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와 이반(퀴어), [왕의 남자] 2부

1부는 여기지만, 별 내용 없음.

예전에, 비록 90년대 들어 트랜스 이론이 “뜨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반queer이론의 범주 내에서만 존재 가능하단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비록 트랜스가 유행 담론처럼 인구에 회자되지만 이반담론의 틀 내에서 얘기될 때만 그렇지 이반담론과 거리를 둘 땐 외면당한다는 얘기였다. 루인은 조금은 다른 맥락에서 이 말이 와 닿았다.

작년 봄 이후, 비’이성애’자로 커밍아웃을 하고 나면, 대체적인 반응은, 무반응이다. 그럴 수밖에 없음이 루인이 커밍아웃한 공간은 “정치적으로 올바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태도에 강박이 있는 곳이라, 어떤 소수자/약자의 정치학에도 대체로 무반응으로 반응했다. 단 한 분만, 커밍아웃을 걱정해주었다. 문제는 이런 반응들이 아니다.

커밍아웃을 했을 때, 루인은 비’이성애’자라고 했었다. 대체로 비’이성애’자가 뭔지를 묻는 경우는 없었고, 이반(혹은 퀴어)과 어떻게 다를 수도 있는지 고민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커밍아웃 이후, 사람들은 ‘동성애’ 얘기만 나오면 루인을 (몰래) 쳐다보거나, ‘동성애’에 관해선 루인의 말이 ‘진짜’인 것처럼 반응하거나, 과도하게 섹슈얼리티로(여기선 성적 지향/선호) 주제를 좁히는 경향이 있음을 느꼈다. 몰래 쳐다보는 건 양호한 편이고, ‘동성애’자란 말을 하며 루인을 노골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루인 역시 비’이성애’자란 단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비’이성애’와 이반을 구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것으로 사용하지도 않았다. 비’이성애’는 관계 맺는 방식의 정치학으로 이반은 성정체성의 정치학으로 미묘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건, 스스로도 정리하고 싶어 쓴 글 이후였다.

이반이란 단어를 쓸 때 마다 모호함을 느끼는데, 루인에게 변태집단으로서의 이반은 소위 말하는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트랜스)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였”다. 비록 주류 담론에선 초기의 이런 의미와는 달리 ‘동성애’만을 한정하는 의미로 쓴다곤 하지만,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기에 개의치 않았다.

이런 사용이, 비록 ‘안전’했을지는 몰라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음을 깨닫기까지,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길수도 있는 시간이 걸렸다. 아니, 아주 불편한 방법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단지 동성애자’로 루인을 간주했다. 비’이성애’든 이반이든, 커밍아웃을 곧 ‘동성애’로 간주하는 것이 때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까. 이 경험은 비록 모든 집단에선 아니지만 어떤 집단에선 ‘동성애’가 주류화되어 있음을 느끼게 했다.

‘양성애’자의 경우, ‘동성애’ 집단과 ‘이성애’ 집단 모두에서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도 성적 소수자와 관련한 얘기가 나오면 ‘동성애’만을 주제로 얘기했다. 그렇지 않은 성적 정체성은 어디에서도 부재했다. “단지 동성애가 가장 가시적이니까 동성애를 대표로 해서 말했다”는 식의 언설도 마찬가지 내용이다. 비록 더 가시화되어 있다고 해서 대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경험의 맥락이 너무도 다른데 성적 소수자를 주제로 ‘동성애’만 말하고 다 말했다고 (착각)하는 건, 폭력의 재생산이다.

그럼 처음부터 “자세하게”/”구체적”으로 커밍아웃하지 않았냐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자세하게” 혹은 “구체적”으로 커밍아웃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은 곧 ‘동성애’자다란 인식이 폭력이다. “동성애자까지는 괜찮은데 양성애자는 정말 아니다(역겹다)”란 언설을 접한 적이 있는 경험 속에서, “왜 용기 있게 자세하게” 말하지 않느냐는 식의 반응은 권력 과시이다.

이것이, [Run To 루인]에서 트랜스란 키워드를 새로 만든 이유이다. [왕의 남자]를 트랜스로 읽은 이유도 이 지점이 교차한다. 루인에게 공길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었다. 때론 크로스 드레서(cross dresser: 이성복장착용자란 번역어가 있긴 하지만 ‘이성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음역音譯 만큼이나 안 좋은 표현이다)일 수도 있겠지만, 젠더(이성애)구조에서 언어가 없을 뿐, ‘남성’/’여성’ 어느 쪽도 아니면서 모두인 성정체성을 가진 인물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애시 당초, ‘이성애’라고도 ‘동성애’라고도 ‘양성애’라고도 규정지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성애 영화다”, “퀴어 영화다”, 란 식의 언설들이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청연]이 “여류”비행사 영화라고?

라디오 듣다가 처음 알았다. [청연]이 (최초의) 여류비행사 영화라는 ‘사실’을.

최초의 ‘남성’비행사란 말은 없어도 최초의 ‘여성’비행사란 말은 있다. 최초의 비행사란 말은 있는데, 최초의 비행사=최초의 ‘남성’비행사란 뜻으로 ‘남성’이 인간을 대표한다는 의미다.

뭐, 이런 인식까지 바란 건 아니다. 하지만, 여류비행사라니!!! 지금도 종종 접할 수 있는데, 여류작가란 말이 있다. 박완서선생님도 7, 80년대엔 “소녀적 감수성을 간직한 여류작가”란 평을 들었다(근데 “소녀적 감수성”은 뭐야?). 여류작가, 여류비행사 등등, 여류라는 말은 ‘여성’이 취미삼아, 풍류삼아, 놀이삼아 한다는 의미다. 즉, ‘남성’이 하면 전문적이고 진지한 것이지만 ‘여성’이 하면 취미일 뿐, “진짜”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어머니”되기, 가사 노동 등등)는 뜻이다.

(“금남의 벽을 깬, 최초의 남성”과 같은 말은 있어도 남류작가란 말은 더더욱 없다. HWP에선 고쳐야 할 글자로 나온다.)

여류비행사라니. 영화 어디에도 박경원이 취미로, 심심풀이로 비행을 하지 않는다. 버럭, 화나는 일이다!

황우석 사태를 채식주의 페미니즘으로 읽기 위한 단초

07. 정작 낙농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들이 “생산”한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유 시기에만 생산할 수 있는 우유를 일년 내내 생산하기 위해 각종 호르몬을 주사하기 때문이다. 양계장에선 하루에도 몇 번씩 알을 낳게 하기 위해, 호르몬을 주사하거나 인공조명을 이용한다고 한다. 호르몬을 맞는 젖소나 닭은 모두 암컷이다.
이 글을 쓰면서 황우석 사태를 떠올렸다. ‘여성’의 난자를 대량으로 “채취”하기 위해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과 우유 혹은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 사이에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젠더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식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단면이면서 육식이데올로기와 동물살해가 젠더폭력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드러내는 단면이 아닐까.

#내일 있을 세미나 발제를 위해 쓰고 있는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내일 관련 얘기를 할 수도 있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황우석 사태를 읽는 무수히 많은 입장들 중 하나는 채식주의 페미니즘이란 얘기를 하고 싶다. 상상력이 세상을 더욱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게 하는 감각이라면 채식주의 페미니즘도 그런 상상력의 하나이다.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