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2 – 코끼리, 벼룩 그리고 부재하는 한계

언젠가 어디에서 읽은 글: 써커스단에서 어린 코끼리를 “사육”할 땐 튼튼한 쇠사슬로 묶어 둔다고 한다. 하지만 힘이 엄청나다고 하는 어른 코끼리에겐 오히려 쉽게 끊을 수 있는 가죽끈으로 묶어 둔다고 한다. 쇠사슬에 묶인 어린 코끼리는 도망치려해도 도망칠 수 없고 결국엔 자신을 묶고 있는 줄(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도 포기한다고 한다. 이런 포기가 결국 쉽게 끊을 수 있는 가죽끈으로 묶어 두어도 끊고 도망치지 않게(못하게) 한다.

벼룩에 관한 유명한 얘기: 흔히 벼룩은 몇 미터씩(과장인가;;) 뛸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벼룩을 30Cm 높이의 실린더에 가두고 뚜껑을 닫으면 벼룩은 첨엔 계속 뚜껑에 부딪히며 더 높이 뛰려고 하지만 결국엔 30Cm 만큼만 뛴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훈련’한 벼룩을 60Cm 실린더에 옮겨도 벼룩은 여전히 30Cm 만큼만 뛸 뿐 그 이상 뛰지 않는다고 한다.

소논문(레포트가 요약보고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앞으로는 논문이라고 쓸까 한다, 이제껏 요약보고서를 써 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을 쓸 때 마다 항상 루인의 한계점을 만나길 기대하는 편이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현재의 루인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기에 소논문 숙제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소논문 쓰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단지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만나서가 아니라 이런 한계를 만남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한계가 더 이상 한계가 아니게 되며 새로운 한계점을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이렇게 자신의 새로운 한계점과 만나는 과정이기에 글을 쓴 이후,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하다.

코끼리의 가죽끈 얘기나 벼룩 이야기를 쓴 건, 바로 이 한계라는 지점 때문이다. 한국의 제도화되고 정형화된 교육 틀과 루인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애혈연가족제도에서 자랐기에 루인의 많은 부분들이 깎여 나갔거나 불가능한 기대로 여기게끔 배웠다. 하지만 이런 불가능성은 어떤 의미에선 두려움일 지도 모른다는 몸앓이를 종종 한다. 더 잘 할 수 있음에도, 다른 세상으로 횡단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서성이고 망설이는 이유는 “넌 할 수 없어” 혹은 “너 따위가 어떻게 그런 걸 해” 라는 식의 말들을 통해 생겨난 보이지 않은 벽이 주는 두려움은 아닐까 하는 몸앓이.

루인에게 한계점이 없음을 깨닫게 해 준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물론 여기서의 글쓰기는 소설이나 시가 아니라 소논문에 한정되겠지만(소설이나 시는 루인의 한계, 높은 벽을 선명하게 만난 계기이다). 그렇기에 루인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는 루인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두려움의 벽들을 넘어서려는 행위이다.

비단 루인 뿐이랴. 글 쓰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다.

글쓰기1 – 노국대장공주와 변태

오전부터 [신돈]을 봤다. 한 편만 보고 다른 일 해야지 했는데 6편까지 보고서야 중단했다. 이런, 이런. 그나마 숨책가야지 하는 계획이라도 있었으니 가능했지 아니면 10편까지 몰아서 다 봤을 듯;;;

이곳, [Run To 루인]의 포스팅 ‘원칙’이라면 최소한 하루에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이다. 가능한 한 하루라도 거르지 않고 매일 한 편씩의 글을 쓰는 것. 글쓰기를 좋아하는 편인데(고통의 쾌락?) 왜 글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지금 루인의 위치를 읽으며 현재의 루인을 알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글쓰기 이전의 루인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이다.

글을 쓰든 책을 읽든 주로 낮에 하길 선호하지만 블로그에 쓰는 글만큼은 저녁 혹은 밤에 하는 이유는 (나스타샤와 노는 시간이 주로 저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날 하루의 루인을 읽기 위해서이다. 어딘가에 제출하는 글이나 이랑에 올리기 위한 글과는 달리(이런 글들은 쓰는데 일주일가량 걸린다) 그날 몸앓았던 어떤 지점들을 정리하고 그 몸앓이들을 설명하고 그 몸앓이 이전의 루인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쓰는 글은 그 만큼 정리되지 않은 날(raw)것이며 글을 공개한 순간 글 내용과는 다른(그 글의 내용을 비판하는) 루인이 되기도 한다.

[신돈]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노국대장공주이다(사실, 기황후도 꽤나 매력적이다-_-;;). 징기스칸의 말을 들먹이며 사막으로 유목민으로 돌아가자는 노국대장공주의 말/몸은 아마 루인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할 요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유목민으로서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노국대장공주를 보고 있으면 요즘 유행처럼 말하는 “유목적 주체”나 “유목적 사유” 혹은 루인이 좋아하는 “변태하는 삶”이 떠오른다. 강박적일 정도로 변화에 집착하는 편인 루인이기에 한 자리에 정착한 후 고정된 삶, 변화하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변태에 대한 ‘오해’는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성(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발악)의 반영일 가능성이 크듯 유목민으로 돌아가자는 노국대장공주의 몸은 변태하자는 말로 들린다. 물론 사람마다 노국대장공주의 이런 몸―징기스칸의 말을 상기하며 몽고인의 ‘전통’을 되찾자는―을 다르게 해석할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루인은 노국대장공주의 이런 몸이 과거로의 회귀라기보다는 현재의 정체하고 있는 삶, 고여서 썩고 곪아가고 있는 삶에서 벗어나 유목하는 삶, 매 순간 새로운 상황에서 변화하는 삶을 살자는 것으로 읽는다.

