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공포/혐오self-phobia

8월 말 즈음이었나, 영문텍스트 읽기에 대한 몇 개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후, 대충 6개 정도의 논문을 챙겼고 꾸준히 혹은 게으르게 읽어 나갔고 그렇게 5개의 글을 읽고 나니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났다. 남은 한 편은 영화 리뷰의 성격이 짙은 글이라 아직은 읽을 수가 없다. 그 영화 두 편을 구해서 본다면, 그제야 읽겠지.

[#M_ 게으름에 대한 변명? | !!! |

논문 5편 읽는데 한 달여의 시간이 걸린다는 건, 게으르다 못해 빈둥거리며 놀았다는 말 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이렇게 시간이 걸린 것은 개별 논문의 분량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중간에 추석이라든가 다른 일이 좀 있어서 이전만큼 충분한 시간을 투자할 수 없어서 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 권의 책일 경우, 매일 같이 정해진 페이지만큼 읽으면 되지만 논문의 경우는 꼭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스스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데, 왜 책을 읽을 땐 매일 정해진 분량을 꾸준히 읽는데 논문일 때는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다. 뭐, 이래저래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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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의 글을 읽는 동안, 몸이 많이도 변했다. (스스로는 그렇게 믿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몸은 더 우울해졌고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을 그런 몸앓이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 몸앓이를 통해 몸을 다시 위치 짓는다면 기존의 몸을 다 바꿔야 한다. 아마 그렇게 진행할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가장 큰 두려움은 타인의 공포/혐오phobia가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보내는 그것이다. 자기공포/혐오를 극복하는 과정이 몸을 통한 앎과 만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경험과 글 읽기를 통한 지금, 자신의 포비아를 만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몸 앓고 있다. 한 걸음 딛기 위한 무수한 망설임과 갈등 속에 있고 그래서 이전엔 그다지 정치적이지 않게 보이던 영역이 첨예한 정치적 현상으로 다가왔다.

아울러 몇 개의 언어를 몸 앓고 있다. 물론 그 언어를 이루는 개개의 단어들에 대한 이해/몸앓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과정 자체가 상당한 시간을 요할 것이다. (어쩌면 평생 걸릴 일인지도 모른다.) 그 언어들 중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로 루인의 정치성/위치가 드러나겠지. 그렇다고 그 중 하나만 쓰고 다른 언어는 쓰지 않을 것이냐면 그렇지는 않다.

어쨌거나 이제 다시 bell hooks읽기의 시간이 돌아왔다. 다음 주는 다섯 편의 논문을 다시 한 번 더 읽으며 정리할 것이고 다담 주부터 읽을 예정. 다음 주말에 바빠 새로운 글 읽기가 애매해서 일전에 바꾼 일정이다.

아, 벌써부터 두근두근!

혈연가족이란 악몽

혈연가족을 만나는 날이면 묻어둔 앙금이 다시 몸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니고 약간의 살의를 느끼기도 한다.

한국은 혈연가족주의/정상혈연가족이데올로기가 지독하게 강한 사회이지만 그렇다고 혈연가족간에 친밀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혈연가족은 상당히 도구적인데 이 도구성을 친밀함으로 가장한다.

루인과 루인의 혈연가족 관계가 이렇다. 이 불편하고 종종 악연이라고 부르는 관계가 만날 때 서로의 역할은 부딪힐 수밖에 없다. 루인은 혈연가족의 도구적 성질을 도구성 그 자체로 드러내려고 하고 혈연가족들은 이 도구성이 가족간의 친밀함, ‘애정’이라 믿으려 행동한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충돌이 발생하고 서로가 상처받는다.

또 부천에 갈 일이 있어 갔다가 간신히 가라앉힌 오래된 앙금들을 모두 들쑤시듯 휘젖고 말았다. 지상에서 가장 먼저 연락을 끊고 싶은 인연이 있다면 혈연가족이다.

왜 공부/연구를 하는가 (혹은 어떻게 공부를 하는가)

며칠 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던진 질문이다. 왜 공부 혹은 연구를 하는가.

수업시간에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루인에겐 어느 정도 선명한 편이다. 왜 공부를 하느냐면 루인의 경험/삶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그 외의 별다른 ‘욕심’은 없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루인의 관심은 루인이고 그래서 루인의 경험을 읽는데 우선적인 관심이 있었다. 고리타분하고 말장난 같은 이론 따위 루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 이론이 전 세계적인 유행이라고 해도 그것이 루인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면 하나의 자극제는 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까지 대단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애써 배워야겠다는 몸앓이도 들지 않았다.

항상 이 몸앓이가 우선시 되고 그 이후 어떤 텍스트들을 찾는 순서로 이루어 졌다, 루인이 공부하는 방식은. 그러니까, (텍스트와 관련한) 루인의 경험을 앓고 루인의 위치positioning를 어느 정도 읽은 후에야 논문 등의 글들을 읽었다. 그러길 선호하는 건, 과거, 이런 글들에 의해 루인의 경험을 읽는데 실패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앎과 삶을 같이 읽기 보다는(요즘은 앎과 삶이 분리될 수 없다고, 이론과 경험을 분리해서 몸앓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건 이론에서나 가능하지”라는 언설이 불편하고 감정 없는 이론을 위험스럽게 받아들인다) 지식 자랑에 급급했기에 루인의 경험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지식으로 루인의 경험이 설명되지 않으면 루인의 삶이 이상한 것이지 그 이론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다.

아직도 이런 경험에 대한 걱정이 남아서 인지, 어떤 텍스트를 읽으려고 작정을 하면 그 전에 그 텍스트와 관련된 경험을 먼저 읽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 편이다. 그럴 때 텍스트와 루인의 경합, 이동mapping 등이 더 즐겁게 발생했다. 텍스트 내용을 파악하려고 급급할 땐 지루하거나 재미가 없었다.

이랑 세미나의 다음 커리를 정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주제는 이반queer. 하지만 루인 역시 관련 커리를 읽은 것이 별로 없다. 현재 루인의 작업은 텍스트 읽기가 아니라 루인의 삶을 읽는 작업 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몇 개의 텍스트를 읽고 있긴 한데, 세미나로 같이 쓰기엔 좀 애매한 구석이 있는 텍스트들이다. 이래저래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