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토끼의 “저주”

#마지막 즈음에 가면 스포일러 살짝 있어요.

예전에 봤던 [월래스와 그로밋]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몸에 각인되어 있는 기억을 되살리기가 쉽지 않다. 클레이메이션이라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좋아했을까. 마냥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조조로 영화를 보며 깔깔 웃기도 했지만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다. 드림웍스나 다른 헐리우드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패러디를 [월래스와 그로밋]에서도 봐야 한다는 사실과 전형처럼 여겨지는 헐리우드 ‘공식’이 엿보이면서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의 한 부분이 무너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역시나 헐리우드완 손잡지 않는 것이 좋았을까.

그래도 재미는 있다. 예상치도 못한 [마다가스카의 펭귄]들은 귀엽고^^ 등장하는 토끼는 너무 깜찍해서, 으흐흐, 인형으로 나오면 꼮 가지고 싶을 정도.

뭐, 이 정도로 끝내기로 하자. 20세기 초반 재산권을 가진 ‘여성’들의 재산을 탐내며 질투와 음모를 벌였던 ‘남성’들의 행각이(뤼팽 시리즈에 이런 모습들이 잘 나온다) 여기서도 반복된다는 점, 젠더역할gender rule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 주는 불편함 들과 마지막에 결혼을 한다거나 하지 않고 친구로 남는다는 점이 몸에 들었음을 덧붙이며.

자기 글이 주는 불안

특히 이곳에 글을 쓸 때마다, 글의 내용과 형식(이런 식의 구분이 가능하다면)이 모순을 일으키며 충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 시달린다. 글을 통해 비판하는 바로 그러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분명 그런 모순 속에 있을 것이다.

이런 불안들이 글쓰기를 힘들게 하지만 그렇다고 글쓰기를 중단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루인에게 1990년대는 소설 그리고/혹은 시를 쓰던 시절이었다. 재능은 없었지만 즐거웠고 미친 듯이 좋아했다. 하지만 서서히 힘들었고 지쳐갔고 어느 순간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그때가 99년. 결국 모든 걸 불태우고 끝내버렸다.

왜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꺾어진 골목이었음을 몰랐을까.

이후, 다시는,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 없게 하는 자기 저주를 퍼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글을 쓰고 싶었지만 두 번 다시는 글을 쓰지 못했고 그렇게 잊혀진 기억이 되었다.

힘들어 질수록 더 많은 글을 생산하고 있다. 불안하고 글쓰기가 힘들어질수록 더 열심히 글을 쓰겠다는 다짐. 관계가 불안할수록 더 많은 대화를 통해 소통의 새로운 장으로 들어가듯 글쓰기의 불안이 심해질수록 더 많은 글을 씀으로서 새로운 길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곳이 사실은 꺾어진 골목임을 깨달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여하튼 간에 계속해서 이곳에 쓰는 글들이 불안하다.

<신돈>: 퀴어, 페미니즘/페미니스트

결국 어제 나스타샤와 만난 [신돈]을 10회까지 봤고 오늘 아침 새로 만난 11회도 봤다-_-;; (“신도니언”이라는 말도 있더라고요..크크크) 그렇다고 [신돈]에 대한 리뷰를 쓸 건 아니고, [신돈]을 읽으며 루인이 읽고 싶은 몇 가지 코드가 있어서. 우훗.

원현이 신돈(편조)을 향한 마음과 안도치가 공민왕을 향한 마음은 ‘게이’ 관계로 읽힌다. 후후후. 물론 이런 식의 독해가 얼마간 젠더(‘이성애’)적인 발상에 기반하고 있지만, 특히 도치가 공민왕을 향해 바라보는 눈빛은 절절한 애정을 나타낸다([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와 샘처럼). 한채윤씨가 지적했듯 이반queer 관계가 낯설지 않은 한국의 동성사회(homosocial)에서 이런 코드를 찾기는 어렵지 않지만 [대장금](보지는 않았다) 이후 또 한 번 이반코드가 가득한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싶다.

루인이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던, 노국대장공주는 애증이 교차하는 인물. 한 편으론 ‘재앙’이고 한 편으론 페미니스트라고 보고 있다(노국대장공주를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한다면 욕하려나? 흐흐)

[신돈]을 보며 혼란스러운 부분은 어떤 부분은 근대 이후에 나타난 연애 관계나 조선 중기 이후에나 나타나기 시작한 이데올로기들이 쉽게 등장한다는 점. 일테면 ‘연애’ 장면이나 이제현의 딸 혜비의 정조 관념은 얼마간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 루인이 알고 있는 짧은 지식(!)으론 이런 정조 관념이 고려 후기엔 별로 심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 아닐 수도 있다는;;; 암튼 하고 싶은 말은 노국대장공주의 캐릭터 특징은 (본 적은 없지만) [다모]의 채옥을 연상케 하는데, 노국대장공주는 현명하고 똑똑하며 내조도 잘하고 무술까지 잘하는 슈퍼 울트라 메가톤급이며, 이런 ‘여성’상은 현재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이상적(이데올로기적) ‘여성’상에 부합하는 모습이다. 현모양처는 기본이고 돈도 잘 벌고 똑똑하고 등등. 그렇기에 이런 노국대장공주의 재현(representation, projection)은 ‘재앙’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그래서 뭔가 ‘다른’) ‘여성’상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바로 그 ‘여성’상이다.

그럼에도 노국대장공주가 좋은 이유는 어제도 적었듯이 변태하는 삶 때문이다. 비단 변태하는 삶 때문만은 아니다. 흔히들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그리지만 사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가 ‘아니다.’ 죽으며 이원수(남편)에게 남긴 유언이 “재혼하면 귀신으로 나타날 것이다”였다. 당시의 그리고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이런 유언이 현모양처의 그것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현모양처란 이미지는 젠더사회/가부장제에서 필요한 모습으로 재현한 것일 뿐이다. 노국대장공주의 삶이 그렇다. 원나라의 수도에서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나 고려 땅을 달라고 하는 모습이나 실상 노국대장공주의 실제 욕망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인 듯 하다. 권력을 요구하는 모습. 하지만 당시의 유교 관념에서 왕이 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왕비가 되는 것이다. ([신돈]에 등장하는, 권력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실제 권력을 성취하는 방법이 섭정이나 황후가 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여성’들을 ‘악녀’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젠더화된 폭력/성폭력이다.) 즉, 나이팅게일이 전쟁에 참여하고 싶으나 그런 욕망이 좌절되자 간호장교가 되었듯이(“백의의 천사”란 말은 성별제도에서 만들어낸 재현/왜곡이다) 노국대장공주 역시 자신의 ‘권력지향’에의 욕망을 당시의 사회제도의 틀 내에서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공민왕을 선택했다. 이런 노국대장공주의 행동은 몸의 언어를 듣고 몸/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협상력이다. 바로 이런 모습(변태하는 삶과 협상력)이 루인으로 하여금 노국대장공주를 페미니스트로 읽고 싶게끔 한다. (물론 페미니스트/페미니즘을 어떻게 정의 하느냐에 따라 루인식의 독해가 얼토당토 안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나저나 무려 60회라던데, 과연 끝까지 다 볼까나. 훗, 그 여부는 MBC에 달려 있군-_-;; (그렇다면 처음으로 보는 드라마가 되려나? 지금껏 TV라곤 안 보고 살았으니까..)

#어쩌면 기황후를 위한 변명이란 글을 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