유목한다는 것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몇 곳의 자리를 정해놓고 움직인다고 해도 그 자리는 매 순간 변하는 공간이기에 그곳에서의 삶 역시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사실 정착하고 사는 삶, 변화 없는 삶은 없다고 보며 그런 삶이 있다는 믿음을 일종의 환상으로 여긴다.) 앞으로의 노국대장공주가 어떤 식으로 묘사될지는 알 수 없지만 노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칠 수 있는 고려를 만들려는 노력은 원나라 혹은 몽고에 대한 배신이라거나 부부라는 성역할gender rule에 따라 “지아비”를 따른 것이 아니라 유목하는 삶, 변태하는 삶을 사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M_ 또한.. | 하하하.. |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말하는 신돈이란 인물 역시 매 순간 변화하며 개혁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은 잃을 것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비슷한 맥락에서 신돈의 웃음소리는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짜르트의 웃음처럼 간단하게 기존의 권력/권위를 조롱하는 웃음으로 들린다._M#]

이런 맥락에서 글쓰기는 유목하는 행위라고 본다. 몸이 글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자리를 잡)는 순간,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기에.

소원

어제 이랑 친구가 갑자기, 누군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무얼 말하겠느냐고 묻자, 잠시 당황하다(갑자기 물어서…) 곧 바로 한 대답이, “소원 백 가지 들어주세요”였다.

흔히 동화라고 불리거나 옛날이야기로 불리는 이야기들을 보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거나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 꼭 그것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한 가지 소원의 경우는 대개 그 상황에서 그것 말고는 달리 선택할 것이 없는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고(일테면 죽은 누군가를 살려달라는 식으로) 세 가지일 때도 그렇게 개개의 것으로 이루기 마련이다. 루인이 이상하게 여겼던 건, 왜 “소원 백 가지 들어주세요”라고 소원을 말 하지 않느냐는 것. 그러고 나서 99가지 말하고 한 가지 남으면, 다시 백 가지…-_-;;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1조가 들어 있는 통장은 어떨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화폐로 평가되고 모든 가치가 화폐로 획일화되고 있으니까. 그래서 1조의 잔고가 있는 통장을 가진다면 지금 루인이 회원으로 매달 조금씩의 회비를 내고 있는 운동단체/NGO들에 더 많은 회비를 낼 수 있을 테고 회원이 되고 싶음에도 최소한의 생활비에 걸려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 곳에도 회원이 될 수 있을 테고, 루인이 바라는 단체를 만들 수도 있을 테고. …이렇게 소원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은, 유일하지만 가벼움이라는 속성을 지닌 소원을 통해 다른 것을 이루긴 싫다는 루인식의 윤리 때문이다. 대화와 소통 그리고 고통이 따르겠지만 엮어갈 관계에의 노력처럼 과정을 통해 많은 앎이 따를 일들을 소원을 통해 이루긴 싫기 때문에(이런 몸으로 살기에 “폭력(혹은 빈곤)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라던가 “모두가 맥락으로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라는 식의 ‘소원’을 망설이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천박”하지만 필요한 현금을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 모두 상상에 불과하고 정말 누군가가 루인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뭐든지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에 말하겠다며 미룰게 분명하다. 다음에 필요하면 말 할께, 라고 미루면서, 아마 평생 그렇게 미루면서 언제든 이룰 수 있는 소원이 한 가지 있다는 그 가능성만 가진 체 살아가겠지. 결국 사용하지도 않고 죽을 한 가지 소원. 이건 어떤 의미에선 ‘희망’을 안고 살겠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고통을 유예하며 그 유예의 쾌락을 느끼듯 그런 의미에서 미루고 싶은 것이다. 이룰 수 있을 쾌락을 연장하고 미루어서 쾌락의 정점엔 도달하지 않지만 그 정점에 도달할 듯 말 듯 하는 바로 그 상태로 살고 싶으니까. 뭐든지 한 가지를 손쉽게 이룰 수 있다는 쾌락, 그 유일할 수밖에 없는 쾌락을 당장 누리고 싶지 않고 그런 쾌락을 통해 삶의 또 하나의 쾌락을 누리고 싶기에 죽기 전까지 아니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소원을 이루지 않겠지.

(루인이란 그런 인간이다. 다치면 아픈 곳을 괜히 콕콕 찔러보는 인간이 루인이고 그렇게 찌르다 더 심하게 아플까봐 걱정해서 찌를 듯 찌르지 않은 상태를 즐기는 것도 루인다.)

어쩌면 한 가지 이룰 수 있는 소원이 있음에도 미루려는 것은, 이루는 순간이 (한 과정이 끝나는) 결말이라면 바로 그 “결말”이라는 것, 즉 변화의 과정이 끝나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은 매 순간 변화하는데 이런 식의 소원 담론은 매 순간 변화하는 삶을 고정시키고 싶은 욕망의 투사로 여겨진다. 변화하지 않고 결론이 나는 삶이라면 끔찍하게 지루하기에 소원 같은 것 이루지 않고 평생 유예 시키며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살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