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결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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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적은 bell hooks읽기는 한 달 가량 쉬기로 했다.

이번 주말이면 [Talking Back] 읽기가 끝난다. 그러면 9월 달엔 오늘 프린트한 몇 개의 논문들을 읽을까 한다. 당장 루인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들이라 알고 싶은 것도 있고(잘은 모르지만 아마 국내에 관련 도서는 거의 없는 듯 싶다. 논문들은 몇 있는데…) 말 그대로 쉬어가려는 것도 있다.

쉬어가려는 것은, 돌이켜 보면 열 달 가량을 계속 bell hooks만 읽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벨 훅스 문법엔 익숙한데 다른 영문을 보면 낯설거나 더듬거리거나 그런다. 그래서 한 달 정도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을 필요가 있겠다는 몸앓이가 들었다.

읽을 논문들은 거의 sex/gender/sexuality에 관한 글들이다. 루인식으로 표현하면 항상 안다고 믿지만 사실 전혀 모르는 것이 sex/gender/sexuality가 아닐까.

그러고 나면 이제 루인이 읽고 싶어하던 bell hooks의 [Yearning]을 읽을 예정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기 위해 이전의 책들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각각의 책들이 다 좋았지만, 처음 영서를 읽겠다고 시작했을 때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이 [Yearning]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음 책은 정해져 있다. 그런데 그땐 두 권을 동시에 읽을 것만 같은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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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갈등하던 그 과목 듣지 않기로 했다. 냐하하. 아쉬움이 없을리 없겠지만 그냥 버리기로 했다. 그 시간에 루인이 읽고 싶은 글을 읽어야지.

대화의 ‘조건’

전쟁 혹은 폭력의 반대말은 고요한 상태가 아니라 격렬한 대화라는 말, 루인이 참 좋아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대화가 모든 발화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루인에게.

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우선 말하고 듣기라고 몸앓는다. 물론 이 말하고 듣기란, 몸의 전체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이전에도 말했듯 누구에게나 자신 만의 언어가 없는 것이 아니기에 누구나 ‘말하기’는 하고 있다고 몸앓는다. 그것을 자신과 다른 타인들이 들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대화라면 최소한 말하기 뿐 아니라 듣기 또한 핵심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단지 듣기만 한다면 그건, “그래, 그러니 우리는 달라.”라는 식의 결과만 초래하거나,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어쨌거나 내 말 들어!!”라는 식의 폭력만 초래할 뿐이다. 말하고 듣는 과정을 통해 변화變化(transforming, becoming, metamorphosis, …)하는 것이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몸앓는다. 이러한 자기 변화 과정이 없다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독백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소위 말하는 마초들의 성폭력 발언/행동들(발언은 행동이 아닌가?)이나 권력자들이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는 것은 권력의 과시/폭력이지 그것이 대화라곤 몸앓지 않는다. 그것이 대화이기 위해선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읽고(positioning) 이를 바탕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그런 소통을 통해 계속해서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럼 이제까지의 권력자(혹은 스스로를 주체로 호명하는 이들)들에 의해 생성된 담론들은 틀렸다는 말일까. 물론 아니다. 그런 담론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담론은 무수한 다른 담론들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런 담론이 진리/객관/보편성이었다면 격렬한 대화를 통해 그런 담론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일 뿐,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 것이다.

격렬한 대화는 이런 거라고 몸앓는다. 물론 현재의 몸앓이일 뿐이지만, 대화를 위한 그리고 그것이 대화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있다는 것이 현재의 믿음/몸이기도 하다.

경험의 정치화

데이터가 되기 싫으면 자기 경험을 직접 이론화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픈 몸의 발화를 읽고 그것을 정치화할 수 있어야지 아픈 몸이라는 경험만 가지고 있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경험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언어화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논쟁적인 것이기에 경험을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