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신이란 허상(혹은 폭력)

공간/사물과 자신과의 관계에 관한 글을 읽다가 어째서 지름신이란 단어가 그렇게 불편하고 쓰기 싫었는지 깨달았다.

무언가를 구매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유한다는 의미일까,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다는 의미일까. 루인이 살고 있는 집을 玄牝이라 이름을 붙이고 부르는 것, 사용하는 컴퓨터에 나스타샤란 닉을 붙여 부르는 일 등은 흔히 사물이라고 부르는 ‘소유’물이 아니라 루인과 관계를 맺으며(상호작용하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간이라는 존재, 항상 만나는 ‘물건’들은 무미건조한 고정물이 아니라 항상 루인과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키워드 “玄牝”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몸이 아프면 먼지가 쌓인다”도 그런 의미이다.

지름신이란 말은, 소비자본주의적 행동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구매하는 물건을 관계 맺는 대상이 아니라 소유물로 여기는 관점을 내포하고, 바로 그것이 불편하다.

물론 사람마다 공간이나 ‘물건’과 관계 맺기 방식은 다르겠지만, 지름신이란 용어가 불편한 건 소비가 단순히 일순간의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를 전후해 고민과 긴장이 발생하고 소비를 통해 새로운 환경/몸/관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글의 힘에 대한 ‘순진한’ 기대

신문이나 각종 매체에선 미디어 세대라고 종이에 활자화된 글 보다는 이미지에 더 익숙한 세대라고 하지만, 루인은 미디어/이미지 보다는 문자가 더 익숙하고 친밀하다. 그래서 아직도 글의 힘을 믿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에 와선 환상이나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낭만에 가까운 일이란 건 알지만.

글을 쓰며, 혹은 활자화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몸앓이를 하며 가지는 바람 중엔, 이런 글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굳이 루인의 글이 아니라도 한 편의 글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서 다른 사람은 여러 의미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타인을 말하기도 하고 이반queer이 아닌 사람들, 비이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 ‘장애’인이 아닌 비‘장애’인 등, 다른 위치positioning를 가지는 사람을 의미한다. 동시에 피해 경험자부터 가해자까지 한 편의 글을 통해 아픔으로 자신을 변화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다면-글에 그런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순진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런 바람을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 시대에 아직도 그런 꿈을 꾸느냐고, 시대에 뒤쳐져도 너무 뒤쳐진다고 말하겠지만,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바란다. 꿈을 그리는 사람은 결국 그 꿈과 닮게 된다고 그러니까.

토론

토론이라는 것은 상대와의 소통 지점을 찾는 것이며 그래서 논의를 풍부하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토론에서 이기려 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루인을 만날 때 마다 아프다. 이런 태도 자체가 상대에 대한 폭력이니며 결국 서로를 외롭게 하는 일이다.

죄송하고 우울하다. 우울하고 죄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