우울증은 헤어진 것까진 애도와 비슷하지만 이후의 과정이 다르다. 우울증은 상대에게 투자하는 에너지를 완전히 회수하지 못하고 상대와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지 못함으로서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가 되고 상대는 자아가 됨으로서 초자아가 자아를 억압하고 비난하거나 괴롭히는 것이 우울증이다. 이 과정에서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비난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림으로서 우울증은 치유하기 힘들다. 이유 없는 우울은 이런 식으로 설명이 가능할 듯.

이상은 지난 2006여이연여름강좌 중 “처음 만나는 정신분석2”에서 배운 내용을 루인 식으로 해석한 것. 그러니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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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펑펑 울고 싶고 엉엉 울면서 무언가 막힌 것을 풀고 싶은 날. 그런 날 대체로 영화를 선택하지만 성공적이었던 날은 별로 없었다.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보며 한참을 울었던 흔적이 몸에 있고 만화 및 애니메니션 [별의 목소리]를 즐기며 그러곤 한다([별의 목소리]는 언젠가 글을 쓰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오로라 공주]를 즐기며, 극장이 아니라 어두운 사무실에(나스타샤는 아프니까 사무실 컴퓨터로…) 혼자 앉아 즐기길 잘했다고 느낀다. 너무 울어서, 극장에서 봤으면 민망할 뻔 했다. 우는 것 자체가 민망한 게 아니라 우는 소리가 주변 사람들의 관람을 방해할 수 있음이 민망한 것. 수습할 시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울기엔 혼자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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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주디스 버틀러)의 우울증으로 이 글을 시작한 건, [오로라 공주] 영화를 즐긴 이유가, 그 강좌의 “우울증”시간에 이 영화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여이연에서 정신분석 관련 새 책을 기획 중인데 그 책에 이 글도 실릴 것 같다.) 정순정(엄정화 분)이 오민아의 목소리를 내는 장면들이 있는데, 이 장면이 충분히 애도할 수 없어 오민아와 정순정이 우울증으로 동일시한 모습이란 것. 죽은 오민아의 영혼이 정순정의 몸에 들어온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상실한 대상과 동일시한 정순정의 우울증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 강좌의 해석이었다.

하지만 읽기에 따라선 ‘레즈비언’ 관계로도 읽을 수 있다고 느꼈다. 정순정과 오민아의 관계를 단순히 “모녀”관계로만 제한하지 않는다면. 물론 이는 둘의 젠더를 특정한 방식으로 한정한다는 전제에서만 성립 가능하지만.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모성”에서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무시하기 때문. 오히려 “모성”이란 환상을 통해 ‘레즈비언’ 관계를 살짝 숨기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듯.

그렇다면 어쨌거나 ‘이성애’ 결혼을 했다가 이혼한 정순정의 우울증은 바로 ‘레즈비언’ 욕망을 억압해서 발생한 우울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억압한 욕망(대상)으로 인해 우울증이 발생할 때, ‘이성애’ “여성”가 억압하는 것은 ‘레즈비언’적 욕망이고 ‘레즈비언’의 억압은 ‘이성애’다. 그래서 진정한 ‘레즈비언’은 우울증 ‘이성애’자고 진정한 ‘이성애’자는 우울증 ‘레즈비언’이다. 이건 버틀러의 설명 방식인데, 버틀러가 ‘레즈비언’이기에 이런 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양성애’나 S/M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 버틀러의 한계다. 트랜스로서 이런 설명을 살짝 비틀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의 우울증이야 말로 자신의 트랜스 욕망을 억누르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회에서 “남성”(혹은 “여성”)이고 싶은데 “여성”(혹은 “남성”)으로 자랐기에 발생한 우울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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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즐길 수 있을까? 글쎄… 걱정이 앞선다.

“여성”은 트랜스/퀴어 공포(혐오)가 덜하다고?

