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이,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이 적은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말은 하지 않지만 상대의 상황과 접하면 아픔이 전혀 져서 그 고민을 루인이 하기 때문이다.
“쿨~”하고 싶어 안달하기도 한다. 쿨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개입하고 더 많은 상처에 더 민감하게 노출된다는 것. 결국 이것이 살아가는 힘이다.
아는 사람이,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이 적은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말은 하지 않지만 상대의 상황과 접하면 아픔이 전혀 져서 그 고민을 루인이 하기 때문이다.
“쿨~”하고 싶어 안달하기도 한다. 쿨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개입하고 더 많은 상처에 더 민감하게 노출된다는 것. 결국 이것이 살아가는 힘이다.

옮긴이: 김정훈
출판사: 삼인
가격: 12,000원
근대국민교육제도가 다른 행복을 차단하고 획일화된 노예를 찍어내는 제도임을 비판하면서 그런 교육이 글쓰기 또한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책 홍보 리본에 “선생님, 선생님, 난 이걸 할 때는 괴로워요.” “그럼, 그걸 하지 말려무나.”라고 적혀 있는데 이 대화 내용이 책 내용을 함축한다. 덧붙이면 책의 영어 제목이 [물 위로 걷기Walking On Water]인데, 물 위를 걷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정말 불가능 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자기 믿음, 일전에 루인이 쓴 벼룩과 코끼리 이야기처럼 하기도 전에 “난 할 수 없을 거야”란 믿음이 불가능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저자는 하고 싶은 것으로 즐겁고 행복한 글쓰기를 지향하는데, 어떤 글을 쓰다가 고통스러우면 쓰지 말고 그 글이 즐거울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개인은 누구나 자기만의 언어가 있기에 뭔가를 가르칠 필요 없이 개개인의 언어를 끄집어 낼 수 있는 환경만 제공한다면 누구나 멋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교육(education)이란 단어 자체가 끌어내다(e-ducere)란 산파의 언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글쓰기 수업 강사임에도 글쓰기 수업 시간에 숨바꼭질을 한다거나 금기시 하는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읽으면서 익숙한 세계관(조한혜정 선생님의 [글 읽기와 삶 읽기]를 떠올렸다)이면서도 갈증을 해결하는 내용이 많이 좋았다.
“누가 나한테 말해줬더라면 좋았을 셋째 얘기는, 난 그렇게 겁쟁이가 아니니까 앞으로 밀고 나아가고, 다른 사람들은 꺼지라고 요구하라는 겁니다.” (p.60)
핵심은, ―힘주어 말하건대― 그들을 딴죽 거는 사람으로 바꿔놓고는 서로서로 주장들을 찢어발기도록 하는 게 아니라, 앞뒤가 안 맞고 약한 지점들을 상냥하게 함께 찾아내고, 생각을 넓혀 앞뒤 안 맞는 구석을 건둥그리도록 돕고, 생각을 갈고 닦아 허술함을 깎아내도록 돕는 것이다.
진짜 핵심은, 늘 그렇듯, 재밌게 즐기는 것이다. (p.138)
“(…) 우리는 실제로는 관계와 경험들로 짠 망입니다. 나는, 내가 여태까지 겪은 모든 일, 내가 들이마신 모든 숨, 내가 여태까지 한 모든 말, 내가 여태까지 먹은 모든 음식 한 조각 한 조각과 더불어, 바로 지금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가로지름입니다. 난 전혀 어떤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과정입니다. 아니 심지어 그것조차 아닙니다. 우리 언어로는 나를 기술할 수 없는데요. 문장은 명사와 동사를 요구하게 마련이니까요. 자, 봐요. 번갯불이 번쩍하고 칩니다. 그러나 번갯불은 뭡니까? 번갯불이 따로 있다가 번쩍하고 치는 그런 건 아니죠. 그것은 번쩍하는 어떤 과정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p.212)
※저자의 글도 재밌지만 번역도 성실해서 괜찮다.
그전까지는 몰랐다가 이랑들과 만나고서야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비단 기분 나쁜 상황 뿐 아니라 좋은 상황, 놀라는 상황 등 그 상황에 따른 감정이 얼굴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목소리를 통해서도 그런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정작 루인은 그런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좋은 점인 듯 하다.)
지금은 덜한 편이지만, 한땐 말대꾸가 심해서 욕을 먹기도 했다. 이건 나름 협상을 통해, 요즘은 거의 안 하는 편인데, 사실 협상이라기보다는, 말을 해도 안 해도 욕을 먹었기 때문에 나타난 반응이다. (일종의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표정관리”하지 않고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얼굴/몸으로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역시, 말대꾸의 한 방식이라 몸앓는다. 어차피 말해봤자 소용없음을 알 때, 소리가 아닌 몸의 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니까. “대드”는 것 역시 말대꾸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라고 몸앓는다.
지난여름, 벨 훅스bell hooks의 [Talking Back]을 읽으며 가장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는 제목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였다. 영어 문법도 제대로 모르고 한 페이지에 사전에서 찾는 단어가 15개를 넘나드는 ‘실력’에, (자랑스럽게도-_-;;) 여전히 토익과 토플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오죽하랴만, 대충 감을 잡았으면서도 그렇게 번역하기를 꺼렸다. “말대꾸”라니. 페미니즘 책의 제목을 “말대꾸”로 번역한다는 것이 왠지 안 어울린다는 편견(편견의 견見 역시 “보다”는 의미를 지닌다)으로 인해 뭔가 더 그럴듯한 것이 없나, 했다. (“그럴듯한” 제목은 뭘까?)
말대꾸. 이 말을 책 제목으로 삼기를 꺼린 이유는, 말대꾸가 지니는 의미를 몸앓지 않은 체, 말대꾸는 나쁜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몸에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설적인 상황이라니. “어른”들이 말대꾸를 싫어한다는 건, 말대꾸가 그들에게 불편하다는 의미인데, 말대꾸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말대꾸는, 선생과 학생, 어른과 아이처럼 권력의 위계질서가 너무도 강력한 상황에서 그 권위를 무시하고(인정하지 않고) 권력에 도전하며 목소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대드”는 것 역시 그 표현 자체에 나이 혹은 권위 등에 의한 권력에 대항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어른”들에게서 욕먹기 딱 좋고 심지어 “저래서 사회생활 어떻게 할지 걱정이다”란 소리를 몸에 달고 살게 되지만 그런들 어떠랴. 툭툭 던지는 말대꾸가 상당히 유쾌한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