몇 해전 한 인터넷 클럽에서 읽은 글. 그 클럽의 주인은 “여성”들에 비해 “남성”들이 퀴어(나 트랜스) 공포가 더 심하고 “여성”들은 공포가 별로 없다는 글을 썼었다. 그 글에 한 “남성”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답글을 달자, 글쓴이는 참 드물다면서 놀라고 반가운 반응을 표했다. 당시 루인은 뭐라 할 수 없게 복잡했지만 그냥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빈약한 언어는 뭐라고 할 수 없게 한다.

페미니즘 혹은 여성학 관련 모임 혹은 수업을 매개로한 어떤 자리에서 들은 말. “여성”이 “호모포비아”가 덜한 건, “같은 약자, 타자로서의 감수성 때문이다”란 말을 했었다. 고개는 주억거렸지만 글쎄… 수긍하기 힘들었다.

루인의 편견이겠지만, 그러고 보면 공포에 따른 혐오범죄의 가해자 상당수는 “남성”인 것 ‘같다’. 혹은 그렇게 재현한다. 몇몇 영화를 떠올려도 그렇고 인터넷 등 신문 기사를 통해서도 그런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독 “남성”이 트랜스/이반queer 공포가 더하다는 의미일까?

어제, 여이연 강좌를 마치고 玄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맞은편에 앉은 커플의 반응. “여성”젠더처럼 드랙한 사람을 “여성”으로, “남성”젠더처럼 드랙한 사람을 “남성”으로 가정한다면, 멸시의 눈빛은 “여성”에게 있었고 “남성”은 그렇지 않았다. 왜 문제인지 모르는 표정이었을까, 그냥 쿨하고 싶은 표정이었을까, 선망의 표정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루인이 느낄 수 있을 만큼 드러나게 공포의 혐오를 표하진 않았다.

‘이성애’가족구조에서 자신의 젠더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성을 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엄마”이며 “아빠”에겐 가장 늦게 알린다는 말을 자주 접한다. 그렇다면 “엄마”-“여성”이 트랜스/퀴어들을 향한 혐오가 덜한 걸까. 이런 반응을 단순히 성별 혹은 양성체계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몇 주 전 PD수첩에서 방영한 “나를 정정해달라 -트랜스젠더의 성결정권”을 보면, 호적정정을 신청하기 위한 자리에 “엄마”는 절대 동의하지 않아 나타나지도 않지만 “아빠”는 도장을 가지고 나온다. 이렇게 부모 중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가는 그 사람의 성별이 아니라 일종에 친밀도 혹은 더 자주 얘기를 나눈 관계와 좀 더 관련 있다고 여긴다. 지금의 사회에선 “여성”들이 양육에 더 많은 책임을 강요받는다는 점에서 자식들과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거나 관계를 엮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 뿐이다.

루인의 경험으론 이런 공포에 따른 혐오 반응은 성별/양성에 별 상관없다고 느낀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루인의 몸속에, 몸을 아래위로 훑으면서 공포/혐오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이른바 “여성”젠더로 드랙한 이들이다. 이른바 아저씨들은 차라리 심드렁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아예 관심이 없었긴 하지만 별로 그러진 않았다.

“여성”이 “남성”보다 공포와 혐오가 더 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물리적인 폭력과 욕설로 표현하거나 눈빛과 표정으로 표현하는 등의 방식의 차이지 성별에 따라 더하고 덜하다는 식으로 구분할 순 없다. 페미니스트라고 혐오나 공포가 없는 것이 아니고(때로 더 심하고) 마초라고 더 심한 것이 아니다(미국 흑인공동체에서의 경우, 특히 힙합 음악을 듣고 있으면 혐오발화를 상당히 심하게 해서 흑인”남성”들은 혐오가 더 심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가장 절친한 친구 중에 퀴어나 트랜스가 있는 경우도 많다. 어떤 신부는 자신이 ‘동성애’자면서도 설교시간 금지 발화를 하기도 한다).

최근 일련의 경험들에, 예전에 그 클럽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